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15    업데이트: 24-03-15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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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숙시인의 작품 모음 2
관리자 | 조회 389
달빛 화간 2
 
잠든 듯 넘실대는 밤 파도를 밟고
달은 금빛 머리카락 출렁이며
춤을 춘다
춤사위 속 몇 올은
달맞이 꽃입술에 달린 종을 흔든다
애틋하게 서로의 눈부처 바라본다
이제야 달이 둥글게 차오르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간절한 그리움이
죽고 싶도록 휘휘한 적막에 녹아들어야
빛이 되고 생명이 된다는 걸
저들은 나 보다 먼저 깨달은 것인가
어둠은 또 다르게 치열한 삶의 현장
메두사가 풀어놓은 뱀들이
달빛인양 춤을 추다가 지쳐 쓰러진다
대낮에 햇빛을 받으려 전을 펼치던
연들은 제 꽃입술을 새촘히 오므린다
 
 
 
47
 
18.막연하고 보편적인 것을 취급한 시

펌프질하다
-대구 빙하기 22
 
거친 숨소리
사층 발코니의 무더위 견디느라
쟈스민은 정신없이 펌프질 하고 있다
물을 끌어올리려면 마중물을 부어야 한다
삽 십 년 시집살이가 냉큼 뛰어 들어간다
삼덕동 백서른 평 마당 씻느라
엉덩이 실룩이는 처용아내
이불호청 두드려대는 다듬이 방망이가
사랑의 매라며 변명한다
마당에 고인 물에 깃털 다듬는 참새들
모든 추억들 불러 모아도 소식이 없다
곧 콸콸 쏟아질 널 기다리며
코로나 19, 자가 격리 하 세월의
무료를 부어 다시 펌프질 한다
마스크도 버리고 참새처럼 재잘대는
그 날을 위해
 
 
 
 
 
48
19. 일상적이지만 기발한 은유를 위해
 
눈꺼풀
 
놀라워라!
 
넌 오늘도 내 생의 하늘을 밀어올리고,
 
허공을 번쩍 들어
 
세상을 열어 볼 수 있도록 하는 구나
 

 
벽들이 일어서면, 집이 된다
그 아늑함 속 가족이
비온 뒤 죽순 같은 저만의 벽 키우고
난 도배장이가 되어 어둔 벽마다
해바라기 벽지 바르거나
담장이 덩굴로 아무 콧등이나 붙잡고
허둥대기도 한다
끝내 물리칠 수 없는 벽은, 자신
저도 모르게 자라고 있던 거만의 얕은
꾀 내세워 벽 뒤에 벽을 감춘다
숨 막히는 순간 나팔꽃을 피우고
줄장미 까지 꽃피워 걸치기도 하는데
또 벽이 서 있어야 무너지지 않는다며
아이들의 섬과 섬
부부간의 벽과 벽 사이 똑, 똑 두드려
살뜰히 안부 살피는 손끝 배려가
가시철조망 녹인다는 말씀과
좌우 여야 이념의 콘크리트 틈에서
끝없이 자란 막무가내 벽, 소란에
긴 한숨이 길을 묻는다
 
20.이미지 제시와 새로운 리듬 창조를 위해
 
첫 남자

여자는 향기도 가시도 함께 지녀야 한다며 찔레꽃울타리 둘러놓고
헝클어진 내 생을 참빗질해주시던
 
내 태초의 첫 남자
아버지
 
당신, 내 눈길 벗어나지 못해 지금껏 기억의 어느 끄트머리에 매달려
물먹은 별* 반짝이고 있는가
 
 
 
환경보호 세미나한다면서 수북이 버려진 종이컵, 종이접시
도대체 나무 몇 그루를 죽이고 있는가! {-세미나에서, 정 숙}
 
너와 나의 그 공간엔 초롱한 별의 눈빛과 달빛이 지지 않는 곳이지, 그지?
-비밀 [정 숙]
 
 
 
칠곡 역에서
 
암 병동의 수술과 요양병원이 이제 추억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하면서
오년 지난 검사 결과를 듣고 오던 날, 범어 역까지 오는 내내 구월의
창 바깥엔 벚꽃이 화들짝 피어나고 있었다. 항암주사의 역한 냄새와
방사선 치료의 살 태우는 시간들이 웃음소리로 번지고 있었다.
 
