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8    업데이트: 15-01-06 06:32

칼럼

섣달그믐에 띄우는 편지
이구락 | 조회 954

 

섣달그믐에 띄우는 편지

 

 

이구락 <시인>

 

 

시들 대로 시든 농촌이라며 도시 변두리를 기웃거리다, 그래도 농투성이는 흙을 파먹고 살아야 한다고 자네가 고향으로 내려간 지도 어느새 삼 년이 넘는구나. 농사꾼으로 자신감을 가지게 되면 편지를 띄우겠다던 자네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이렇게 먼저 편지를 띄우는 것을 용서해주게나. 이 성급함은 삼 년이 지나도 마음을 정리하지 못한 친구를 위로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고뇌 속에서나마 명절을 맞이하는 자네의 섬세한 마음을 가늠해 보며 내 향수를 다스려보기 위함이니 너그럽게 이해해 주게나.

 

오늘은 섣달 그믐날, 20여 호쯤 된다는 산골 마을에서 오늘 자네가 하는 일이 무엇일까? 석이 엄마가 세찬 만들기에 분주할 동안, 자네는 집 안팎 대청소를 했겠지. 묵은해의 잡귀와 액운을 모두 쓸어내고, 새해를 맞이하려는 마음의 준비도 했겠지. 그리고 오늘밤에는 `새잡이'를 할 테지. 그곳에는 아직도 초가가 남아있다고 했으니까, 섣달 그믐날 밤 새잡이가 쉽겠군. 그러나 지금은 또 빈집이 얼마나 늘어나 있을지? 새잡이를 끝내고 돌아와 꽁꽁 언 손을 쬐기 위해, 일 년 중 가장 아름답게 활활 타오르는 가마솥 아궁이의 장작불 앞에 앉아있을 자네 모습이 떠오르네. 등 뒤론 눈발이 희끗거리고, 방안에서는 어린 석이가 잠들지 않으려고 졸음을 참으며 엄마에게 옛이야기를 졸라대고 있겠지. 자네는 조용히 일어나 부엌과 변소 등 집안 구석구석에 불을 밝혀놓고, 방으로 들어가 잡아온 참새 안주로 술을 마시며 일 년을 되돌아보겠지. 석이의 맑은 눈망울 앞에서는 자네의 절망과 우수의 눈빛도 많이 가라앉았겠지. 석이 엄마의 거칠어진 손 지그시 한번 잡아주고, 석이의 뺨도 새삼 어루만져 주는 자네 모습 그려보네. 자네는 이 도시에서 과격한 노동운동을 하면서도 늘 다정다감한 로맨티시스트였으니까 말일세.

 

설날 새벽엔 `청참(聽讖)'을 해 보게. 무작정 들로 나가 처음 듣는 짐승 소리로 일 년의 운수를 점쳐본다는 것 말일세. 부디 까치소리를 듣게 되기를 빌겠네. 약속을 어기고 이렇게 불쑥 펜을 든 점 거듭 사과드리네. 이 편지는 `세함(歲啣)' 정도로 생각해 주게. 옛 기록에 「설날이면 주인은 모두 하례 하러 나가고 다만 백지로 만든 책과 붓, 벼루만 책상 위에 배치해두면 하례객이 와서 이름만 적을 뿐 환영, 환송하는 일은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변함없는 우정 함께 접어 보내네.

 

 

- 영남일보/칼럼(한소리)․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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