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눈 뜨고, 감을 뿐인
한 생애
사랑을 위해 죽겠다는 일념으로
늦여름 제 몸 흙속에 파묻고, 숨어
사람들 가슴에 다홍빛깔 꽃무릇 피우더니
이제 겨울이 되어
그 꽃잎들 땅 속에 숨어들어가
뿌리의 힘까지 빌어가며
죽을 각오로 잎을 밀어 올린다
죽는 것이 곧 사는 길이라는
삶과 죽음의 묵은 장을 펼치는
눈 덮인 들판의 푸른
경전, 시퍼렇다 못해
처절하다
꽃무릇 꽃과
진초록, 갈맷빛 이파리들이 서로 주고받는
삶의 무게, 또한
감당할 수 없는 희열이여!
방천시장엔 처용아내 치맛자락이
-방천연가 1
아파트 발코니의 천리향과 행운목 꽃향기 보내고 나니 이제 또 학쟈스민이 다 닳아버린 나의 봄 미치게 흔들어댄다
견디다 못해 방천시장 김광석 거리 거닌다. 아직도 낡고 좁은 장터 골목길, 그러고 보니 이 근처 삼덕동, 대봉동 참 오래도 살았었다. 꼬꼬댁! 꼬! 꼬! 구원을 청하던, 닭 잡던 그 탈모통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단발머리 중학생, 쫑쫑 땋아 내린 여고생, 긴 머리 출렁이던 대학 첫 가든파티, 라일락 향기 시절에서 넓고도 낡은 적산가옥에서 시집살이 십 오년 뒤 범어동 아파트로 이사 갔지만, 처용아내의 햇살과 어둠의 비빔밥, 그 찬란한 눈물 비비다가 부서진 조각 사금파리들이 시장 좁은 골목길에 버려져 있다.
그 조각들 주워 맞춰보니 잘 다듬어진 맏며느리의 탑 하나 세워보겠다던 그 오기, 몸빼 바지나 월남치마 길게 끌며 장보기 짐에 이끌려 가는 자랑스런 내 청춘, 존심 세워 처용가를 부르며 칠칠맞은 손 흔들어대고 있다.
16
콩나물시루
-방천연가 2
방천시장 떡 방앗간 겨울 담에 기대어 햇살바라기하며
정을 소복소복 키우던 합죽할머니
백 원 어치 사면서 ‘쬐매만 더 주이소 할매’
단발머리 자취생 단골에 ‘오야, 마이 무라’ 잇몸 웃음으로
한줌 더 얹어주시더니
지금쯤 하얀 날개 달고 초로의 그 소녀 웃고 계시겠지?
17
고추기름, 눈 뜨다
-방천연가 3
예, 예, 죄송합니더!
삼덕동 적산가옥에서 펌프질 사흘토록 마당 씻으며
점점 가정부로 전락하다가
거의 십년 뒤 동서 둘 보면서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이 빠알간 고추기름처럼
둥둥 떠다니기만 한다는 걸 눈 뜨게 되었다
아파트에 사는 젊은 동서가 온 날
몸빼이 입고 시장에 고추 빻으러 갔다가
기다리는 동안 혼자
바로 맞은 편 소고기 국밥 한 그릇 후루룩 삼켰다
와 이리 늦었노?
늦장부리며 돌아온 맏며느리에
굵은 소금 씹으며
꾸중하는 시어머님께 입 꾸욱 다물었다
쉬잇! 첫 반항, 몇 십 년 지난 특급 비밀인데
며느리는 끝내 한 식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고추기름은 언제든 거둬 내버리면 그만인 것을
그때도 깨닫지 못했었다
18
탈모통엔 내가
-방천연가 4
고추방앗간, 참기름 집 옆 떡집 지나면
닭 집이 있었다
철사 얽어맨 통 속에 갇힌 닭들이
게으름에 길들여져 발톱만 기르고 있었다
내 손짓에 목숨 달린 그들은
한 생을 맘대로 요리한다고 날 거만스럽다고 욕했겠지
탈모통 속 돌아가며 탈 뽑히면서
날개 푸득거리는 그 소리 참말로 미안했었는데
털 뽑히는 그 모습이
시집살이 입방아에 시달리는 한 여자와
닮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19
푸른 다리 아래서
-방천연가 5
먼 먼 칠석날 눈물 머금고 흘러온 미리내 줄기, 흐르다가 애달븐 연인들의 가슴 소용돌이 풀지 못해 새내 웅덩이에서 맴만 돌고 있다네 땡그랑, 댕그랑, 물결 속 열사흘 달빛기둥 위 작은 은종을 간절하게 치며 기도하면서
그 종소리 듣고 자란 피라미들 뒤엉킨 은하수 전설을 풀어 무지갯빛 천을 짜고, 그 그리움을 내 청춘의 검고 긴 머릿결에 둘러주던 눈 시리도록 아린 그림자! 너는 뭇 세월 견디느라 날금해진 신천 푸른 다리 아래서 누굴 기다리는가
그 여름날 천둥 비바람 가려주던 우리들의 청춘, 그 우산은 멀리 저 멀리 날아가 버리고 없는데
20
신천, 수달에게
-방천연가 6
1.
