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240    업데이트: 24-04-08 14:11

매일신문

[이인숙의 옛그림 예찬] <186>물량 위주의 취향, 다다익선의 미학을 반영하는 백납도 병풍
아트코리아 | 조회 63
미술사 연구자


유숙(1827~1873), '백납도(百衲圖)'8폭 병풍 중 2폭, 비단에 담채, 각 그림 20×30㎝ 내외,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백납도 병풍은 각 폭을 여러 점의 작은 그림으로 꾸민다. 백납은 부분을 모아 온전한 하나를 만든다는 뜻이다. 자투리 천을 기워 만든 승려의 옷을 백납의, 납의라 하고 여러 판본의 잔결본을 모아 완성한 한 질의 책을 백납본으로 부른다.

병풍이 널리 사용되면서 한 틀의 병풍으로 수십 점의 작품을 소장하며 상시적으로 진열하고 장식할 수 있는 이색적인 백납병(百衲屛)이 출현했다. 병풍은 원래 바람을 막아주는 계절용 가구인 방한품이나 특정한 공간 또는 행사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의례품으로 활용되었다. 그러던 것이 점차 실내를 꾸미는 일상적 용도로 되면서 그것이 놓인 공간과 그 앞에 앉은 사람을 빛내 주는 위세품이 되었다.

백납병은 다양한 주제의 그림을 한꺼번에 감상할 수 있는 편리한 병풍이다. 처음에는 소장하던 낱장의 작은 그림이나 화첩 등의 옛 명화를 병풍으로 활용한데서 출발했다. 그러나 옛 그림 수십 점으로 꾸미는 것이 쉽지 않자 백납병으로 만들기 위한 작은 그림을 일부러 그려서 붙였다.

유숙의 '백납도' 8폭 병풍은 각 폭에 이 병풍을 제작하기 위해 그린 소품 5, 6점씩을 붙였다. 총 작품 수는 44점이다. 그 중 두 폭을 보면 원형, 직사각형, 부채꼴, 정사각형, 모서리를 궁글린 사각형 등 미니어처 같은 그림들이 세로로 긴 병풍 형태에 맞춰 붙여졌다. 작은 그림을 배치하면서 화폭의 다채로운 형태와 그림 내용의 안배는 물론 한 폭 중에서 그리고 병풍 전체를 펼쳤을 때의 정연한 배열에 각별히 유의하는 구성도 백납병의 특징이다. 이 부분은 화가와 병풍 제작에 관여한 기획자 또는 장인과의 협업이 중요했음을 알려준다.

오른쪽 폭의 제일 위 원형 그림은 주선(酒仙) 이태백을 그린 취태백도(醉太白圖)이고, 그 아래는 송나라 미점(米點)산수와 원나라 황한((荒寒)산수로 다른 화풍의 역사적인 고전산수를 나란히 배치했다. 부채꼴에는 꽃나무 가지에 새가 있는 화조를 그렸고, 제일 아래는 괴석과 난초를 그린 석란이다. 고사인물, 산수, 화조, 사군자를 한 폭에서 모두 볼 수 있다. 왼쪽 폭 역시 질서정연한 4단 구성으로 다양한 화폭을 조화롭게 배치하고 산수, 고사인물, 어해, 매화 등을 그렸다. 두 폭에 5가지 장르의 감상화 11점이 구성미 있게 나열되었다.

백납병은 짧은 기간 유행했고, 화가 입장에서는 40~50점의 소품을 각각 다른 그림으로 채울 수 있어야 하므로 여러 장르에 능통한 팔방미인이라야 가능했다. 전하는 작품이 많지 않아 총 30여 점이 알려졌고, 유숙을 비롯해 안건영, 양기훈, 채용신, 전승진, 허형, 변관식 등과 이름을 알 수 없는 19, 20세기 화가들이 그렸다.

백납병은 19세기에 나타났다. 미술 소비자의 물량 위주의 취향, 다다익선의 미학을 반영하는 병풍이다.

미술사 연구자
덧글 0 개
덧글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