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    업데이트: 12-06-28 00:28

에세이

세 권의 시집, 그리고 서사시 한 편을 위하여
이구락 | 조회 942

/나의 시 이렇게 쓴다/    

 

세 권의 시집, 그리고 서사시 한 편을 위하여

 

 

이 구 락

(시인)

 

 

원고청탁을 받고 엉겹결에 승낙을 했지만, 막상 쓸려고 하니 새삼스레 계면쩍은 마음 감출 수 없다. 자칫 들뜨면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기 쉽고 혹은 너무 가라앉으면 스스로 비참해지기 쉬운, 참 껄끄러운 얘기이지 않은가. 등단 20여 년 동안 겨우 두 권의 시집을 낸, 지독한 게으름과 대책 없는 염결성에 주눅든 나의 시 쓰기는 왜 이렇게 난산일 수밖에 없는지, 거칠게나마 되짚어보다 보면, 주어진 주제도 함께 얽혀 드러날 것 같다.

     

 

            1

 

고등학교 때부터 시의 열병을 앓은 주위의 몇몇 시인들에 비하면, 나의 문학청년기나 시 쓰기는 너무 안이하고 평범하게 출발되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백일장 입상이나 교우지에 시와 수필을 발표한 적이 몇 번 있지만 문학가가 되고 싶은 마음은 일지 않았다. 그 후 대학에서 국문학을 공부하면서 처음으로 소설을 쓰고 싶은 욕망이 싹텄다. 산문은 우선 명쾌하고 구체적이어서 좋았고, 어떻게 쓰느냐보다 무엇을 쓰느냐는 문제라면 습작으로 이루어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대학 교지에 두 편의 단편소설과 대학신문에 수필 몇 편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당시 대구에는 소설가로 활동하는 사람은 없었고, 주위에 소설가 지망생도 없었다. 사방을 둘러봐도 온통 시를 쓰는 친구들만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당시 경북대에 김춘수, 계명대에 신동집이라는 중진시인이 계셨기 때문에, 그분들의 그늘이 컸다. 그러다 3학년이 되면서 처음으로 김춘수 시인의 ‘시론’ 강좌를 들으면서 『장자』를 읽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2학년 겨울방학 때부터 장자를 읽기 시작했으니까, 장자를 읽는 중에 조리 있고 밀도 높은 시론 강의를 들게 되었고, 서서히 시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원문을 대조해가며 두 번째로 정독하던 『장자』는, 그 풍부한 비유와 상징으로 ‘시란 산문이 끝나는데서 출발한다’는 명제를 나에게 심어주었다. 특히 『장자』의 ‘외편 천도편(天道篇)’의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를 매료시켰다.

 

세상 사람들이 귀하게 보는 것은 책이다. 그러나 정말로 존중되고 있는 것은 책 속의 말이다. 말도 그 자체가 어떻다는 것이 아니라 말속에 깃든 뜻이 중요하다. 그러나 뜻 또한 궁극의 것은 아니다. 뜻이 가리키는 사실이야말로 가장 귀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 사실은 말로써는 알릴 수 없는 성질이다. 말로써 알릴 수 있는 것은 사실의 이름과 소리에 지나지 않고,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사실의 모양과 빛깔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 ‘산문은 명쾌하고 구체적이어서 좋았고, 어떻게 쓰느냐보다 무엇을 쓰느냐’는 문제라고 막연히 느낀 내 생각에 돌팔매질을 한 것이 바로 장자의 이 글이다. 장자는 도의 본체는 말로서 표현할 길이 없다는 뜻으로 말했겠지만, ‘말로써 알릴 수 없는’ 것을 말로 드러내는 게 바로 시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갑자기 산문이 시시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시가 언어의 사원(言+寺)이라면, 작지만 튼튼하고 아름다운 사원 하나를 지어놓고 가는 것이 내게 주어진 삶의 의미라고 겁없이 믿어버렸다. 그래서 소설에 대한 철저한 절망 없이 시로 넘어왔고, 그 아쉬움은 지금까지도 마음 한 구석에 옹이 박혀 남게 되었다.

    

 

             2

 

나는, 시의 리듬은 미당 서정주에게서, 이미지는 대여 김춘수에게서 배웠다. 김춘수 시인은 대학의 은사이기 때문에, 나의 시정신과 문학관의 기본 골격은 알게 모르게 대여의 영향을 받았겠지만,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직접 지도를 받은 적은 없었다. 늘 제자들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어서 다가가기 어려웠고, 졸업 후 원고를 들고 선생님 댁을 몇 번 찾은 적은 있지만, 그때도 원고에 밑줄 한번 그으신 적이 없었다. 그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나 일반적인 문학 이야기만 나누었다.