 
 
이월바람
 
얼마나 매운 떡볶이를 먹었기에
저리 혀를 내두르며 울부짖고 있나
온몸 불붙은 타란튤라 춤을 추고 있다
가을날 가슴 부풀리며 범어네거리
환히 밝히던 은행나무 둥치에서
여린 가지들이 곧 떨어져나갈 듯 
웅장하고 급하게 두드리는 소리
운명 교향곡도 아니고
왕벌들의 비행소리도 아니다
잠시 바람결을 피하려다 올려다보니
나무둥치 높이에 ‘피아노 삽니다’ 팻말
피아노가 산다고?
그럼 이게 피아노 소리인가
도대체 누가 연주하고 있는 가
영등할미가 비와 함께 오는 딸이 아니라 
억척스런 며느리 데리고 내려온다고
올해 농사가 풍년이라고
신이 나 건반을 부수어대는 것인가
010 8523 3333 전번도 있는 걸보면
철없이 봄밤이라예! 나불대는
처용아내, 내가 먼저 전화하라는 뜻인가
 
51
 
숟가락 섬[정 숙]
 
사람의
섬과 섬 사이
숟가락엔 어느 노가다의 탄식이 남아있는가
 
메마른 영혼의 물기 마르지 않게
기꺼이 메아리가 되어주는
범종의 파문처럼
 
숟가락 달그락거리는 소리 들으면
삶과 죽음
몸과 몸 사이의 생존을 위해
평생 밥을 실어 나르는
하늘님의 고단한 노동이 보인다
 
새삼 밥 한 알의 무게 달아본다
 
 
 
 
 
 
52
 
 
 
21. 화장하지 않은 민낯의 시, 진정성을 위해
 
옷 고르기
---아름다운 법문 12[정 숙]
한 때는
달성 공원에 갇힌 공작새가 부러웠다
그 길고 빛깔 화려한 옷자락 끌면서
햇살을 배경으로 한 바퀴 도는 모습이
하도 도도하고 우아했기 때문일까?
겉모습보다 삶을 그렇게 살고 싶었다
부챗살이나 가끔 펴들며 귀부인 흉내를 내면서
 
오래 살아보니
그것은 내가 입어야할 옷이 아니었다
자신도 모르게
곧 터져버릴 풍선 하나 불어대고 있었던 것
별자리에서 내려와 바람과 같이 숨쉬고
이슬 머금는 들꽃들과 같이 부대끼는
풀, 풀들이 걸친 저 자유로움이
나의 맞춤옷이었던 것을
 
 
53
 
목단꽃은 지지 않는다
 
목단꽃 수놓인 양단 이불 모처럼 꺼내 덮어본다 손수 키운 목화솜 넣어 한 땀 한 땀 시침을 넣으시던 어머니, 그때 내쉬시던 한숨, 서른 해 지난 이제 모락모락 안개로 피어오른다
 
맏며느리가 비엔나 왈츠 연주 정도인 줄 알고
그 위에서 피겨 스케이트 춤추며
미끄러지는 법부터 배우겠다는 셋째 딸 보다가
바늘에 찔려, 하얀 이불깃에 핏방울 똑! 흘리시던 어머니
‘뒤란에 핀 모란처럼 붉게 부귀영화 누리라고
손가락도 한 부주하네’
그 웃음이 어설픈 눈물이었던 걸 이제 알겠다
그래도 걱정은 되는지
‘아들 못 낳으면 어쩌지?’
뭐 좀 안다는 듯 툭, 내뱉는 내 말에
‘딸은 가마 타고 떠나기 전 마굿간을 단디 치우는가 보고
참을 인자 천 번을 쓴 뒤에 보낸다던데......’
‘그래야, 모란이 눈물처럼 뚝뚝 꽃잎 떨어뜨리는 날도
억척스레 잘 버틸 수 있다는데......’
어머니, 그때 그 젊은 날의 꽃봉오리 시집이란 수틀 벗어나 함박, 함박 피었다가 이제 한 잎 두 잎 눈물방울처럼 이울고 있습니다 그래도 까막새 뒤란의 꽃은 결코 지지 않을 것입니다 저 눈물이 재 되고 거름 되어 고운 꽃망울 다시 부풀릴 테니, 어머니! 보고 계시나요?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목련꽃 그늘 아래 1.png.jpg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1792pixel, 세로 2790pixel

