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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문화

대구의 근현대기 서화(書畵)와 문(文)의 문화 21 2015년 9월(358호)
아트코리아 | 조회 703

사업가, 정치가, 의사 서예가
김대식, 주병환, 이효상, 이원세, 신대식

 

 

 

 

글|이인숙 한국학 박사, 대구대 강사

 

 

"대구 사람들의 글씨는 우리 주위 곳곳에 있다. 우리가 관심 갖지 않으니 알아차리지 못할 뿐이다. 사랑은 관심을 갖는 것이며, 알려고 하는 것이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자신이 사는 지역에 대해서도 또한 그러하다."

 

 
 

 사업가, 정치가, 한의사, 양의사 등 전문적인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 열심히 붓글씨를 쓴 교양인 서예가가 대구에 많았다. 도쿄 법정대학에 유학하고 방직공장을 경영했던 소당(小堂) 김대식(金大植, 1896~?), 제4~5대 성주군 국회의원을 지내고 대구매일신문사 사장을 역임한 성암(星庵) 주병환(朱秉煥, 1904~1986), 5선 국회의원으로 6~7대 국회의장을 역임한 한솔(一松) 이효상(李孝祥, 1906~1989), 한의원을 운영하였고 그의 약방문과 의철학이 소문(素問)학회로 전수되고 있는 무위당(無爲堂) 이원세(李元世, 1904~2001), 경북대 의대를 나와 포항에서 제일소아과를 개원했던 우송(又松) 신대식(申大植, 1918~1985) 등이 그러한 분들이다. 어려서 서당식 한학교육을 받으면서 필기도구로 잡기 시작한 붓을 평생 놓지 않아 취미 이상의 경지를 이룬 것이다.

 

 김대식은 이미지성이 풍부하고 재미있는 자형의 다양한 고전(古篆)을 많이 썼는데 ‘만고청풍(萬古淸風)’은 효목동 금호강변에 자리한 통천사에 걸려 있는 편액이다. 옆에 아양루가 있고, 인근에 아양교와 아양기찻길이 있다. 안진경풍의 해서와 행서 위주였던 지역에서 김대식이 특이하게 전서를 즐겨 썼던 것은 일본 유학으로 인해 많은 문자 자료를 보고 연구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주병환은 종손서로서 서병오의 훈도를 많이 받았고, 『석재 시서화집』에 실린 서병오의 시가 정리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동성로 서병오의 자택을 이종면을 거쳐 소유하였고, 서병오 사후 첫 전시인 1973년 유묵전을 영남서화회장으로서 주도하였다. ‘이문회우 이우보인(以文會友 以友補仁)’은 문우관에 걸기 위해 1976년 설날 쓴 것이다. 『논어』에 등장하는 공자의 제자인 증자(曾子)의 말 “군자는 문(文)으로서 친구를 사귀고, 친구(友)와 더불어 인(仁)을 도모한다.”는 문우관의 이름이 나온 문장이다. 문우관은 일제의 공교육 실시로 이전까지의 학문 시스템이 파괴되자80여 명의 지역 유림이 돈을 내어 1918년 낙성한 강회소(講會所)로 지금도 향사와 강학이 이어지고 있는 백년학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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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상, ‘동봉’


 이효상은 ‘한솔’이라는 호로 잘 알려진 교육자, 정치인, 시인, 서예가이다. 아호는 한문으로 짓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시절에 한글 호를 사용하였고, 한글서예는 여자들만 하는 줄 알았던 때에 한글을 많이 썼다. 그의 선구적인 한글 사랑은 1950년대에 벨기에에 유학한 경험
으로 인해 한국의 것, 우리의 것에 대한 인식을 일찍이 가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1979년 쓴 팔공산 동봉의 표지석인 ‘동봉(東峯)’은 유연하면서도 격조 있는 간결한 자형의 글씨이다.

 

 이원세는 서병오의 문하에 있으면서 서병오가 존경했던 석곡(石谷) 이규준(李圭晙, 1855~1923)에게 한의학을 배웠다. 1956년부터 대봉동 거처에 무위당한 의원을 개업하여 심의(心醫)로 이름이 높았다. 1976년 한의원을 폐업하였고 1985년 부산의 아들집으로 내려간 후 불교에 더욱 심취하였다. 그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부산의 경희대 출신 젊은 한의사들을 가르친 것이 1990년 소문학회로 결성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www.somun.or.kr). 스승 이규준의 저서를 교감하였고, 그가 편찬한 『신방 신편(新方新編)』, 『의감중마 백병총괄 부 방약편(醫鑑重磨百病總括附方藥編)』은 한의고전명저(jisik.kiom.re.kr)에 들어있으며, 평소 지었던 시는 『무위당잡영초고(無爲堂雜詠草稿)』로 발간되었다. ‘제월광풍(霽月光風)’은 비갠 뒤의 맑은 달빛과 밝은 바람 같은 시원하고 깨끗한 인품을 가리키는 말로 북송의 황정견이 성리학자인 염계 주돈이를 평가한 말이다. 이원세는 시와 서예도 잘 한 유의(儒醫)였다.

 

 신대식은 집안의 인연으로 서병오의 집에 기숙하며 어려서 전통식 교육을 받았다. 서병오에 대한 기억이 점점 희미해져 가는 것을 안타까워한 주변 사람들의 권유로 60세 때인 1977년 『석재 서병오』를 편저하여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서병오의 행적을 기록하였다. ‘행서8폭병풍’은 유명 당시를 비롯한 4수의 시를 큼직큼직하고 활달하게 써내려간 1975년 작품이다.

 

 

 신대식, 이원세, 이효상, 주병환, 김대식... 이들의 글씨에 나타나는 침착한 깊은 먹색과 웅건한 필성(筆性)은 서병오의 커다란 그늘을 느끼게 하고, 이러한 교양인 서예가들의 존재는 ‘유림정신’이라할 대구 고유의 정서가 뿌리 깊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대구 사람들의 글씨는 우리 주위 곳곳에 있다. 우리가 관심 갖지 않으니 알아차리지 못할 뿐이다. 사랑은 관심을 갖는 것이며, 알려고 하는 것이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자신이 사는 지역에 대해서도 또한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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