그리고 문청시절 미당은 참 애증이 묘하게 엇갈렸다. 문학 강연을 들으러가서는 미당 순서가 되면 강연장 밖에 나와 일부러 듣지 않았는데, 지금 생각하면 참 유치한 치기였다. 그 당시 또래 문학청년들이 친일 시인이라 해서 나와 비슷한 짓거리를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집에 돌아와서는 밤늦도록 미당시를 읽으며 우리말의 유장한 가락과 감칠맛 넘치는 모국어의 황홀한 추임새를 익혔다. 미당의 시는 남도 가락 중에서도 서편제의 여성적인 여린 가락이 아니라 동편제 같은 능청스러운 남성적인 힘의 가락이었고, 특히 그의 전성기 때 산문은 그냥 옆사람에게 이야기하듯 주절주절 하염없이 이어지는 철저한 구어체였는데, 처음 접했을 때의 충격은 매우 컸다. 이렇게 써도 글이 되는구나 라는 놀라움으로 그의 질펀하고 능청스러운 남도 가락은 나의 훌륭한 스승이었다. 그러나 김춘수라는 세련되고 정교한 필터에 여과되면서 나의 가락은 모국어의 원형질로부터 차츰 떨어져 나와 도시적이고 지적인 모습을 띠게 되었다. 그 결과 나의 시는 전통적 서정에다 현대정신이 가미된 시풍으로 서서히 굳어져 갔다. 이 시기에 쓰여진 시 중에 아래 인용한 「낙강 풍경」은 미당, 「비를 소재로 한 四季의 습작」은 대여의 영향을 받은 작품이다.

 

저녁 연기 오르는 강마을의 하늘로 / 할머니가 들려준 / 떼지어 지나가는 전설이 보인다. / 천 년을 용트림한 이무기 / 벼랑 끝 龍沼에서 승천하던 그날 / 깨어진 산맥이 / 산신령의 수염으로 자라나고, / 九泉을 돌아오는 가야의 구름장이 / 깨어진 산맥 위로 오늘은 / 이무기의 입김 같은 저녁놀로 피고 / 할머니의 염주알이 / 이승의 하늘가에 흩어져 있다.

- 「낙강 풍경(洛江風景)」 전문

 

雪嶽山麓 간이역에 서면 / 단풍나무에 짧게 내리는 가을비, / 純銀의 비늘 날리며 / 비는 雪嶽의 알몸을 적신다. / 들끓는 안개 속을 빠져나와 / 오리나무로 옮겨 앉는 산새 깃에 / 빗살의 은빛 그림자 水墨으로 남고, / 하얗게 질린 가을비 속 / 비에 젖어 풀꽃처럼 휘날리며 / 雪嶽은 몰래 일어나 남으로 떠난다.

- 「비를 소재로 한 사계의 습작․3」 전문

 

그러나 등단하자마자 <형상>시동인 활동에 들어감으로써 미당과 대여의 그늘에서 오래 서성거릴 수 없었다. ‘언어의 본래성 회복’이라는 기치 아래 순수시를 지향하며 결성된 <형상>시동인 활동은 나름대로 사뭇 진지했다. 일상의 언어는 때묻기 쉽고 자칫 구호에 빠지기 쉬워, 그러한 언어를 닦아내어 언어 본래의 순수성을 되찾자는 우리들의 주장은 시대 상황과도 관련이 있었다. 우리가 동인 활동을 시작한 1980년대 초기는 순수와 참여가 지양되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고, 여러 면에서 문단의 지각 변동이 본격화한 시기였다. 문학사회학의 잣대로 모든 작품을 재단하려는 평론가의 전횡이 가관이었고, 참여시인들이 어느 날 갑자기 서정시집을 내거나 민중시인이 느닷없이 전원시를 발표하기도 했고, 노동자와 농민도 시집을 내어 주목받는 시기였다.

 

우리는 전후 독일의 <4․7그룹>이 전후 독일의 황폐화된 문학을 재건했듯이, 우리 시에 대한 반성과 집중적인 모색을 통해 시의 본질을 회복하고 언어의 본래성을 되찾자는 자세를 취했다. 그러므로 정기적으로 ‘전기의자’에 앉아 동인들(작품토론회)과 독자들(YMCA 또는 대학을 순례하며 가진 시낭송회 및 독자와의 대화)로부터 ‘고문’ 당하기를 자청했다. 이러한 혹독한 자기 점검에 모두들 진지하고 부지런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작품을 꼼꼼히 뜯어보는 버릇은 너무 소심한 시쓰기로 이어져, 지금 돌이켜보면 나에게는 득보다 실이 더 큰 것 같다. 동인 활동을 하면서 몸에 밴 습관들 중에는, 시의 한 문장은 길어도 3, 4행을 넘기지 않는 것과 웬만해서는 마침표를 찍지 않는 것 등이 있다. 대부분 2, 3행이라야 호흡이 가뿐하다. 4행이 넘으면 호흡이 답답하여 둘로 나누어야 안심이 된다.