이제 돌아온 거니
지문이 닳아 없어지도록 열심히 살다가
너무 지치고 힘들어서
고픈 웃음에 깊은 주름이 질 때
동신교 열사흘 달빛 아래서 만나자던 약속 지키려
돌아온 거니
엄마의 젖가슴 같은 풀밭은 사라지고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앉아
새내를 흐르는 달빛 속
우리들 젊은 날의 희미한 그림자를 찾고 있는 거니
그 시절 비바람 가려주던 너와 나의 우산은 이미 멀리 날아 가버렸다 치더라도 그리움 남아 맴돌던 웅덩이마저 사라져버렸으니 그러나 조용히 저 물결 소리에 귀 기울여 보려 므나 부드러운 흙더미에 기대 앉아 보름 달빛을 맞이하던 그 낭만의 밤, 서로 길들여져 있던 푸릇한 몸향기 멀리서 울려오는 징소리처럼 은은하게 느껴지지 않니 네 아슴한 추억의 징채로 바람의 징을 두드리면 그 떨림의 파장 따라 달빛이 흔들리고 세월 따라 굳어진 응어리들 서로 만나 춤을 추리니
세상 벽과 벽 사이의 차가움
긴 두려움과 한숨으로 여문 옹이들
흐물흐물 녹아내리도록 우리 앞뒤 따지지 말고
힘껏 껴안아 보자 꾸나
오늘 밤 서로를 깊이 받아들이자 꾸나
나의 첫사랑이자 마지막 그리움을 함께 앓고 있는
너, 수달아!
어디서 기다리고 있는 거니
2.
사랑은 무작정 믿음이 아니었어
그 아름다운 말은 환상이었어
서로 소중할수록 자신이 부족할까봐 늘 불안했지
네 눈부처에서 돌아선 그 순간부터
지금 네 눈 속에 누가 들어앉아 있는지
나의 손길이 거칠지 않았는지
그 의심의 미궁에 빠져 점점 멀어지게 되었지
아무리 멀리 있어도 서로의 시선 벗어날 수 없어
때론 그리워하고 때론 환상을 할퀴고 물어뜯으면서
바다 속으로 기찻길 놓으면서
온라인으로 그리움 부치면서
일단 서로의 눈부처 되기 위해 만나야 한다
가까이서 체온을 느껴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지
사랑이란
잠깐 돌아서기만 해도 의심의 눈덩이들이 불어난다는 사실
너도 깨달은 거겠지
그러니 이렇게 돌아온 것 아니겠니
넓은 금호강 하구에서 애타게 부르는 네 애절
새내 다리 아래서 거친 손마디만 만지작거리고 있는
네 커다란 눈망울의 슬픔
서로 쓰다듬으며 어울려 같이 강바람을 끌어안아야
그 틈 사이 크렁, 크렁, 정다운 공명이 생기지 않겠니
부드러운 들판 펼쳐지며 풀잎들 새파랗게 돋아 오르지 않겠니
나의 첫사랑이자 마지막 그리움을 함께 앓고 있는
너, 수달아!
어디서 기다리고 있는 거니
열사흘 달이 수줍게 떠오르고
달빛이 다리 밑 물결 속으로 스며들어가고 있어
달빛체온을 끌어안는 신천의 숨결 차륵, 차르륵, 거칠어지고 있어
3.