사진 찍은 날짜: 2020년 01월 12일 오후 12:27
 
 
자목련 꽃그늘 아래 서면

       
긴 통로가 보인다. 늘 바깥을 내다보며 친정 담장에 비스듬히 기댄 둥치 아래 저 어둠을 건너면, 잠깐 여우비 내리다가 무지개 걸린 언덕이 나타날 텐데.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걸어 들어가다 보면 녹슨 자물쇠로 굳게 잠긴 비밀의 문이 있다. 사월이면 그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는 나만 가지고 있다.

이윽고 무지개는 사라지고 꽃자주 스웨터를 걸친 눈망울이
까막새로 걸어가고 있다. 오목천 물 구비를 감싼 좁고 긴 둑길에서
사과 꼭지를 딸 일꾼을 찾아 동,동 오르내린다. 사라호 홍수에 허우적대며
떠내려가는 삼촌. 화마의 불춤에 휘말리는 할머니, 쌍그네 타다가
추석벼논에 떨어진 갑사 빨간 치마에 노랑 저고리, 사과나무를 가둔
밭둑 잔디 태우기에 뺨이 홍옥으로 물든 자매의 눈썹이 그을리고

풋사랑의 꼬임에 빠진 딸, 그 폭풍 속에서 춤을 추는 경주댁, 철없던 시절은 그게 미친 춤인 줄 알았지만 이제사 춤이 아닌 기도로 보인다. 승무 같이 애절한 엄마의 처용무, 곧 쏟아져 내릴 것 같은 새까만 먹구름, 밀려오는 가슴 속 파도 감당할 수 없어 얼른퍼뜩 비밀의 문을 잠근다.

그새 자목련은 누렇게 시든 한 시절, 지우고 있다
 
 
 
55
21. 사유의 깊이를 위해 물 때를 기다리는 시간
 
유통기한

문을 열기 전 늘 설레는 그곳, 서로 등 맞대고
철썩 처얼썩 파도에 은빛 비늘 번뜩이며 물살
가르던 고향 꿈꾸고 있겠지

살며시 열어본다
순간 날카로운 소리 등에 꽂힌다
엄마! 언제 보내드린 건데
몇 년 전이야? 버려요, 버려!
와르르 쏟아버린다
죽어서도 살아 있어야했던 목숨들
둔탁한 무기가 튀어오른다
얼음 칼끝이 내리꽂힌다
물바다가 물결을 일으키려 안간힘이다

꿈은 다시 깨어나 퍼덕거릴 것 같은데 단호한 소리에
놀란 미련이 눈 내리깔고 음식쓰레기 통에 주워담는다
그래, 살다보면 잘 버리기도 해야겠지! 부모도 버려지는
세상인데
지친 내 생의 꼬리가 꾸는 꿈, 
언제까지 파다닥! 소리 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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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설무대
       ㅡ정숙
 
절대로 원한 적 없었을 텐데
무대가 이미 펼쳐져 있었지
꽃도 향기도 싫었지만
때 되면 열매 맺어야 사람이 된다
앵벌이 위해 향 피우고
꽃잎 다듬어야 한다 재촉하더니
이제 왜 무대를 거두려 하고 있나
초침소리, 거품 물고 다그친다
넋두리가 후추 뿌리고 있다
가래 끓는 속으로 갇힌 기침소리
시간의 넋 흔들어대며 
잠깐 펼쳤던 판, 파장이다
팔십년 한 생이 마감하느라 
팔 오년 팔월 삼일 새벽 네 시라는
손주 며늘의 말에
핏빛 모란 송이 큼지막이 그리곤
인연의 끈 스륵 놓아버린다
비로소 날개 돋아나는 걸 믿는지
미소 머금은 채
 
 
 
57
 
 
 
