이제 칠순을 훨씬 넘긴 정숙 시인이 이 시집에서 보여주는 것은 삶의 짙은 향기이다. 삶이란 어떻게든 살만한 것이다. 그리고 그 삶에서 보여주는 나름의 철학은 ‘보살행’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집의 처음을 여는 시에서 그것이 읽힌다.
구름이 하늘에 멋들어지게 꽃 피우듯 한 순간 바람의 깃털에 찔려 숲 속으로 쿵, 넘어지는 설해목 여린 등걸을 쓰담, 쓰담 어루만져 주는 손이 있다
- 「쓰담보살」 전문
설해목이란 겨울철 눈의 무게에 가지가 찢어진 나무를 일컫는다. 그 상처 입은 나무를 쓰다듬는 손이 있다는 것인데 그 손은 바로 자비와 사랑의 손길, 즉 부처의 손이다. 나무의 마지막 모습이 “구름이 하늘에 멋들어지게 꽃 피우듯 한 순간”이라고 묘사되고 있다. 마지막 모습이 아름답고 장렬하다. 모든 삶의 마지막 모습이 이러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게다가 그것을 쓰다듬어주는 자비의 손길도 있다. 시인의 따뜻한 눈길은 계속 이어진다. 쓰담보살이라는 용어에서 시인의 생명 철학과 장난기가 느껴진다.
21세기 최신형 인공지능기도 따라올 수 없는 충실한 노예, 그 충성심 눈물겨워라!
- 「손」 전문
단행 시다. 간결한 만큼 강렬하다. 과학이 아무리 발달하고 컴퓨터, 로봇이 아무리 성장한들 손만 할까. 너무나 섬세하고 충직한 이 손이라는 노예, 그 “충성심”이 눈물겹다고 말한다. 손의 고마움이야 누구나 생각하는 것이지만 그것의 기능을 21세기 최신 인공지능과 비교하고 또 그것의 충실함에 주목함으로써 극대화시키고 있다. 아하 손이란 그런 것이구나 라고 독자들은 재삼 탄복하게 된다.
이천 십 육년 오월 어느 날 팔공산 동기간愛*에서 달북은 자신의 낡아가는 모습 재미있다며 신록, 담록, 연록을 조곤조곤 얘길 하셨다. 떨리는 손으로 7 대 3 가르마 탄 남자와 귀여운 여자 사이에 검은 고양이 그리곤 사인을 2016 뭉순이라고.
정 숙은 처용무, 박 이화 황 명자 시인은 방천연가에 전시할 시화 육필 쓰고 있는데 선생님 동네 흑백 주황색 무늬 독특한 패션 고양이 세 마리 이름을 요년, 조년, 고년으로 부른다는 얘기 담장에 걸터앉아 엿듣던 노란 장미들이 활짝 피어나고 있었다. 노태우 생가 위 연초록 문필봉이 십 팔세 머슴아 아침 팬티 속 같다며
허허로운 웃음 흰 구름 되어 아직도 그 봉우리에서 피고 지는 인연 즐기고 계시는가 연록이 오징어 게임하면서 신록으로 넘어가고 있다.
*달북은 문인수 시인의 별호
- 「달북*의 동기간愛」 전문
돌아가신 문인수 선생과의 일화이다. “이천 십 육년 오월 어느 날 팔공산 동기간愛*”이라고 시간과 장소를 일단 명시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이다. 2021년에 돌아가셨으니 아마 그때쯤 건강이 안 좋으셨을 것이다. 그 문인수 선생과의 대화를 시로 엮고 있다. 문 시인이 “자신의 낡아가는 모습 재미있다며 신록, 담록, 연록을 조곤조곤”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자신의 삭아가는 모습이 재미있다니, 과연 시인이다. 객관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의 건강은 “떨리는 손으로”라는 구절에서 드러난다. 그 손으로 간단한 삽화를 그려서 “2016 뭉순이”라는 사인을 했다는 것이다. 아마 문 시인은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고 있었을 것이다. 2016이라는 연도가 가슴을 친다.
