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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문화

대구의 근현대기 서화(書畵)와 문(文)의 문화 ⑲ - ‘교남 시서화 연구회’의 작가들_ 이인숙 2015년 7월(356호)
아트코리아 | 조회 559

‘교남 시서화 연구회’의 작가들
정용기, 서병주, 배효원

 

 

 글|이인숙 한국학 박사, 대구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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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1월 27일자 동아일보에 ‘서화 연구회 조직’이라는 기사가 대구발로 실렸다.

 

 

“대구유지제씨(大邱有志諸氏)는 현금문화발전상(現今文化發展上) 서화연구의 불가결(不可缺)을 각오(覺悟)하고 거십오일(去十五日) 동성정(東城町) 이영면제(李英勉第)에 수십인(數十人)이 회집(會集)하야 교남서화연구회(嶠南書畵硏究會)를 조직 하얏다는대 발기인씨명(發起人氏名)과 목적급역원(目的及役員)은 여좌(如左)하다하며”이어서 12명의 발기인 이름이 있다. 목적은 ‘강습소, 서화 전람회, 강연회, 도서관 설립 준비’의 4가지였다(여기서 도서관은 전시장이다). 회장은 서병오, 부회장은 박기돈, 강사는 정용기·서병주, 총무는 이영면·김재환, 이사는 김홍기, 회계는 서창규로 교남 시서화 연구회는 미술 활동을 위해 모인 대구 최초의 단체이다. 대구 서화계의 역량을 결집하여 시서화를 연구하였으며, 서예와 회화를 강습하였고, 대구에서 당시까지 유례가 없었던 공개 전람회를 열었다. 대중 계몽 연설회, 시국토론회가 유행하였던 1920년대의 시류를 타고 서화 예술의 가치와 필요성을 알리는 강연회를 개최하고, 최종적으로는 기금을 적립하여 항상 작품을 진열하고 감상할 수 있는 상설 갤러리를 설립하려 하였다.

 


  서예와 수묵화를 지키고 계승해야할 민족문화로 연구하고 발전시키며,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했던 교남 시서화 연구회는 당시 지식인들의 탈정치적, 타협적 민족주의 운동의 맥락을 공유한다. 식민 지배기에 일본을 통해 수입된 서구 미술은 작품 제작 목적, 작가 신분, 교육제도, 문자정책 등 서화를 지지했던 기존의 환경을 격변시켰다. 서구 기준의 미술로 재편되면서 서화용필동론(書畵用筆同論)의 이념은 무너지고 ‘서’와 ‘화’가 분리되던 시기에 문인 서화의 본 면목인 ‘시서화 연구’는 언감생심이었다. 시절이 그러하니 ‘교남 시서화 연구회’가 ‘교남 서화 연구회’로 잘못 타전되어 신문에 실리고 그렇게 받아들여졌던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한 오해였다.

  그러나 서병오와 대구 서화인들이 지향한 바는 동아시아 고전 예술론인 시정화의(詩情畵意), 시서화일률(詩書畵一律)의 높고 깊은 세계였다. 글씨를 쓰는 붓의 힘(필력)이 있어야 붓질이 화면에서 둥둥 뜨지 않고, 시심(詩心)이 있어야 예술의 본질에 대한 자각적 의식이 서와 화에 투영될 수 있다. 시를 이해하는 마음은 곧 예술가의 작가 정신이다. 근현대기를 거치며 대구의 서예와 전통회화가 서화 예술 궁극의 가치 중 하나인 필묵의 아름다움을 잘 발현해낼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교남 시서화 연구회는 서병오 개인에 의존했던 면이 컸고, 예술에 대한 사회적 기반과 일반의 인식이 미약했던 당시의 상황에서 비록 설립 목적을 다 완수하지 못했지만 대구 미술계의 시작이라는 의의는 크다.

 


  운재(芸齋) 정용기(鄭龍基, 1880~1936)와 태당(兌堂) 서병주(徐柄柱, 1884~1956)는 교남 시서화 연구회의 강사를 맡았던 작가였다. 정용기는 『운재시고(芸齋詩藁)』를 남긴 시인이자 서예가이다. 손자이자 영남대 의료원장을 지낸 의사 정원영(鄭元永, 1929~1990)은 할아버지의 스승 서병오의 작품집 『석재 시서화집』 간행에 큰 기여를 하였다. 서병주는 서와 화를 다 잘하였는데, 경재(敬齋) 서상하(1864~1949)의 아들로 집안이 대대로 부자(富者)였던 부자(父子) 서화가이다.

  운강(雲岡) 배효원(裵孝源, 1898〜1942)은 교남 시서화 연구회에서 배워 조선미술전람회 3회(1924)부터 9회(1930)까지 한 번도 빠짐없이 서부와 사군자부에 입상한 스타 작가였다. 1928년 조선미술전람회에 대구에서 사군자부 둘, 서양화부 셋이 대거 입선하였다. 동아일보는 ‘젊은 미술가 다섯 분’의 사진과 수상 소감을 ‘조선미전에 입선된 대구인사’라는 제목으로 실었다. 사진은 가
운데가 배효원, 시계방향으로 서동균, 박명조, 김용조, 서동진이며, 기사 내용에 “배효원 서동균 양군(兩君)은 모다 서석재 선생의제자”라고 하였다.


교남 시서화 연구회가 배출한 작가들 중 배효원은 근대기 대구 사군자화의 위상을 관전(官展)을 통해 전국적으로 떨쳤고, 김진만은 독립운동가 서화가로 명성이 높았으며, 서동균은 1970년대까지 활동하며 대구 서화계의 근대와 현대를 연결하였다. 정용기, 서병주 또한 근대기 대구 서화계의 든든한 작가이다. 교남 시서화 연구회는 대구 최초의 미술인 단체로서 대구 문인화의 거처이자 대구 미술계의 출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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