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8    업데이트: 15-01-06 06:32

칼럼

로보캅의 발자국 소리
이구락 | 조회 851

 

 

로보캅의 발자국 소리

 

李九洛 <시인>

 

금년 여름 우연히 미국영화 「로보캅․Ⅱ」를 볼 기회가 있었다. 극장 앞에 성인이라고는 암표상뿐이더라는 표현대로, 일행 세 사람이 앉아있는 주위는 모두 청소년들이었다. 내 옆자리에는 중학생 같아 보이는 여학생들이 앉아 있었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점점 충격적인 장면이 자주 나타나고, 그럴 때마다 극장 안은 앳된 목소리의 괴성이 터져나왔다.

 

옆자리의 어린 여학생도 잔인한 장면을 보지 않으려고 자지러지는 소리를 내며 몸을 꼬고 손으로 눈을 가리면서도, 손가락 사이로 한 장면도 놓치지 않고 끝까지 열심히 보는 것 같았다. 천진하고 호기심이 많은 우리 아이들이 이렇게 손가락 사이로 엿보는 사이에 메커니즘의 우상에 세뇌당하고 있었다. 냉전체제에서 태어난 「록키」라는 미국의 우상이, 파나마침공에서 보여준 미국인의 「람보」식 우월의식으로 발전하더니, 이제는 「로보캅」이라는 영웅으로 나타나 우리 청소년들을 길들이고 있었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도 스토리 전개를 완전히 놓쳐 버렸다. 참으로 낭패한 기분으로 계속 찌푸리고 있었던 것 같다. 시종일관 낭자히 펼쳐지는 폭력과 폭언, 상습화된 마약, 그 중에서도 특히 두개골을 가르며 태연히 식사얘기를 하고, 떼어낸 척추를 재미있게 구경하는 장면 등은 정말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영화관을 나와 식당에 앉아서도, 술이 한 순배 돌 때까지 우리는 아무 말도 못했다. 기자인 ㅇ형은 초등학교에 다니는 자기 아들도 벌써 이 영화를 보았다고 했다. 그리고 무척 신나고 재미있는 영화라고 말하더라며 어이없어 했다.

 

하지만 문제는 영화 자체가 아니라, 이 영화가 「중학생 이상 입장가」라는 데 있다. 신문기사에 의하면, 도덕규범이 느슨한 미국에서조차 17살 이하는 보호자가 동반해야 볼 수 있는 성인영화 R등급(제한관람)으로 판정받았는데도, 한국공연윤리위원회(공륜)는 몇 장면 몇 분을 삭제했으므로 문제가 전혀 없다는 자세를 보였다고 했다.

 

공륜의 이 당당한 자세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짐작컨대, 영화를 창작예술로 대접할 줄 모르고 쉽게 가위질해 온 우리 문화의 수준 때문일 것 같고, 청소년 보호라는 교육적 기능보다 상업적 이해 편에 서있기 때문일 것 같다. 공륜 심의위원들이 손익계산에 재바르게 머리를 굴리는 동안에도 이 땅의 아이들은 로보캅의 당당한 발자국 소리에 매료되어, 자기도 모르게 점점 거칠어져 가고 있다.

 

 

- 매일신문/칼럼(매일춘추) ․ (1990.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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