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58    업데이트: 24-02-24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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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병동 보고서. 나잇값 좀 하세요! 시간이 숨긴 그림을 찾다. 출입금지
관리자 | 조회 71
 
 
 
암 병동 보고서
 
1.
 
이른 봄부터 시간을 펌프질하며 잠시도 눈 돌릴 여가 없이 살아왔는데
가을 갈맷빛 개나리 이파리들이 시어머니 오지랖에 소고기국 쏟은 며느리처럼 고개 숙이고 안절부절 이다.
 
부끄럽다고 꽁꽁 싸매어 온 유방에 칼질 후, 젊디젊은 의들이 빨강 파랑 그림을 그린다. 통닭 굽듯이 방사능으로 지지고 굽는다. 두어 시간 누워 맞은 항암 약은 적응하느라 구토를 일으키는데, 먹기는 먹어야 하고 허기 참느라 온 산을 헤매다가 겨우 복숭아 몇 개로 허기를 채우는 사람,
난 산이야
난 구름이야
자존심으로 밥 말아 먹을 수 없는 땅 끝 마을 사람들, 산에서 종일 돌탑이나 쌓는다
 
2.
 
툭, 툭, 떨어져 내리는 머리카락, 울음 죽이며 빡빡 밀어버려야 하는 파르란 입술, 온 전신이 수치스런 부분 완전 가릴 수 있는 모자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야 대낮하늘에 저 구름처럼 맘대로 그림을 그리고 뻔뻔을 떨 수 있지
 
핏줄은 자꾸 몸 안으로 숨으면서 무서워! 무서워, 주사바늘이 무서워! 간호사가 팔뚝 다리 다 찰싹 때려가며 찾아도 핏줄이 없어 겨우 발등에서 찾으면, 다른 환자까지 만세! 부르며 환호한다. 그래도 못 찾으면 목에 구멍을 뚫어 바늘을 꽂아야 한다.
 
긴 아픔 견디며 모자를 꼭꼭 눌러 쓰고 생의 패배자처럼 숨어 구름을 부러워하는 사람들, 쉼 없이 뒤따라오는 발자국 소리에 쫓기면서 밤낮 모자를 신처럼 모셔야한다. 모자가 바로 오얏이기 때문에

3.
처용아내와 역신은 그렇게 뜨거이 사랑하고 만나고 찬바람 따라 해어졌을 뿐

 
 
나잇값 좀 하세요!
 
부나비 한 마리 궁전 정원을 휘적이다가
흰 목련 이파리에 앉은
한 잎의 적막도 싫다 싫어
청매화 수줍은 미소도 청승맞다며
벚꽃 이파리들 떼깔깔 웃음에 끼려 들다가
그들의 가벼운 혓바닥에 몰매 맞아가며
봄날의 향에 끌려다닌다
바람이 비웃으면 슬쩍 옆구리 시리다며
사랑타령이나 하며
살구꽃 가지를 잡고 흔들어댄다
수양버들은 길게 늘어뜨린 팔로
결국 내 뺨을 후려치고 만다
나잇값 좀 하세요!
봄인데 우야란 말이고!
 
 
 
시간이 숨긴 그림을 찾다
 
 
해는 이천 십 팔년을 밀어내느라
쳇바퀴 급히 돌린다
숨 막히도록, 하도 새빠지게 돌리느라
그 발톱 보여주지 않는 것
인정사정없다
동지 팥죽 속 새알에게 씹는다
끝내 찰진 나이도 축 퍼져버린다
‘나이야 가라’ ‘내 나이가 어때서’
배부른 소리 그냥 다 짓밟고 간다
그래, 가라 가!
살구나무가 제 꽃잎 떨어뜨려야 열매가 눈 뜨고
단풍나무가 빨간 입술 지워야 봄이 오는 것
모든 사물이 시계를 보며 살아가기에
시간은 멈칫거릴 수 없는 것이다
그 대신 누구에게나 기회를 준다
수술환자들은 의사를 믿고
시간을 믿고 기다려야 한다
세월을 비웃고 헐뜯느라
시간의 뒷모습을 보지 못했으니!
침묵의 사랑, 어둠의 장막 걷어낼 수 있는
기회가 귓속말한다
그 선물 얻으려면
밤낮 불 켜고 시간을 잊는 길 찾아봐!
 
 
 
출입금지
 -가설무대3
 
계절바람이 책장을 너무 빨리 넘긴다
2막 극, 3막 극, 페이지 수가 다 다르지만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넉넉하게 마구 퍼주는 척하면서 
시간을 멍석 말듯이 마구 굴리는
넌, 누구니?
주어진 생의 무대를 맘껏 요리하도록
페이지 마다 제비꽃, 장미 잎 켜켜이 눌러
한판 굿거리장단 휩쓸게도 하지만
어떤 이는 볕이 들지 않는 그늘에서
꿈 한번 펼쳐보지 못하고 평생이란
삶의 무대에서 쫒기 듯 내려가야만 한다
범어산 산바람이 하마 노랗게 물든
미루나무 이파리 물고 내려오다가
싸늘한 체온만 남긴 채 휘리릭 가버린다
노을이 지는 산마루 그 사이를 뚫고
‘잠깐! 그 선을 넘지마라
너는  아니다, 오지마라’
굵직한 남진의 ‘출입금지’가 허세 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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