쉿! '가만히 가만히 오세요 버드나무 아래로' 그 속삭임도 이제 소용없구나 하이얀 솜털 휘날리던 버드나무들 모두 베어버리고 흔적조차 없으니 사람들 우악한 목소리와 발자국 소리들만 왁자하니 색깔 고운 사금파리 빻아 떡도 찌고 반찬도 만들어 상차림하며 난 엄마 , 넌 아빠 소꿉놀이 하던 그 곳을 찾을 수가 없구나 그 그늘이 없어 우린 아직까지 만나지 못하는 구나 반질반질 검은 자갈돌 사이로 알록달록 채송화 꽃잎들 찧느라 물든 추억들 지금도 가슴에선 새록새록 피어나고 있는데 너 어디 숨어 떨면서 나를 바라보고 있니 막상 몸 숨길만한 바위도 하나 없는데
21
행복
--방천연가 7
온기 남아있는 가슴 언저리에
도톰한 입술 자국 꼬옥 부여잡고 있는
플로체의 모닝커피 잔에
간밤의 쌉쌀 달달한 외간향 음미하느라
초침을 부여잡고 떨고 있는
슬픈 사랑의 그림자들
그 짜릿한 상처 즐기느라
내 안에 숨은 장미 꽃봉오리들 곧 터질듯
새빠알갛게 부풀린다
22
김광석을 안다
-방천연가 8
멋진 맏며느리가 되겠다는 꿈 어리석다
등짝을 내리치며 시인의 길로 재촉하신
시어머님과 가족
물론 시인이 되라고 하진 않았지만
어릴 때 소설가가 되라던 아버지 말씀 기억하게
해주신 말씀과 약한 눈물들
눈 뜬 장님처럼 더듬거리며 사십 중반에 찾은
늦깎이 시인, 그 길 또한 생판 낯선 사람을 만나야 하니
징검다리조차 없는 큰 물길
황토물 소용돌이에 현모양처는 떠나보내고
이 봄날, 살아있는 것이 대견해 미선, 경화, 승태와
광석을 안고 벚꽃꽃송이 송이 화르르 꽃피운다
시인보다 더 아름다운 시로 사랑과
가난, 서글픔을 노래한 별, 벽화 속 기타 줄에
바람이 내려앉으려다 발을 바둥거린다
23
바보, 다듬이질
-방천연가 9
시아버지 직원들의 뽀프린 천 이불보 빨아 풀 먹이고 다듬이질해대느라 단순하면서도 친정 과수원 들장미 가시들을 불러 모으던 그 때 그 시절,
백서른 평 적산가옥 삼덕동 마당엔 마중물 먹은 펌프질 소리와 키 큰 리키시다 소나무 바람소리가 철퍼덕, 철퍼덕, 우! 우! 그리고 양동이에 물 받아 마당 청소하는 소란을 모아 합창을 했다
그 어울리지 않는 화음 한참 즐기던 참새들이 마당에 내려와 햇볕에 마르다가 남은 물에 깃털을 다듬는 한낮, 혼자 남은 맏며느리는 절간 소리에 귀 기울이다가 바다를 꿈꾸기도 하다가
밥 한 끼 어려운 시절 셋째, 넷째 딸까지 대학공부 시켜준 아버지 어머니의 자존심에 어떻게 풀하고 다듬이질할 것인가 그런 골머리 추호도 없이 빛깔 고운 산호초가 분명 이 허허 집 안에 있을 거란 막연한 생각만 하고 살았으니
24
시할머니 보살
-방천연가 10
충만에 못 이겨 벌어진 석류처럼 늘 이를 내보이며 웃어주던 자비 보살님, 대접받던 선생님 후광 버리고 어둠의 늪으로 웃으며 걸어 들어온 손부에게 등대처럼 불 밝히며 정으로 다독여주시더니
자주 누워서 힘, 줄을 당기시던 어머님에겐 맏며느리가 또 하나의 우울한 그늘이었을까?
사대 봉제사 장 볼 때마다 충실한 짐꾼이지만 책임감만 수놓은 앞치마 두른 살갑지 못한 며느리 때문에 어머님이 도리어 어른에게 따돌리는 기분 아니었을까? 신천 아카시아 향기에 내 한숨 속 낮달을 실어 보낸다
25
수선하다
-방천 연가 11
플로체에서 시화 전시회를 둘러본 뒤
시장 골목길을 걷는다
김광석 거리 탓인지
옛 건물이 자꾸 사라지고 있다
자잘한 술집들을 지나 ‘재봉틀 소리’ 집 장미들이
노랗고 붉은 꽃송이로 낡은 담장을 수선하고 있다
삼십년 지난 원피스를 첫사랑과 걷던 시절로
또는 신혼여행 길로 되돌려 주는 주인의
재봉틀 솜씨 들으며 늦은 봄 가꾸고 있는가
잠시 유리창에 비친 나를 돌아보다
두서없이 중얼중얼
“봄날도, 여름도, 가을까지 다 그냥 보내버리고
찬 서리 겨울늦바람에 몸부림치고 있는
어리석은 여자의 몸과 골진 마음을 다시
화사한 봄날로 수선해 줄 수는 없나요?”
26
번개탄 사랑
-방천 연가 12
시장 안 연탄 집이 어디였던 가 살피다
옛 삼덕동 집에 갇힌다
대책 없이 가정부까지 내보내버리고 혼자
하루 스무 장 까지 갈아 넣어야 하던 연탄아궁이
밀고 당기며 갈아 넣다가
뜨거운 연탄재가
흰 보선 안으로 들어가 팔짝팔짝 뛰던 시절
제 할 일 다 한 빈 몸뚱이지만 연탄재를
고무신발로 차지 않을 수 없었다
내 할 일 다 하려 아등바등 거리는
새댁 비웃는 그가 가시였다
연탄과 연탄 사이 불을 붙여주는 번개탄
온 몸 구멍을 내어 불길 통로를 갖고 있지만
차가운 시집 식구들, 그 사이에서 위아래
불 끼를 나누는 번개탄이 되는 것
그것이 나의 꿈이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