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28    업데이트: 23-02-16 09:38

언론, 평론

한국화 실험과 은현(隱現) : 방법에 스민 의경(意境)
관리자 | 조회 424
한국화 실험과 은현(隱現) :
방법에 스민 의경(意境)
 
1.
김봉천(1959~)은 27회의 개인전을 개최하고 30여년 화업을 이어온 한국화가이다. 그의 작업은 이미 여러 평론가들에 해석된 바 있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자신의 작풍(作風)은 대략 10년 주기로 변화해 왔다고 한다. <은-현(隱現>처럼 종이를 뜯어내는 작업 방식도 10년의 세월을 담고 있는 연작이다. 영남대학교에서 한국화를 전공한 김봉천은 특히 방법에 대한 실험을 통해 사의(思議)를 드러내는 작가라 할 수 있다. 한국화가나 동양화가는 모두 우리의 전통에 기반 한 작업을 하는 미술가이지만 정체성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 적합한 명칭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로 논란을 이어오고 있다. 또한 전통과 연결될 수밖에 없는 분야이므로 어떻게 현대의 흐름에 대응하는가, 시대정신을 어떻게 담아내는가의 문제 등 현대화(現代化)의 문제를 제기할 수밖에 없다. 해방이후 적절한 명칭에 대한 논의는 주요 명칭에 수렴되지 못한 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국화’ 명칭은 1982년 대한민국전람회에 ‘한국화부분’이 별도 분야로 구분되면서 공식화된 바 있다. 그러나 동양화라는 명칭이 여전히 혼재되어 사용되고 있는 가운데 오늘날은 ‘시각예술’이라는 보다 포괄적인 이름 안에서 이해되고 있다.
 
어째든 김봉천은 한국화 정체성에 대한 고민, 현대화에 대한 갈망 속에서 미술의 역사를 새롭게 개척해온 1세대 작가들의 직접적인 세례 속에 성장한 작가이다. 김봉천의 작업은 스승 세대로부터 더 나아가 그 극단까지 한국화의 현대화 과정을 밀어붙인 작업의 사례가 아닐까 한다. 황창배가 표현적인 방식으로 한국화의 현대화 길을 개척해갔다면 김봉천은 매우 메카닉한 방법을 고안함으로써 방법이 압도하는 반복의 체계를 통해 한국화의 현대화를 실험했다고 할 수 있다.
 
1970년대 동양화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과 실경이나 진경에 대한 가치의 재발견, 도시의 일상으로 소재를 확장해간 산수풍경, 묵(墨)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중에 우리 그림의 고유성과 현대성을 찾아 나선 수묵운동은 우리에게 전통의 현대화에 대한 치열한 고민의 궤적을 보여준다. 이와 관련된 몇 몇 사건들을 떠올릴만하다. 새로운 문화세력으로서 청년문화가 주도했던 1970년대는 미술전공자들 역시 전문가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한 때이다. 문제의 핵심은 현대성을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점인데 그 현대성이 얼마만큼 정통성이 있는가, 정통성은 얼마나 시대정신과 부합하는가 하는 현대성 문제이다.
 
이미 1960년대 묵림회를 통해 현대성에 대한 일단의 성과를 거둔 바 있으나, 1970년대는 양적, 질적으로 성장한 미술계의 성장과 함께 ‘한국화, 동양화’ 명칭논란이 더욱 뜨겁게 제기된 바 있다. 명칭과 정체성 그리고 현대화의 문제는 평론가 문명대가 서세옥 비평을 출판하였을 때, 다시 한 번 화단의 뜨거운 감자로 회자되어, 우리 그림의 정체성, 선진성, 현대성 등에 대한 담론이 형성된 바 있다. 이러한 갈등의 한 복판에서, 현송 정치환이 영남대에 재직함으로써 영남대 한국화과에서도 한국화의 현대화에 대한 일련의 실험이 이어지게 되고, 김봉천 역시 한국화의 현대화에 대한 실험에 주력하게 된 것이다. 그의 인물묘사에서 응물상형의 실력을 유감없이 보여주면서도 오채를 품고 있다는 먹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비구상의 작품을 창작하기도 하고(<파흔>), 지필묵의 용법을 완전히 벗어나는 지경으로 그 실험의 정도를 밀어붙이기도 한다(<정=동>, <은=현>). 이 중 <은-현>이야말로 여러 실험 중에 가장 획기적이자 극단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은-현> 연작은 지필묵의 용법을 완전히 벗어나 합지를 물들인 후 그 위에 드로잉을 베풀고 그 선을 따라 종이를 뜯어내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드로잉도 철저하게 컴퓨터로 제작한다. 컴퓨터 시연을 종이에 옮기고 선을 오려 뜯어내는 작업인데, 말로 하면 간단하지만 이루 말할 수 없이 섬세한 작업이면서 중노동이 아닐 수 없다.
 
