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240    업데이트: 24-04-08 14:11

매일신문

[이인숙의 옛그림 예찬] <185> 물지게 지고 가는 겨울 농부 이상범의 설경
아트코리아 | 조회 51
미술사 연구자



이상범(1897-1972), 설경, 종이에 담채, 29×51㎝,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부채까지 함께 보존된 성선(成扇)인 이상범의 '설경'이다. 이상범은 계절감이 뚜렷한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의 산수를 다 잘 그렸고 겨울 특유의 경관인 설경도 즐겨 그렸다. 부채그림에 안성맞춤인 설경에는 야트막한 언덕을 물지게 지고 올라가는 등이 구부정한 농부가 나온다. 농한기인 겨울이라 지게를 지거나 소를 몰고 가는 대신 얼음을 깨고 길어 올린 물을 나른다. 그가 향하는 곳은 화면 중앙에 당당하게 자리 잡은 그의 보금자리인 눈 쌓인 초가집이다.

이상범의 산수화 속 인물은 농부다. 그의 농부는 강호에 배를 띄웠지만 물고기를 낚는 것이 아니라 한가함을 표상하는 어부, 오솔길을 걸으며 자연을 벗 삼는 지팡이 짚은 은자, 명승지를 탐승하는 유람객 등 자연을 관조나 관광의 대상으로 삼는 이전의 산수화 속 인물과 다르다.

농부는 자연과 밀착해 땅을 일구며 땅과 함께 살아가는 자연의 진정한 주인이다. 이상범의 농부는 그런 농부의 삶에 대한 화가의 경의가 드러나는 점경인물이다. 산수화의 천지자연을 우리나라 고유의 정서가 물씬한 야산으로 그렸고 농부의 삶의 터로 해석했다.

은회색 하늘 아래는 모두 눈에 덮인 산과 언덕이어서 사물은 윤곽선으로 드러난다. 옅은 먹색과 담황색 점들을 살며시 은근하게 깔아놓고 속도감 있는 카랑한 짙은 필선으로 언덕과 나무, 집과 사람을 흰 눈 위로 떠오르게 했다. 필촉의 상쾌한 운율이 마치 나부끼는 산들바람 같다.

이상범 탄생 백주년을 맞아 1997년 호암갤러리에서 '청전 이상범'전이 열리고 있을 때 아들인 한국화가 이건걸의 신문기고 글에 그가 목격한 어느 여름날 일화가 나온다. 아버지가 소쿠리 사라고 외치고 다니던 시골여인을 부르더니 화실로 데려가 그림을 보여주며 "이 그림이 아침이여, 저녁이여? 또 계절은 어느 때 같소?"라고 물어 답을 듣고는 소쿠리를 하나 사주었다는 이야기다. 의아해 하는 아들에게 "그림이 기운생동(氣韻生動)하여 남녀노소, 유무식, 동서양 따로 없이 공감을 하면 되는 것이야"라고 하셨다고 한다. 이런 생각의 소유자여서 농부를 산수화의 주인공으로 삼았다.

특별히 부채꼴에 맞추지 않은 구도와 서명과 낙관임에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이상범은 부채꼴에 무신경한 듯한 방식으로 부채그림을 잘 소화했다. '청전(靑田)'으로 호를 쓰고 '상범(象範)', '청전' 두 방을 찍었다. 청전은 '청년(靑年) 심전(心田)'의 뜻으로 스승 안중식이 자신의 호에서 한 글자를 주며 아끼는 마음을 담아 지어주었다. 스승의 기대대로 이상범은 위대한 화가가 되어 산촌의 소슬한 풍경과 그 속에서 묵묵히 살아가는 농부를 한국 산수화의 한 전형으로 완성했다.

미술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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