문 시인의 장난기는 이어진다. “동네 흑백 주황색 무늬 독특한 패션 고양이 세 마리 이름을 요년, 조년, 고년으로” 이름 붙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노태우 생가 위 연초록 문필봉이 십 팔세 머슴아 아침 팬티 속 같다”는 말씀도 이어진다. 그런 말씀들이 강한 인상으로 정숙 시인의 뇌리에 남아 있다. 그리고 그때 선생의 모습은 “허허로운 웃음”이었는데 그것이 “흰 구름 되어 아직도 그 봉우리에서 피고 지는 인연 즐기고 계시는가”라고 말하고 있다. 저 흰 구름이 꼭 선생의 웃음 같다. 저세상에서도 흰 구름 즐기고 계신가? 그때 그 만남의 날에서 또 기억되는 것은 “연록이 오징어 게임 하면서 신록으로 넘어가고 있”더라는 것이다. 연록이 신록으로 넘어간다는 것은 늦봄의 왕성한 생명력이다. 그것이 문 선생의 사그라드는 생명과 대비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때문에 더 슬픈 것이다.
문인수 선생과의 일화는 그 슬픔 속에서 달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아시다시피 그는 대구를 대표하는 뛰어난 시인이었다. 이제 그것은 정숙 자신의 병마와의 사투로 이어진다.
누가 언제 어디쯤에서 던진 돌멩이인가? 코스모스 들판 건너 언덕에 종일 앉아 기다리다 ‘사랑합니다’ 쪽지 준 뒤 감나무에 목 맨 머슴애가 밤하늘에서 보낸 짝사랑 운석인가? 꿈이 소복의 친정엄마 자꾸 보여주더니, 가슴 겨드랑이에인이었다. 그가 바라보는 세상은 눈물 젖은 것은 아니었다. 애써 태연한 것도 아니었다. 약간 허허로우면서 초연한 것 알맹이 들어 있다고 내 무딘 손가락이 짚어 보이더니, 이른 봄부터 시간 펌프질하며 잠시 눈 돌릴 여가 없이 살아왔는데 가을 갈맷빛 개나리 이파리들 시어머니 오지랖에 고깃국 쏟은 며느리 되어 안절부절이다
- 「별똥별에 관한 보고서 1」 전문
“누가 언제 어디쯤에서 던진 돌멩이인가?”라는 의문문이 시를 연다. 그리고 생뚱맞은 일화가 소개된다. “‘사랑합니다’ 쪽지 준 뒤 감나무에 목 맨 머슴애”가 그것이다. 그런 아픈 사연이 있었던가. 지금 시인이 맞고 있는 난데없는 재앙이 그가 “밤하늘에서 보낸 짝사랑 운석”이 아닌가? 라는 의문문이다. 그 죽은 머슴애가 던진 별똥을 맞았단 말인가. 게다가 불길한 “꿈이 소복의 친정엄마 자꾸 보여주더니, 가슴 겨드랑이에 알맹이 들어 있다고 내 무딘 손가락이 짚어 보이더니” 이런 사달이 났다는 것이다. 가슴 암 진단을 받은 것이다. 아하 이런 일이 생기다니, 당황하는 것은 시인 본인뿐 아니다. “가을 갈맷빛 개나리 이파리들”도 저 시인 죽을병 들었다고 난리법석에 안절부절이다. 자기들을 노래하던 시인이 병들었으니 그럴 만하다. “시어머니 오지랖에 고깃국 쏟은 며느리”라는 비유는 이 소식을 알고 놀란 모두를 말하는 것일 터이다.
부끄럽다 죄될까 그토록 꽁꽁 싸매었었는데 대숲이 후회스러울 정도로 젖가슴에 마구 칼질 후, 젊디젊은 의사들이 빨강 파랑 그림 그린다 통닭을 방사능으로 지지고 굽는다. 두어 시간 누워 맞은 항암 약은 적응하느라 구토 일으키는데 먹기는 먹어야 하고 허기 참느라 온 산 헤매다 겨우 복숭아 몇 개로 채우는 이도 있다
- 「별똥별에 관한 보고서 2」 전문
“부끄럽다 죄될까 그토록 꽁꽁 싸매었”던 것이 병의 원인이 되었는지 모른다.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가슴을 싸매었으니 어쩌면 복수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숨겼던 부분을 “대숲이 후회스러울 정도로 젖가슴에 마구 칼질”하더라는 것이다. 그렇게 무자비한 칼질이 있은 후 “빨강 파랑 그림”을 크게 그려놓은 다음 “방사능으로 지지고 굽”는 과정이 이어진다. 또 그런 다음에는 무시무시한 항암 약의 순서이다. 두어 시간 누워서 약을 투여한 다음 “적응하느라 구토 일으키는데 먹기는 먹어야 하고 허기 참느라 온 산 헤매다 겨우 복숭아 몇 개로 채우는” 처절한 투병 과정이 이어진다.
