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293    업데이트: 25-05-12 09:32

매일신문

[이인숙의 옛그림 예찬] <183>새로운 하루를 맞이하는 어부의 해맞이
아트코리아 | 조회 242
미술사 연구자


서세옥(1929-2020), '어부의 해맞이', 종이에 채색, 37.5×46.5㎝, 개인 소장


먼 산 위로 붉은 해가 구름과 함께 떠올랐고, 정수리가 붉은 단정학 한 마리가 뱃머리에 선 어부와 눈을 맞춘다. 흰 바지저고리 입은 더벅머리 어부는 낚싯대를 곧추 세운 채 한 손을 이마에 대 그늘을 만들며 해를 마주해 바라본다.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기에 어울리는 상서로운 그림이다.

조각배 위의 책 무더기는 이 어부가 은자(隱者)임을 알려준다. 청량한 먹선과 투명하고 담담하게 스민 발묵으로 형상을 적확하면서도 우아하게 드러냈다. '문향관장(聞香館長) 산정(山丁)'으로 서명했다. 인장은 세 개의 삼각형으로 산(山)을, 점으로 정(丁)을 나타낸 '산정'이다.

서세옥은 "향기를 듣는다"는 문향을 각별히 좋아해 당호를 문향관으로 썼다. 코로 맡지 않고 귀로 향기를 듣는다는 것은 감각기관을 초월하는 지각이다. 여기에서 그는 화가의 미학을 발견했다. 2016년 간행한 '산정어록'에 문향을 "저 절대의 소리를 귀로 듣지 않고 눈으로 듣는 것이 관음(觀音)이요, 저 절대적 향내를 코로 느끼지 않고 귀로 느껴야 하는 것이 문향(聞香)의 경지다. 이것이 화가가 알아야 할 초월의 미학이다"라고 설명했다.

서세옥의 당호는 도연명 '귀거래사'의 '무고송이반환(撫孤松而盤桓)'에서 나온 무송재, 문향관 외에도 많았다. "나는 일찍부터 나름대로 여러 가지 당호를 썼는데 스스로 부끄럽지만 여기에 내가 써 온 것들을 일부 기록하여 오늘의 서글픔의 달래어 본다"며 이렇게 나열했다.

송계산방(松桂山房), 죽포송무재(竹苞松茂齋), 청창초당(靑蒼草堂), 목석거(木石居), 석림원(石林園), 수죽원하관(脩竹圓荷館), 청련초당(靑蓮草堂), 욕일연재(浴日硯齋), 운금각(雲錦閣), 봉저루(鳳翥樓), 미소굴(微笑窟), 포룡당(抱龍堂), 성두각(星斗閣), 고쌍환실(古雙環室), 패엽재(貝葉齋), 등룡굴(騰龍窟), 학소정(鶴巢亭), 길금정석헌(吉金貞石軒), 죽수향초재(竹樹香草齋), 숭난실(崇蘭室), 앵전와취서(鶯囀蛙吹墅), 고송수죽한매완석거(高松瘦竹寒梅頑石居), 국수난방실(菊秀蘭芳室), 서씨영롱산관(徐氏玲瓏山館)

서세옥이 밝혀놓은 '일부'의 당호는 모두 26개다. 돌을 사랑한 애석가였고, 벼루와 금석고동 수집가였으며, 정원사를 두고 가꾸었던 소나무, 계수나무, 대나무, 매화, 난초, 국화, 연 등을 벗하며 살았음을 알려준다. 용을 잡고야 말겠다는 예술가의 포부도 당호에 담았다. 이름 짓기에는 "고의(古意)와 풍운(風韻)과 여향(餘香)이 넘쳐야한다"고 했다.

이런 이름의 작업실에서 창작한 서세옥의 작품은 대부분 공공기관으로 들어갔다. 대작들이 생전과 사후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되었고, 그의 고향 대구의 대구미술관에 90점 기증되었다. 3천점 이상의 작품, 수집품, 유품 등 그의 흔적 대부분은 서울 성북구립미술관에 기증되었다. 그는 성북동 언덕에서 60여년을 살았다.

미술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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