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238    업데이트: 24-03-26 13:33

매일신문

[이인숙의 옛그림 예찬] <180>조선의 소동파 완당선생 김정희의 해천일립상
아트코리아 | 조회 125
미술사 연구자


[허련(1809-1892), '완당선생 해천일립상(阮堂先生海天一笠像)', 종이에 담채, 51×24㎝,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소장]


소치 허련이 스승 김정희를 그린 '완당선생 해천일립상'이다. 얼굴은 초상화로 알 수 있는 김정희인데, 삿갓 쓰고 나막신 신은 이색적인 모습에 옷차림도 특이하다. 중국의 동파 소식을 기리는 '동파 입극상'(東坡笠屐像)을 얼굴만 김정희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한자문화권 지식인의 우상인 소식의 상상 인물화 중에서 입극상은 그가 유배객 신세로 고난을 겪을 때 모습이다. 소식은 60의 나이에 수도 개봉에서 멀고 먼 해남도로 유배됐고, 김정희는 55세 때 예산 고향집에서 한양으로 끌려가 서울에서 가장 먼 섬 제주도로 유배됐다.

유배지가 똑같이 절해고도라는 우연의 일치를 포함해 김정희를 조선의 소동파로 여긴 것이 당시 평판이었다. 김정희 작고 후 '철종실록'의 공식적 인물평인 '전 참판 김정희의 졸기'에 세상에서 소식에게 견주기도 했다고 기록됐다.

자신의 초상화에 쓴 '자제소조'(自題小照)에 '호위호(胡爲乎) 해천일립(海天一笠) 홀사(忽似) 원우죄인(元祐罪人)'이라고 한 것을 보면 김정희 스스로도 그런 생각을 했다. "어찌하여 바닷가의 삿갓 쓴 사람은 원우의 죄인과 흡사한가?"라고 한데서 김정희를 가리키는 이 초상화의 표제 '해천일립'이 나왔다. '원우죄인'이 곧 소식이다.

'완당선생 해천일립상'으로 표제를 쓰고 '허소치필'(許小痴筆), '소랑현실거'(小琅嬛室弆)로 낙관하고 '위창심정'(韋倉審定) 인장을 찍은 사람은 오세창이다. 오세창은 그림만 덜렁 남아 있던 이 작품을 소장했다. 그는 이 얼굴이 김정희이며 김정희 초상화를 그린 허련의 필치임을 알아보았다. 유배시절 김정희를 동파입극상에 빗대 그렸음을 간파했고, 김정희의 문집에서 적합한 문구를 찾아내 '완당선생 해천일립상'으로 표제를 지었다. 더욱이 아버지가 김정희의 제자였으므로 부친의 스승 초상화를 발굴해 모시는 감개가 무량했을 것이다. 1930년 무렵의 일이다.

이 작은 그림의 내력을 알아보았고, 걸 맞는 형식을 갖추어준 오세창의 안목이 있어서 '완당선생 해천일립상'은 김정희를 그의 인생사와 함께 인간적인 모습으로 이해하는 명화로 탄생했다. 왕실의 부마 집안에서 태어나 타고난 재능을 중국의 명사들에게 인정받으며 승승장구하던 김정희가 제주에 위리안치돼 갯바람 맞으며 낯선 풍토에서 시련을 겪는 모습을 떠올리게 해주는 그림이다.

세밀한 선으로 표현된 삿갓, 눈썹이나 수염과 달리 옷 주름은 마른 갈필의 먹 선에 강약을 실어 담백하게 표현했고 약간의 담채로 활기를 주었다. 김정희의 초상화 중 가장 젊은 얼굴인데 눈빛은 세상사를 초월한 듯하다. 김정희가 곧 조선의 소동파임을 한 눈에 알려준다.

미술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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