첫 알약 몇 알에 툭, 툭, 떨어져 내리는 머리카락, 울음 죽이며 빡빡 밀어버려야 하는 파르란 입술, 온 전신이 수치스런 부분 가릴 수 있는 모자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야 대낮 하늘이 저 구름처럼 맘대로 그림 그리고 뻔뻔 떨 수 있지, 끝내 검게 탄 손톱 발톱도 빠진다는데 핏줄은 자꾸 몸 안으로 숨으면서 무서워! 무서워, 주사바늘이 무서워! 간호사가 팔뚝 다리 다 찰싹 때려가며 찾아도 핏줄이 없어 겨우 발등에서 찾으면, 다른 환자까지 만세! 부르며 환호한다. 그래도 못 찾으면 목에 구멍 뚫어 바늘 꽂아야 한다
- 「별똥별에 관한 보고서 3」 전문
아마 여성으로서 가장 충격적인 현상은 항암 과정에서의 탈모일 것이다. 그것은 “첫 알약 몇 알에 툭, 툭, 떨어져 내리는 머리카락, 울음 죽이며 빡빡 밀어버려야” 한다는 말로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온 전신이...... 모자라면 얼마나 좋을까?”로 이어진다. 이 수치를 어떻게 가려야 할까. “끝내 검게 탄 손톱 발톱도 빠진다는데” 이 사람 같지 않은 모습을 어떻게 감당하지,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지? “핏줄은 자꾸 몸 안으로 숨”는다. 주사를 하도 맞으니 핏줄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것이다. “간호사가 팔뚝 다리 다 찰싹 때려가며 찾아도 핏줄이 없어 겨우 발등에서 찾”기도 하고 “그래도 못 찾으면 목에 구멍 뚫어 바늘 꽂아야 한다”로 이어진다. 이 처절한 항암 과정은 있는 그대로가 하나의 시다. 어떤 수식도 필요 없다.
왜? 하필 왜 내가, 무너진 자존심 서러워 울음 삼킨다 자면서도 모자 꼭꼭 눌러 쓴다 식당엔 온통 맨 머리 스님들이시다 생의 패배자처럼 숨어 구름 부러워하는 사람들, 쉼 없이 뒤따라오는 발자국 소리에 쫓기면서 밤낮 모자님 모셔야한다
- 「별똥별에 관한 보고서 4」 전문
“왜? 하필 왜 내가”는 이런 경우 누구나 묻게 되는 억울한 외침일 것이다. “자면서도 모자 꼭꼭 눌러 쓴다”는 행동에서 그 본능적인 수치심과 가리고 싶은 마음이 보인다. 시인은 “식당엔 온통 맨 머리 스님들이시다”라고 토로하고 있다. 이 병원 식당에 웬 스님들이 이리 많은가. 모두 항암 환자들이다. 자세히 보면 눈썹도 없다. 무서운 병, 무서운 치료이다. 몸의 멀쩡한 세포들까지 다 죽이고 있으니 이 난리인 것이다. 병에 걸린 것이 무슨 죄인가. 아무 죄없이 “생의 패배자처럼 숨어” 지내는 사람들이다. “쉼 없이 뒤따라오는 발자국 소리에 쫓기”는 사람들이다. “밤낮 모자님 모셔야” 하는 사람들이다.
젊은 밤 꿈결이 내 이마에 찍어 준
그 자국이 시든 사랑의 말초 세포 깨워
분홍 낮달맞이꽃 피우고 있다 한여름 대낮 연못보다 더 뜨겁고 환한
밤, 그리움의 발자국
그 떨림의 흔적, 아직도 그 골목길이
싹을 틔우지 못하는데
난 이미 꽃잎 다 지우고 수술대에 누워
간호사들 수다와 천장 불빛에
바들바들 떨다 스르르 잠들고 있다
- 「입술낙관」 전문
“젊은 밤 꿈결이 내 이마에 찍어 준/그 자국이” 아직도 “분홍 낮달맞이꽃 피우고 있다.” “뜨겁고 환한/밤, 그리움의 발자국//그 떨림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아마 시인의 젊은 날 사랑의 추억일 것이다. 사랑의 기억이란 나이를 불문하고 가슴을 뛰게 한다. 이미 칠순을 넘겼지만 아직도 그 추억은 아련히 가슴 뛰게 한다.
