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1    업데이트: 19-12-12 16:38

대구문화

대구의 근현대기 서화(書畵)와 문(文)의 문화 ⑭ 2015년 2월(351호)
아트코리아 | 조회 598

아회(雅懷), 고상한 마음의 대장부

수봉(壽峯) 문영박(1880~1930)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남평문씨 본리 세거지는 이제 상당히 알려졌다. 와가(瓦家) 고택들로 이루어진 인흥마을의 트래디셔널+클래식 한 경관도 격조 높지만, 핵심은 인수문고이며 이를 조성하고 가꾸어 온 이 집안의 정신이다. 문씨 집안의 공용 도서인 인수문고의 중심은 1910년 경 수봉 문영박이 아버지 후은(後隱) 문봉성(1854∼1923)의 뜻을 받들어 광거당을 새로 짓고 여기에 만권당을 두어 수집한 1095종 6948책의 고서이다. 지난 백여 년 간 다녀간 많은 지식인, 학자들이 만권당 고서의 가치와 의의를 인정하였다.


  책을 수집해 문고를 만드는 일은 필요에 대한 인식이 있더라도 자본과 열정, 그 분야에 대한 지식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성공하기 어렵다. 건물을 짓고, 도서를 체계적으로 모을 수 있었던 것은 문봉성→문영박 부자의 의지와 지식, 경제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수문고가 중국과 한국의 경사자집 기본 도서를 충실히 갖춘 고전인문학 문고인 점은 민족의 역사와 전통을 유지하고 보존한다는 사명감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며, 역대 사서(史書)를 충실히 소장하고 있다는 특징은 국망의 난세를 당하여 투철한 역사의식이 요청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남평문씨 문중문고(門中文庫)로 자손들을 교육하기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책은 인식과 문화를 만들어 낸다. 책이 있는 곳에 독서인이 모이고 문화가 발생한다. 광거당은 문중 재실을 넘어 장서처인 도서관이자, 지식인을 대접한 레지던시이자, 아카데미인 문화공간이었다.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광거(廣居) 즉 세상의 가장 넓은 곳인 인(仁)에 거처하고자 했던 광거당 주인 수봉 문영박이다. 문영박과 연관되는 인물은 만구 이종기와 심재 조긍섭을 비롯하여 회봉 하겸진, 백괴 우하구, 낭산 이후, 기헌 조병선 등 영남 유림, 창강 김택영과 강화학파의 난곡 이건방, 위당 정인보 등 매우 많다. 유가지식인들은 문장가이며, 시인이자 서예가이다. 이들은 광거당에서 학문을 논하고 시문과 서화로 교유하였다. 이 곳에 수장되었던 많은 서화 작품들은 비록 유실되었지만 마을 곳곳에 현판과 주련은 남아있다.


  광거당에 걸려있는 <고산경행루(高山景行樓)>는 조긍섭이 명명한 누각 이름을 김택영의 중국 망명을 주선하였고 만권당의 중국판 도서 수집에 조력했던 청의 문인 장건(張謇, 1853~1926)이 쓴 것이다. 편액 첫머리에 세로로 ‘수봉선생’이라고 써넣어 쌍관하였다. 장건과 조긍섭을 비롯하여 추사 김정희, 위창 오세창, 석촌 윤용구, 우당 유창환, 청명 임창순, 효남 박병규, 여초 김응현 등의 현판과, 대구의 서예가 팔하 서석지, 회산 박기돈, 석산 김흡, 동애 소효영 등의 필적이 인흥마을에 있다.

  광거당 동쪽 마루에 외지게 걸려 있는 <아회(雅懷)>는 문영박의 글씨이다. 아회는 이백이 복사꽃과 오얏꽃 만발한 정원에서 봄밤에 형제들과 함께 시를 지을 때의 마음을 표현한 문구이다(<春夜宴桃李園序>). <아회>에는 ‘수봉(壽峯)’, ‘남평세가(南平世家)’, 그의 서재명이 ‘독서루’였음을 알려주는 ‘독서루장(讀書樓章)’ 낙관이 있을 뿐 문영박은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이름이, 만권당을 경영한 문영박의 공심(公心)과 그의 아회(雅懷)가 널리 알려져야 할 시점이다.


  비슬산 천수봉 아래 인흥마을 고건축의 고고(高古)한 정취, 인수문고 장서의 정신과 기개, 멋진 현판을 건 예술적 안목과 성심 등 이 곳의 여러 문화요소를 점정(點睛)하는 것은 수봉 문영박 선생이다. 한 장소와 한 시기는 그 역사성과 도덕성을 담지한 인물로서 각인된다. 문영박은 장서가에 그치지 않는다. 그의 학문과 문예, 명유(名儒)들과의 교유, 상해 임시정부 지원, 문인학자들에 대한 후원, 만권당의 출판과 문화 활동 등 다각적 연구가 필요한 시점이다. 수봉 문영박 선생은 남평문씨 문중의 인물에 그치지 않는다. 근대기 문화인물로서 현양되어야 한다.

 

“居天下之廣居 立天下之正位 行天下之大道 ‥‥ 此之謂大丈夫” 『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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