합지를 물들이고 뜯어내는 작업은 종이를 제거하는 손끝을 따라 하나의 풍경이 떠오르게 하는 방식이다. 그 모습이 마치 대청의 발 너머로 보이는 달빛 풍경 같기도 하고, 물결에 일렁이는 풍경 같기도 한데, 최종에 설립되는 이미지는 지독한 노동의 결과로 드러나 깊은 사의(寫意)를 품고 있다. 사의성 짙은 풍경은 이런 측면에서 문인화를 현대적으로 계승한 것 같기도 하고, 현대적인 것 속에서 새롭게 문인화를 창조한 것 같기도 하다. 작품을 관람하는 관객은 현실에서 벗어나 정신의 풍경과 마주하는데 은은한 달빛, 한줄기 바람, 청명한 대숲 소리, 밤 호수의 적요가 열어주는 사의성 짙은 풍경이 아닐까 한다. 철저하게 만들어가는 노동의 끝에서 드러나는 정신의 풍경이 그간의 노역(勞役)을 모두 감추고 달빛 충만한 정신으로 되는 것이다.
 
김봉천의 메카닉한 일련의 제작 방법은 그 과정 전체에서 ‘은-현’이 변주된다. 작품제작과정 중에는 형상을 숨기고 있다가(은) 작품이 완성되면(현) 물질적인 기반을 숨긴다(은). 합지 속에 숨은 형상은 칼로 오려 뜯어내는 과정을 통해 드러나고(현), 형상이 드러난 이후에는 물질과 노동이 숨어버린다(은). ‘은과 현’의 반복되는 변증관계 속에 ‘사의성(寫意性)’ 깊은 조형공간의 형성으로 마무리되는 것이다. 방법이 전부인 것 같은데 바로 거기에 배어 고이는 사의, 반복되는 행위 속에 드러나는 여운은 문자향 서권기가 피어나는 현대의 방식이 아닐까 한다. 문자향 서권기를 담아낸 난죽(蘭竹)이 김봉천에 이르러 자르고 떼어내는 방법으로 전치되어 문자향은 노동하는 손끝에서 피어나고, ‘은-현’의 변증 관계 속에서 서권의 기가 묻어나는 것은 아닐까.
 
2
<정-동>이나 <은-현>을 보면 그냥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기분이다. 서양에 창문이 있었다면 우리는 발이 있다고 할까. 발이라는 소재 때문일까, 어째든 김봉천 작업에 등장하는 달, 대나무, 물, 그림자와 같은 형상들 하나하나가 동양의 서정이 가득하다. 붓을 사용한 것도 아니고 창이나 발이 함께한 것도 아닌데 작업은 동양화 같다. 오늘날 한국화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하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한국화 동양화는 혼재되어 사용되고 있는데, 회화라는 용어로 동서의 구분없이 통칭되기도 한다. 김봉천이 ‘은현’이나 ‘정동’의 모티프로 작업을 하게 된 계기도 다음 시에서 받은 감동이라고 한다. 이 한시에서 떠오르는 이미지와 뜻이 김봉천 작업의 원천인 듯하다.
뜰 앞에 달 떠있는데 소나무엔 그림자 없고,
난간밖엔 바람 없는데 대나무에서 소리가 들리네.
庭前有月松無影 / 欄外無風竹有聲
 
뜻과 이미지가 둘이 아닌, 이런 상상력의 경계는 분명 우리 전통의 고매하고도 지고한 가치가 아닐 수 없다. 운을 생각하면 음악과 문학과 그림이 적합하게 조율된 공간이기도 하고 이 사실만으로도 지극히 당대적이라 할 수 있다. 이를 다시 ‘거리의 용어’로 바꾸어 본다면 어떨지 이런 상상과 실험 속에 한국화는 한 발 더 시대의 한 복판으로 뛰어 드는 것이 아닐까 한다. 우리 미술의 현대화 과정을 돌아보면, 한국의 모더니즘은 결국 ‘한국화의 지평 안에서’, 치열하게 고민했던 ‘정체성과 현대성’의 궤적 안에서 발견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대학마다 한국화나 동양화의 이름이 없어지는 이 시점에 다시 한 번 메타적인 시각으로 성찰해볼 일이다.
 
이번 전시에 선 보이는 무채색의 ‘은현’ 연작은 크기로 보나 규모로 보나 작업에 대한 작가 본인의 철학을 분명하게 천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1970년대와 1980년대 한국화에 대한 현대화의 열망을 떠올려 보면 김봉천은, 깊고 넓은 먹의 표현성에 대한 수묵 실험과 지필묵 재료의 해방, 다양한 재료의 실험 그리고 이번 전시에서는 볼 수 없지만 채묵에 대한 현대적인 이해 등등 한국화의 현대화 전선을 오늘에까지 이어오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회화의 분류에 대해 새삼스레 덧붙일 말은 없지만 오늘날 학제의 근본적인 변화를 목도하며, 뜯어내기라는 지독한 반복의 방법적인 쇄신 속에서도 손끝을 타고 피어나는 문자향과 서권기에 대해 생각해본다.
 
남인숙(미학/미술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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