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242    업데이트: 24-04-23 14:09

매일신문

[이인숙의 옛그림 예찬] <188> 매화를 아내로, 학을 자식으로 삼았다는 매처학자 임포를 그린 매화서옥도
아트코리아 | 조회 44
미술사 연구자



조희룡(1789-1866),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 종이에 담채, 106.1×45.1㎝,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조희룡은 19세기 화가이자 미술이론가, 문장가다. 산수, 괴석을 잘 그렸고 묵란, 묵죽 명작도 많이 남겼지만 그의 이름에서 가장 먼저 떠올리는 그림은 매화다. 묵매, 홍매, 홍백매, 전수식(全樹式) 홍백매, 매화서옥도 등으로 다양하게 매화를 그려 60여 점 이상이 전한다. 매화그림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조선시대 화가가 조희룡이다.

그중에서 '매화서옥도'는 매화에 얹혀진 군자의 고결함이라는 상징을 새롭게 확장한 명작이다. 매화는 한겨울의 매서운 추위를 무릅쓰고 꿋꿋하게 꽃을 피워 군자 중에서도 세상의 몰이해와 역경에 꺾이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가치를 지키는 한사(寒士)의 고절(苦節)로 의인화되며 지식인들의 정신적 의지처가 돼 문학으로 노래되고 그림으로 그려졌다.

매화서옥도는 설리개화(雪裏開花)의 매화를 찾아가는 탐매도(探梅圖) 또는 심매도(尋梅圖)라는 제목으로 그려졌던 매화 예찬의 전통을 계승하며 산수와 매화를 결합했다. 탐매도는 당나라 시인 맹호연이 엄동설한에 장안을 떠나 장하게 핀 매화를 찾아 산으로 향했다는 고사를 그린 그림이고, 매화서옥도는 매림(梅林)을 가꾸며 그 한가운데 집을 짓고 살았던 송나라 임포 이야기가 배경이다.

매화를 사랑한 임포는 항주 서호의 고산에서 시를 지으며, 매화나무를 가꾸었다. 그의 시 '산원소매(山園小梅)'의 "암향부동월황혼(暗香浮動月黃昏)", "은은한 향기 황혼의 달빛 속에 떠도네"라는 구절에서 달을 배경으로 어둠 속의 매향(梅香)을 그리는 월매도가 나왔다. 임포는 결혼하지 않고 홀로 살아 매화를 아내로, 학을 자식으로 삼았다는 매처학자(梅妻鶴子)라는 말이 생겼다.

'매화서옥도'는 산원(山園) 한가운데 조촐한 서옥(書屋)이 마치 임포의 집인 듯하다. 둥근 창 안으로 매화가지가 꽂힌 꽃병과 책, 문방구들이 벌여져 있는 책상을 마주한 한 인물이 있다. 매화로 둘러싸인 집에서 그는 온 감각으로 매화와 함께 한다. 조희룡은 이런 매화동산을 향설해(香雪海)라고 했다. 매화가 필 때 바람이 불면 꽃잎이 '향기 있는 눈'처럼 휘날려 온통 매화로 뒤덮이기 때문이다.

조희룡은 마치 붓으로 화폭을 공격하듯 '매화서옥도'를 그렸다. 농묵과 담묵의 점과 선이 상하종횡으로 솟구치고 부딪쳐 화폭은 소란스럽고 요란한 붓질의 전쟁터가 됐다. 산봉우리, 언덕, 나무 등 어떤 형태를 그린다는 묘사의 경계를 초월해 점과 획은 자족적인 선율과 리듬으로 분방하게 출렁인다. 필묵을 이렇게 다이내믹하게, 추상적으로 활용한 조선 화가는 조희룡이 유일할 것이다. 점점이 찍은 향설(香雪)의 흰 매화꽃이 오히려 차분하게 다가온다.

매화의 계절이다.

미술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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