그런데 현실의 나는 처참하다. “꽃잎 다 지우고 수술대에 누워/간호사들 수다와 천장 불빛에/바들바들 떨다” 마취약의 효과로 스르르 의식을 잃고 있다. 마치 죽음과도 같은 잠일 것이다. 이 시는 젊은 날의 추억에 상당히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현실이 암담하고 불안하니 더 과거의 추억이 아름답게 살아나는지 모른다. 시인이 그런 추억에 잠기거나 말거나 간호사들은 대수롭잖다는 듯 수다를 떨고 있다. 무수한 수술을 경험한 그들에게는 이것도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더구나 안경 너머 냉정한 눈을 번득이는 의사들에게 나는 칼질할 고깃덩이일 뿐이다.
바람은 등뼈가 없어 흐느적인다
힘 빼는 척 살랑거리다가
마구니 되어 숲 쓰러뜨리기도 한다
척추가 바로 서지 않는다
꽃씨를 버려야 한다
의사선생님이 죽은 말씀만 하더니
매일 요양병원 뒷산에 올라 돌탑 쌓던
굵은 금 목걸이 젊은 아저씨
진통제, 회오리 사탕 빨며
휠체어 타고
생의 마지막 가설무대
호스피스 병동으로 떠나보내고 있다
찐한 사랑이 뼈로, 간으로 전이되어
살구꽃 웃음 활짝 피워내길 기다렸는데
- 「등뼈와 회오리 사탕」 전문
“등뼈가 없어 흐느적”이는 바람의 모습은 수술을 마친 환자의 느낌이다. 자신도 거의 무척추동물처럼 흐느적거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바람도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 바람은 “힘 빼는 척 살랑거리다가/마구니 되어 숲 쓰러뜨리기도 한다”는 것이다. 살랑거리는 바람에도 넘어질 지경이다.
이것은 2연에서 “척추가 바로 서지 않는다/꽃씨를 버려야 한다”로 이어진다. 허리를 세울 수 없으니 가벼운 꽃씨마저 버려야 할 것이다. 이것은 시인 자신의 고통스러운 상황이다. 의사는 매일 죽은 이야기, 즉 사무적인 말만 한다. 이것을 어떻게 견디나? 그런데 이 요양병원에 시인의 주목을 끄는 사람이 하나 있다. “매일 요양병원 뒷산에 올라 돌탑 쌓던/굵은 금 목걸이 젊은 아저씨”가 그이다. 돌탑을 쌓는다는 것은 살고 싶은 소망일 것이다. 굵은 금목걸이는 실제 모습일 테지만 몸의 고통을 줄이기 위한 보조 의료 장치로 읽힌다. 그런데 그도 마침내 “진통제, 회오리 사탕 빨며/휠체어 타고” 말기 환자의 처소, 호스피스 병동으로 갔다.
“찐한 사랑이 뼈로, 간으로 전이되어” 건강이 회복되기를 바랐었는데 오히려 암이 전이되어 결국 마지막 길을 갔다. “살구꽃 웃음 활짝 피워내길 기다렸는데” 결국 반대로 되었다. 시인의 한숨과 허탈함이 느껴진다. 젊은 청년의 죽음은 더 슬프다. 아직 꽃피우지 못한 생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바라보는 시인에게는 남의 일 같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시인은 회복되어 살아나왔다. 다음은 그것을 겪고 난 뒤에 쓴 시라고 생각된다.
벼랑 끝 바위에서 겨우 살아남아
맘대로 몸 키우지 못하는
소나무 한 그루
목숨 뻗어나갈 물 한 모금, 흙 한 줌
한 평생 허덕이며 길 찾아야 한다
- 「생이란」 전문
“벼랑 끝 바위에서 겨우 살아남아”라는 구절은 시인의 생존을 말하는 듯하다. 그 지옥 같은 암 병동에서 살아나왔다. 그것이 벼랑 끝에서 겨우 살아남은 삶과 대비되는 것이다. 이것은 “맘대로 몸 키우지 못하는//소나무 한 그루”를 말하고 있다. 그 소나무의 삶이 시인 자신의 삶이라고 생각되었는지 모른다. 그리하여 이어지는 “목숨 뻗어나갈 물 한 모금, 흙 한 줌//한 평생 허덕이며 길 찾”는 소나무의 지난한 삶이 더욱 소중하고 아름답게 다가오는 것이다.
시란 시인의 체험이 묻어 있을 때 가장 진솔해진다. 정숙 시인의 이번 시집은 항암 체험이 주를 이루고 있다. 아마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재앙이었을 것이다. 본인의 느낌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죽음이 코앞에 닿은 느낌이야 오죽 처절하겠는가. 그것이 어느 정도 지나면서 하나씩 시로 기록했을 것이다. 시를 쓸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 지옥 같은 체험이 이렇게 시집으로 묶여 나올 수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