밟히다와 밟다

미련둔탁해 보여도 속은 있나보다
늦가을바람이 방향 없이 굴리는 몸들을
지그시 꾹꾹 밟고 있다
세상 다 얻은 표정이 당당하다
마른땅, 진흙 밟으면서 늘 우러러 올려보았던
세력들이 마침내 눈 내리깔고 있다니!
하늘 손잡고 나풀나풀 춤이나 추고 있더니
오늘은 맘껏 짓밟아 주리라
푸시럭, 푸시럭 짓눌린 비명이
묵은 심술에 부채질한다
더 세게 꾹꾹 밟아본다
숨이 짓눌린 봄여름빛살, 더 어두워진다
가을겨울이 되어 기세등등한 등산화
구린내를 안고 밟히는 은행 이파리들
밟고 밟히는 사계절 순환의 고리에서
누가 승리자인가
시간의 수레바퀴 잘 돌리다보면
서로의 물때, 시절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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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 있어요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상이요
선물인 그
겨울깃털이 하얗게 나부끼며 내려올 때
단풍나무가 시간의 잔해 수북이 쌓을 때
이른 봄 매화 향 그림자에 밟히는
순간순간 숨죽인 휘파람을 분다
먼 바다에서 갓 돌아온 선율, 담 넘어
서로의 시린 몸 녹이기도 했으니
은밀한 색, 밝히려면
지엄한 닻줄 다 버려야 한다
찬란한 그늘이면서 고질병인
내 색의 골짜기에 숨겨둔 내연 남, 그가
미루나무 등걸에 슬쩍 발 걸치다가
달빛 옷 갈아입는 척하는 담쟁이
어둠으로 밀려나지 않으려 안간힘 쓰는
낮달의 밀실 번호를
달콤하면서 쓰리게 속삭여주길 기다린다
그 품안엔 늘 투창이 날을 벼리고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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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mem00002a3c000e.jpg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300pixel, 세로 200pixel
경화여고 학생들과 강의와 경주 선덕여왕 능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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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일째의 호작질
          ㅡ대구빙하기15 [정 숙]
폭우가 쏟아지는데
해가 떠오른다
빗줄기 사이로 비칠락 말락
가녀린 햇살 잡으려는
얼굴, 맑은 미소로 색칠한다 
물감이 번져내려 함부로 흐트러진
눈빛, 광기가
한지의 하늘 밝힌다
아크릴이 노란 색조를 아무리 짙게 칠해도
검으면서 하얗다
마스크가
여자 아나운서 입을 밀어내며
거칠게 숨을 뱉어내고 있다
소리의 불
"어떻게 하면 삶을 견딜 수 있죠?"
--성냥 6
 
"어떻게 하면 삶을 견딜 수 있죠?"
 
천재 첼리스트 뒤프레 쟈끌린느의 오열하는 한 마디 생의 정점을 눈앞에 두고 28세부터 다발성 척추경화증이 감히 목숨보다 더 사랑한다고 했던 첼로도 몸도 모든 것 서서히 포기하도록 해 마흔 둘에 일생을 마감해야만 하는 그녀 이 말 밖에 더 할 수 없던가
 
십여 년 고된 병상에서 가끔 자신이 연주한 음악 들으며
"들을 때마다 몸이 찢겨 나가는 기분이 들어요.…눈물 얼음 조각처럼"
돌아눕는 일도 눈물조차 흘릴 수 없던, 마음길인 전화 다이얼도 돌릴
힘 없어졌을 때 생매장 당하는 그 참담함, 활짝 피려다가 바람에 밟히고 찢겨버린 하얀 민들레 한 포기의 짧은 생 되새기며 오펜바흐 '자끌린느의 눈물에 젖는다
 
먼지 나는 길 가에 엉거주춤 서서 또는 지상과의 경계선 지워버리고 홀홀 날아다니며 삶을 견디는 길 밝히느라 세상 사람들 귀에 소리의 불붙이고 있는
 
찻잔에 든 해를 마시면서
-----아름다운 법문 9
 
남의 상처는
떫으면서도 왜 이리 향그러운지
 
그 여린 잎
여러 번 잘리고 열 받아 비벼지느라
곪은 상처를
한 잔의 그윽한 녹차 향으로 녹일 줄 안다는 것은
 
 
나정 밤바다가
거센 풍랑으로 어둠 휘저으면서
아침 해돋이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범어산 숲을 후려치는 겨울바람이
연둣빛 새봄을 입에 머금고 있다는
깨달음을 얻어서 인가
 
