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    업데이트: 18-05-11 10:21

Critics

미래를 통하는 문_윤진섭 (호남대교수, 미술평론가)
아트코리아 | 조회 274

미래를 통하는 문

윤진섭
호남대교수, 미술평론가



죽음을 현재화하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다. 가까운 사람이 죽었을때 고인이 남긴 유품을 통해 회고하는 방법, 또는 고인의 사진을 보며 과거의 추억을 회상하는 방법 등이다. 이처럼 죽음에 관한 상기의 체험은 경우에 다라 다르다. 여기서 '상기'란 곧 의식화를 의미한다. 나의 의식이 어떤 죽음을 현재의 상태로 불러내는 것을 뜻한다. 가령, 초혼(招魂)의 경우가그것이다.
 
혼령을 불러낸다고 하는것은 비록 그것이 나의 눈앞에 현전하지 않더라도 나의 의식상에 마치 현전하기라도 하는것 처럼 믿는것을 의미한다. 고인돌을 비롯하여 죽음과 관련된 많은 문화적 형식들은 곧 '죽음의 현재화'에 다름아니다.
 
권정호가 해골을 닥(楮)으로 캐스팅한 거대한 설치작품 <미래를 통하는 문>을 보면서 죽음을 상기한 것은 순전히그 형식이 갖고 있는 환기력 때문이다. 그러나 권정호의 해골은 어떤 구체적인 대상을 지칭하지 않는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는 역사보다 보편적'이라고 한 말의 진정한 의미, 즉 역사는 개별적인 사건을 다루지만 시는 보편성을 추구한다는 의미에 가깝다. 우리는 권정호의 작품에 등장하는 무려 2300개에 달하는 해골을 보면서 킬링필드나 아우슈비츠를 연상할수 있다. 그것이 역사라고 한다면 권정호의 작업이 가리키는 지점은 역사의 그러한 개별성과 구체성을 넘어서 있다. 이 지점은 그의 작품에서 매우 중요하다. 관객의 입장에서 볼 때 권정호의 작업이 환기시키는 개별적인 느낌은 관객에 따라 다 다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가까운 친구나 친지의 죽음을 떠 올릴 것이며, 어떤 사람은 한국동란중 겪었던 전우의 죽음을 연상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그런 개별적 감정과는 다르다. 즉 개별적인 죽음을 환기시킬 수는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그것을 초월한 죽음에 관한 보편적 감정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권정호의 작품은 그 크기나 높이, 즉 전체적인 규모가 숭고미와 비장미를 자아낸다. 숭고는 거대한 크기에서 나오고 비장은 작품의 내용에서 나온다. 권정호는 그런 느낌을 극대화하기 위해 닥을 이용하여 캐스팅하는 기법을 활용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해골의 어렴풋한 윤곽만을 드러내는 가운데 비교적 사실적인 기법으로 캐스팅했다는 점이다. 눈 과 코 입등은 실제에 근사한 느낌만 주고 세부적인 내용, 이를 테면 페인팅에 의한 세부묘사를 생략한것은 개별성을 드러내지 않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개별성보다는 보편성에의 접근을 통해 죽음의 본질을 더욱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마치 납골당에 안치된 것 처럼 일정한 크기의 투명 아크릴박스에 담긴 유사한 크기와 모양의 해골들은 일종의 '연출된 미장센'의 구조를 보여준다. 그것은 박제된 유품이면서 동시에 박물관속의 두개골, 즉 죽음의 냄새를 풍기는 해골을 통해 묵시적 분위기를 연출한다. 한쪽이 트인 'ㅁ'자 형태의 구조는 <미래를 통하는 문>을 암시한다. 군정호가 해골에 구체성과 사실성을 부여하지 않은 것은 그것들이 곧 구체성과 사실성을 벗어나 어떤 보편적 지점, 즉 죽음이 환기하는 정신적 초월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권정호가 닥의 천연색을그대로 살려 사용한 것은 죽음에 관한 이미지를 증폭시킨 요인이다. 마치 베로 지은 상복과도 같이 스산한 느낌을 자아내는 해골의이미지들은 구체적인 죽음에 대한 이미지를 소거한다.
 
권정호의 <미래를 통하는 문>은 기념비성(Monumentality)이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그것은 죽음이라고 하는 인간의 존재론적 조건에 대한 탁월한 유비(Analogy)이다. 아무도 회피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한 유비를 통해 죽음을 성찰할 수 잇는 기회를 부여하는 것, 그것이 야말로 예술작품이 지닌 특권이자 예술의 기능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권정호의 이번 변신은 그 크기와 무게에 걸맞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윤진섭
덧글 0 개
덧글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