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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문화

대구문화-대구의 근현대기 서화( 書畵) 와 문 ( 文) 의 문화 ❾ 근현대 대구 전통회화의 핵심, 묵죽화와 기명절지화 2014년 9월(346호)
아트코리아 | 조회 497

근현대 대구 전통회화의 핵심,

묵죽화와 기명절지화

 

 

글|이인숙 한국학 박사 , 대구대 강사

 

  한국미술사에 있어서 대구 근현대기 전통회화의 의의는 묵죽과 기명절지에 있다고 생각한다. ‘문인화’가 소식(蘇軾), 문동(文同) 등에 의해 나타나면서 문인들이 익숙한 필기구인 지필묵연으로 가장 먼저 그린 것이 대나무, 墨竹이다. 그들은 자신의 마음을 단순한 소재에 담으면서 깊은 의미를 부여하였다. 매난국죽, 소나무, 괴석, 연, 수선, 파초 등은 이를 사랑했던 역사적 인물들과 결합되고 시문과 서화로 기려져 쌍청(雙淸), 삼청(三淸), 사군자(四君子), 육군자(六君子) 등으로 성립하였다. 한학과 시서화의 전통교양을 향유한 한묵인이 많았던 근대기 대구에서 사군자화가 주류를 이루었던 것은 당연하였다. 더구나 석재 서병오는 상해화파의 거장 포화(蒲華)를 직접 배워와 화보류의 정형이 아닌 墨 맛과 정감이 뚝뚝 흐르는 기세 찬 묵죽화로 전국의 서화계를 압도하였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이후‘ 서화’는 수채화, 유화, 조소, 공예 등‘ 미술’에 자리를 내주었다. 전통회화는 동양화→한국화로 상대화 되었고 사군자화는 점점 위축되었다. 그런 가운데 상서와 길상의 뜻을 담아 大竹, 王竹으로 불리는 죽간(竹竿)이 큰 묵죽화가 나타났다. 묵죽은 죽간에 따라 대죽, 세죽으로, 계절과 기후환경에 따라 晴竹, 雪竹, 雨竹, 風竹, 煙竹, 露竹, 霜竹으로, 생장과 관련하여 新竹, 枯竹 등 그 역사만큼이나 이름이 많다. 중국 묵죽화에서 老竹, 老健으로 불리
는 대죽을 탄은 이정(1554~1626)도 그렸으나 근대기에 해강 김규진이 유행시켰고 죽농 서동균도 많이 그렸다 .
  긍농(肯農) 임기순(任機淳, 1912~1994)의 <대죽>은 노간(老竿)을 V자형으로 배치하고 사이에 신죽과 죽순을 함께 그려 왕성하게 생장하는 대나무처럼 자손이 번창하고 가문이 번성하기를 할아버지(老竹), 아버지(新竹), 손자(竹筍) 3대로서 은유하였다. 화제는 “百年老竿抱龍孫 壬戌之春 於萬二千峰山房 肯農作 鄭埰鎭 大邱直轄市長之囑 祝 金聖培 慶尙北道知事 就任一周年”이다. 1982년 봄 대구시장 정채진(1932~2008)씨가 경상북도지사 김성배(1927~2009)씨의 취임 1주년 축화(祝畵)로 작가에게 위촉한 그림이다. 높은 관직에 오른 고위공직자들의 인맥관리에 사과상자 아닌 묵죽화가 선물되었던 것이다.
  기명절지화는 구한말 오원 장승업에 의해 시작되어 서울에서 안중식, 조석진, 이도영 등 소수
의 작가들에 의해 1930년대까지 짧은 기간 유행한 그림이다. 그런데 대구에서는 191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지속적으로 전개되었을 뿐 아니라 서울화단의 채색공필화풍과 달리 사군자화가들에 의해 수묵사의화풍으로 그려졌다는 점에서 한국 근현대미술사에 큰 의의가 있다. 서병오는 기명절지화를 대구화단에 처음 소개하였고, 김진만은 이를 정착시켰으며, 서동균은 기명절지화를 현대적 감상물로 새롭게 부각시켰다.
  임기순의 <기명절지>(1989년)는 고동기(古銅器)와 사군자만을 기명과 절지로 구성한 개성적
인 화면을 보여준다. 문방구나 과일 등 다른 소재를 그리지 않았지만 바닥에 국화와 매화가지를 늘어놓아 기명절지화의 분방한 분위기를 살렸다. 화제는 남송의 시인 방악(方岳)의 <雪梅>로 매화가 피어도 눈이 내려야 금상첨화이고, 雪中梅가 있더라도 詩心이 없다면 속물이라고 했다. 蘭盆 옆에 <大道無門>, 화제가 시작되는 곳에 <三百六十日虛心却有淸>이 찍혀있다. 마음을 비우고 맑게 하기를 360일이라니 5일은 봐주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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