수련의 몸속에는
 
-거울 속 여자 10
해와 달의 초침 소리 숨어있다
그 리듬의 맥박 소리에 맞춰 꽃봉오리 지고
또 다시 맺힌다 긴 시간 새침 떨다가 어느 날
새벽부터 입을 열 몸단장해야한다
정오에는 선명하게 붉은 빛깔 드러내다가
하오엔 차츰 입술을 오므린다
재깍재깍 소리에 귀 기울인다
 
낮 동안 가둔 햇살과 바람 그리고 안개와
어둠을 섞어 제 생의 향기를 만들어 낸다
다시 새 아침이면 그 *향그럼 뿜어내도록
하늘과 땅의 맥박이 그 고운 입술을 재촉한다
한 일주일 동안 그 *향내 다 소진하고나면
자신의 흔적 다 지워버리고
 
제 뿌리에 걸린 인연의 끈 차마 잘라버리지 못 해
다시 해와 달의 숨소리에 맞춰
저만의 향을 만들어야하고
 
*향기의 여러 표현: 향그럼, 향내, 향
씨앗화엄
-유배시편 66
 
베란다 수챗구멍이
빨간 나팔꽃 한 송이 피웠다
인정사정없이 쓸며
내려가는 햇채물 감당하지 못하는
흙도 없는 그 구멍이
 
한 생명 뿌리 뻗도록
흘러내리는 모래알 조금씩 모아
다독이면서
 
 
-5시집 『유배시편』(시학,2011)
殉葬
 
 알 수 없었다. 그 이유를,
무덤은 막무가내 폭포의 말씀만 존재하는 곳
죽은 자가 더 힘쓰는 곳
그들의 숟가락이 되라고 강요한다
집은, 세상은 무덤이다
꽃상여 집이다
제 꽃밭 마음대로 못 가꾸는 곳
 
길은 무지막지라는 무기를 드는 길과
간절한 기도가 작은 깃으로 진화되는 길, 아니면
꿈 한 줄기와 무한대의 시간이 새카맣게 탄
어둠, 무균질의 순수가 포옥 삭아야만 하는 길!
아니면, 사월의 고로쇠나무처럼
지 살 찢어 물 다 빼버리는 길
 
눈 뜬다고 빛이 보이는 게 절대 아니다
 
 -아소 님아, 도람 드르샤 괴오쇼셔<鄭瓜亭>
 
-2시집 『위기의 꽃』(문학수첩,2002)
 
연꽃
-연蓮 1
 
 바람에 쉴 새 없이 몸 흔들리면서도
 
시린 발 견디며 진흙을 밟고 서서
 
곧 사라질
 
목숨,
 
이슬방울을
 
잠시라도 햇살에 한 번 더 빛나도록
 
손바닥에 소중히 떠받들고 있다
 
 -3시집 『불의 눈빛』(시학,2006)
 
절정
-거울 속 여자 8
  
청솔이
맨살을 드러내고 있는
비슬산 절벽에서
 
시린 가을 여편네 하나
근육질의 남정네 허리 꽉 끌어안고 있다
 
  제3시집 『불의 눈빛』(시학,2006)
 
 
 
 
8
 
 
자화상 소묘
 
여직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가
 
  씨앗들 여물기도 전 이 빠져 성글어지고 있는
  해바라기 저 여자
 
  눈 몇 번 깜빡이면 그만인 한 생, 쉴 새 없이 자라는 잡념의 뿌리 유리병 감옥에 가둔 채
 
  그런다고 누가 진주 목걸이를 걸어주는가
 
 
  -4시집 『바람다비祭』(시학,2009)
 
