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화가 김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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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11    업데이트: 13-12-13 12:46

작가노트

2013-02-05 [문화산책] 조세희와 함께
아트코리아 | 조회 1,081

1978년 출판된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어린 시절 나에게 충격을 준 소설이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는 동안 조세희는 우연인지 필연인지 잊혀 가는 내 기억 속에서도 삶의 중간 중간 불쑥 튀어나오곤 했다.

이 책을 읽은 지 몇 년이 지난 후 우연히 서점에서 나는 ‘침묵의 뿌리’라는 흑백사진 산문집 한 권을 만났다. 사북의 풍경과 사람들을 주로 담은 그 책의 표지에는 이름 모를 사북의 소녀가 수수한 눈빛으로 무표정하게 얹혀 있었다.

조세희의 사진과 글이었다. 책 속의 사진들은 한없이 무거운 일상으로 뒤덮인 사북 탄광촌의 삶들을 있는 그대로 사실감 있게 그려내고 있었다. 그 책을 읽으니 왠지 모를 슬픔이 밀려왔다. 그 즈음 나는 인상적인 만화 한 권을 읽게 되었는데, 훗날 ‘악동이’라는 만화캐릭터로 유명한 이희재의 ‘억새’였다.

중학생이었던 나는 이 만화를 늦은 밤 내 방 구석에서 읽고 펑펑 울었다. 하루 노동시간이 18시간을 넘기는 여공의 야학 일기였다. 이 일기 속에는 노동과 사랑이야기, 그리고 쓰러져가는 청춘들의 삶이 그렇게 슬프게 각인되어 있었던 것이다. 만화가 이희재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읽은 즉시 이 만화를 그렸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어느 날 화가인 이영철 형과 소주잔을 기울이다가 늦은 새벽 나의 집으로 억지로 데려와 좁은 마룻바닥에서 이슬을 주고받으며 그에게 그림 한 점을 건넸다. 조세희의 침묵의 뿌리를 보고 그린 겨울의 사북 풍경에 도저히 필 것 같지 않은 원색의 새싹을 그려 넣은 작은 그림이었다.

그날 우리는 조세희를 추억하며 그렇게 밤을 보냈다. 훗날 더 좋은 형의 그림을 얻어 그날의 충동기부는 성공적이었지만, 그렇게 조세희는 내 삶에 담겨 있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한 예술가가, 또 한 예술작품이 이렇게 우리와 예기치 않게 평생을 함께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그것이 예술이고, 또 그 가치의 덕목이 아니겠는가 싶으면서도 이 이어짐이 우연만은 아닌 것 같아 그의 책을 손에 쥐고 있노라면 은근히 기분이 좋아진다.
김병호<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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