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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애국지사, 그들은 달랐다] “광복 위해 생명 희생…자자손손 / 매일신문 오피니언 2021.09.17
관리자 | 조회 184
◆김진만 아들·손자도 활동

전국 광역시에서는 서울 다음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도시가 대구였다. 이런 대구의 3대 독립운동가 집안으로는 긍석(肯石) 김진만(金鎭萬)을 꼽을 수 있다. 특히 이들 집안 3대 독립운동가 경우 김진만보다 아들 김영우(金永祐)와 손자 김일식(金一植)이 불과 30~40대에 삶을 마치고 말아 안타까움을 더해주고 있다.

김진만은 1915년 결성된 (대한)광복회원으로 대구부호 대상 군자금 마련을 위해 동생 김진우와 함께 나섰다. 김진만은 장인 서우순 집에서 소위 '대구권총사건' 또는 '애국단사건'으로 알려진 군자금 마련을 하려다 징역 10년, 동생 김진우는 징역 12년을 선고받아 대구감옥에 투옥됐다. 그런데 거사에 합류했던 김진만 처남이자 서우순 아들인 서상준(徐相俊)은 결국 자살로 삶을 마치는 비극이 빚어졌다. 독립운동과 아버지에 대한 도리(道理) 사이의 갈등이 원인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김진만의 아들인 김영우의 수형기록 속 얼굴사진]


[김영우 사망 『동아일보』 보도(1926.7.20.)]


김영우 사망 『동아일보』 보도(1926.7.20.)또 김진만의 4남 6녀의 둘째인 아들 김영우도 젊은 시절 약종상을 하면서 대구감옥의 아버지 형제를 지켜보며 독립운동에 합류했다. 그는 1920년 상해 임시정부를 위한 군자금 모금 활동을 벌였고 정오회, 대구노동공제회에 가입해 활동했다. 그러나 투옥 중에 얻은 병의 후유증으로 32세로 순국하자 대구에서는 처음 사회운동단체연합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독립운동가 김진만 선생]

독립운동가 김진만 선생김영우 장남인 김일식은 일찍부터 할아버지 김진만과 아버지 김영우의 투옥과 독립운동을 보며 자란 영향인지 1920~1930년대 대구 학생운동 핵심으로 떠올랐다. 그는 대구고등보통학교에 다니며 1927년 사회주의 사상의 비밀결사인 구화회(丘火會)에 참여했다. 1928년 에는 일본인 교사의 이순신 장군 폄하를 계기로 벌어진 동맹휴학에 참가해 퇴학됐다.

1930년대 대구 학생운동의 대표 인물로 알려진 그는 사회주의운동 세력이나 공산주의자 조직과 함께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다 1932년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아 할아버지 형제와 아버지가 갇힌 대구형무소(옛 대구감옥)에서 옥고를 치뤘다. 광복 이후 조선공산당 참여 활동 등이 있었으나 6·25전쟁 이후 행적은 지금까지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있으며 독립운동서훈도 아직 이뤄지지 않고 있다.

한편 경기도 용인 출신 3대 독립운동가 집안 사연도 있다. 의병장 출신 오인수(吳寅秀·미서훈)와 아들 오광선(吳光鮮·독립장), 오광선의 두 딸 오희영(吳熙英·애족장)과 오희옥(吳熙玉·애족장)이 주인공이다. 여기에 오광선 부인 정현숙(鄭賢淑·애족장)과 오희영 남편 신송식(申松植·독립장)도 서훈을 받아 3대 독립운동가 집안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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