UFO를 타다
 
별천지 입구에서 서성이다가 그냥 빨려 들어간다
레이저 광선에 황태 코 꿰듯 엮어져 밀려들어가니
거긴 제 소리를 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인민 공화국, 별들의 고향
오른 손 들어!
왼 손 들어!
엉덩이 흔들어!
미친 듯 따라하지 않을 수 없는 광란의 공화국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 걸고 촛불시위를 했던 젊은이들
근육질의 터질듯 볼록한 그 연장에
미끈한 여성 누드 그 골짜기 늪에 복종하지 않으면
뇌 깊숙이 침투하는
저 광선 채찍에 맞아야 한다
부킹을 하고 그 다음 도킹도 할 수 있는
밤에만 활활 타올라
밤새도록 미쳐 불꽃놀이만 하도록 부추기는
괴비행물체 나이트
그 속 광란의 소리에 맥주에, 순간을 연출하는
레이저에 취해 온 전신이 녹아 흐물해져야
비로소 버림받을 수 있다
망년회는 묵은 한 해에서 버림받는 걸 축하하는 일
이천 구년도에서 풀려나야
새로운 해돋이 맞이할 수 있다
 
 
자화상
 
 
사느라 지칠 때면
죄 없는 바람을 향해 바람수제비나 떠 본다
날개 달린 듯 잘 튀어 오르지 않으면
돌멩이 얼굴 모양이나 탓하면서
 
 
속초항에 비 내린다
 
- 정 숙-
 
퍼붓다 못해 송곳날 내리꽂는다
쓰디 쓴 커피를 마신다
쉼 없이 흔들리는 저 파도에 떠밀리어
이제 막다른 골목까지 오고 만 것인데
젊은 시절엔 저 주름고랑을 잡는다고
하얀 포말에 잡히려고 까불까불
해종일 시간 가는 줄 몰랐었지
이젠 이 세상의 파도가 너무 무서워
먹구름이 자꾸 밀려와
양귀비 주홍빛 요염 흉내 내보아도
웃는지 우는지 아리송한 표정
겹겹이 쌓인 갈피 속 내 모습만 뒤적이는데
어느새 가슴 깊은 곳
파문이, 너울성 파도에 휩쓸린다
커피 잔에 설탕을 마구 쏟아 붓는다
 
 
 장미가시 [정 숙]
 
그녀에게 물었다
푸른 잎으로 숨길 수 있는
작고 날카로운 가시를 어떻게 만드느냐고
흑장미는 생긋 웃으며 하늘만 가리키고 있었다
같이 한참 바라보고 있으니
미소가, 눈물이 절로 나왔다
 
비바람에 자꾸 시달리다 보면
아무도 몰래 돋아나는 것을
거친 손길에 꽃가지 자꾸 꺾이다 보면
어느새 뾰족 돋아나는 것을
그래도 웃음 머금고 하늘 바라봐야하는 것을
 
그 가시가 오히려 나를 찌르면서
그윽하고도 깊은 나만의 향을 만들어낸다며
 
 
 
 
오월, 핏방울
-정 숙
 
범어산 가는 길목의 낮은 철책 담장
바람이 장미꽃 빨간 피를 빨아 마시는지
핏방울 뚝, 뚝, 흘리고 있다
 
가시들의 틈을 비집고 나온 찔레들이
한숨 내쉬다 하얗게 질린 낯빛으로
먼 산을 바라보고 있다

눈 밝고 귀 밝은 저 시인들 곁에서
눈만 말똥말똥, 제자리를 찾지 못하는
내 눈길이 애잔하게 젖는다
 
 
 
 
 
찔레
-정 숙
담장의 장미 가시 겨우 비집고나와 보니
핏빛은 핏빛끼리! 끼리끼리 !
 
장미들이 목 길게 빼고 구호를 외친다
손을 잡는다
해묵은 색깔론으로 바리게이트를 친다
색깔 지우고 서로 스미며 어우러진다
 
찔레는 상처로 오월 향기를 빚는다
향기는 향기끼리
 
 
첫사랑 [정 숙]
 
걸었다
말없이, 손도 잡지 않았다
오목천 물길 거슬러 까막새까지
탱자나무 울타리 과수원 지나면서
줄장미들이 호기심 눈빛 굴리고 있었다
무안해서 쓸데없는 말만 늘어놓았다
하늘이 푸르다며
새파란 탱자 열매가 작고 귀엽다며
냇물 건너기 전 그는
검고 빛나는 눈빛만 남긴 채 돌아가고
사랑방 마루 거울이 나를 비춰주었다
난 빨려 들어갔다
스무 살 내 볼에 활짝 피어난
분홍 장미 꽃송이들, 그 떨림의
정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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