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242    업데이트: 24-04-23 14:09

매일신문

[이인숙의 옛그림 예찬] <184>중국 청동기 대신 우리나라 그릇을 그린 이도영의 기명절지화
아트코리아 | 조회 322
미술사 연구자



이도영(1884-1933), '옥당청품(玉堂淸品)', 1931년(48세), 비단에 채색, 104.5×43.4㎝,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소장

기명절지화는 서재를 상상의 배경으로 중국 고대 청동기와 도자기, 문방구와 청공품, 길상의 꽃과 과일 등을 그린다. 청공도(淸供圖), 세조도(歲朝圖) 등 비슷한 중국 그림을 참고해 19세기 말 오원 장승업이 창안했다. 장승업을 후원한 서울의 부유한 엘리트 중인층의 호사 취향과 오백년 문치국가 조선의 학문숭상 정서가 결합해 탄생한 장르다. 시서화를 즐기는 서재인의 고상한 지적 분위기와 물질적으로 여유로운 생활정서가 아울러 드러나는 그림이다.

기명절지는 장승업 이후 안중식과 조석진을 거쳐 그들의 제자 세대로 이어지며 20세기 초에 유행했다. 이도영이 특히 즐겨 그렸다. 이도영은 선배나 동료, 후배들과 달리 중국 기명(器皿)을 우리나라 그릇으로 바꿨고, 수입과일 바나나를 그리는 등 소재를 현재화했다. 소재 뿐 아니라 화법에 있어서도 서양의 미술이 한반도에 도착한 문명사적 전환의 시대흐름에 대응한 변화를 보여줬다.

'옥당청품'에는 가야 질그릇을 그렸다. 꽃가지가 꽂힌 꽃병은 어깨 부분에 사슴 두 마리가 장식되고 둥근 몸체에 구멍이 있는 '사슴 장식 구멍 단지'이고, 그 앞으로 '뿔잔 모양 도기'가 있다. 잘 알려진 명품이다.

배경은 전통적인 방식대로 여백이지만 윤곽선이 아니라 입체물로 대상을 파악해 모두 고유색으로 칠했고 서양화식으로 명암을 줬다. 배치에 있어서도 앞뒤좌우의 공간이 상정되고 있어 이전 기명절지화의 나열식 구도와 다르다. 두 무더기의 선장본 한적(韓籍)은 사이가 떠 있지만 평행투시도법을 적용했다. 이도영은 명암법과 원근법을 가져와 기명절지화를 서양미술의 정물화로 번안했다. 그러나 다각적인 시도에도 불구하고 이전의 틀을 유지하는 가운데 이루어진 개량과 절충의 범주였다.

이도영이 활동한 20세기 초는 우리나라 화가들이 서양화, 일본화의 충격을 눈앞의 실체로 맞닥뜨린 시기였다. 이도영은 기존의 것을 제치고 수입된 새로운 것, 힘센 것이 대세가 되어가던 전환기에 전통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며 주체적으로 대응하려 분투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1933년 50세의 나이로 타계해 자신의 세계를 다 완성하지 못했다. 이도영 뿐 아니라 많은 동양화가들에게 암중모색의 시기였다.

서명은 '관재 이도영 작'으로 했고 인장은 '이도영'과 '관재시서화인(貫齋詩書畵印)'이다. 서울의 연안이씨 양반가에서 태어나 한학교육을 받은 이도영이 시, 서예, 그림을 모두 자부하는 인장이다. 그가 48세 때인 1931년 작품임을 오른쪽 아래 모서리의 기년인(紀年印) '사십팔년 신미(四十八年辛未)'로 알 수 있다. 이도영은 전각을 비롯해 문화보국의 신념을 실천한 오세창의 가르침을 많이 받았다.

미술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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