 

첫 시집 『서쪽 마을의 불빛』은 등단 후 7년만에 나온 시집으로 습작기까지 포함한다면 대략 10년 동안의 결산이라고 볼 수 있다. 초기에는 사물의 의미를 추구하는 내면적이고 다소 지적인 경향을 보이다가 차츰 현대적 감각이 가미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다운 시를 위한 욕심이나 인생을 담으려는 과욕을 자제 또는 제거해 나가는 과정에서 기교적 수사에 경도되기도 한 시기였다. 관념을 배제하고 정갈한 감성만 남기는 데는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너무 조심스러움에 빠져 나약한 정서와 문제의식의 결여로, 답답한 답보상태에 빠져버렸다. 그 결과 첫시집 발간과 동시에 의도적인 절필 상태로 스스로를 몰아넣었다. 간혹 만나는 애정 어린 호평도 차갑게 외면하고, 다시 등단하는 기분으로 내 시의 진로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남의 시를 열심히 읽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게으름만 덕지덕지 쌓여갔다. 그 2년 가까운 절필에서 얻은 결론은 참담하게도 감각의 둔화와 이미 시는 나의 숙명이라는 자각뿐이었다. 절필 기간 내내 마음을 짓누르는 초조감은 일상에서조차 도무지 신나는 일이 없게 만들었다.

    

 

                3

 

첫 시집을 낸 이후 지난해 제2시집 『그 해 가을』을 출간했다. 무려 16년이 걸렸다. 그 과정을 돌이켜 보면, 절필 이후 나의 시 쓰기는 더욱 난산이었다. 시 한 편을 완성하는데 참으로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어떨 때는 1주일이면 되지만, 대부분 한 달 정도는 시간을 익혀야만 했다. 1년이 지나도 완성되지 않는 시편도 꽤 늘어났다. 늘 가지고 다니며 틈틈이 꺼내보거나, 심지어 등단 무렵에는 불끄고 잠자리에 들었다가도 처음 구입한 크로버 타자기를 어둠 속에서 한두 줄 두드려놓고 잠들 정도의 열기는 식어버린 지 오래다. 그리고 그렇게 쓰여진 작품이 반드시 좋은 작품이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고, 공들여 쓰는 작품 사이에 단숨에 즉흥적으로 쓰여진 작품이 더 이상 손댈 구석이 없는, 군더더기 없는 작품으로 태어나기도 하고, 그런 작품이 공들인 작품보다 더 호평을 받기도 하며, 시 쓰기의 버릇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팔공산 순환도로 아스팔트 위 / 눈길에 미끄러진 / 타이어에 깔려 죽은 고슴도치 / 미처 세워보지도 못한, 부드러운, 말라붙은 / 털 한 줌 / 짓밟힐수록 더욱 단단히 아스팔트에 / 껌자국처럼 붙어서 / 아직도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 눈 부릅뜨고 있다 / 팔공파크호텔 뒤 / 노송 아래 / 나쁜 짓 하다 들킨 어린애처럼 / 잔설이 낭패한 표정으로 / 숨어 엿보고 있다

- 「이월의 노래」 전문

 

이 작품은 팔공파크호텔에서 어느 세미나에 참석 중 지루한 시간을 이기기 위해 창 밖을 내다보다 즉흥적으로 쓴 시이다. 그리고 퇴고한 기억이 전혀 없다. 한때는 초고가 30행이 넘는 작품을 오랫동안 다듬다가 마지막에 5행만 달랑 남게 된 경우가 있을 정도로 한 작품에 매달려, 완성될 때까지 다른 글은 쓰지 못했다. 그러나 요즘은 초고를 거의 메모 수준으로 단숨에 쉽게 써서, 생 감을 소금물이 든 독에 담그듯이 차곡차곡 컴퓨터에 담아둔다. 그것을 주기적으로 열람해보고, 간혹 하나씩 빼내어 요리해 먹는다. 그만큼 쉽게 쓴다는 얘긴데, 체질상 맞지 않을 것 같아, 얼마나 오래 갈지는 의문이다.

나는 지금 우리 시와 시단에 못마땅한 점이 많다. 과장과 들뜬 열기, 시적이고자 하는 억지스런 포즈, 그리고 시대적 사고의 경직성, 천편일률적인 운동성, 비틀려 나타나는 실험성, 아마추어리즘의 팽배, 그러나 그 무엇보다 시인들이 시를 너무 쉽게 쓰는 경향이 늘어가는 게 가장 못마땅하다. 앞으로도 계속 못마땅하다며 혼자 투덜댈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첫 시집이 습작의 결실이었고, 제2시집이 강으로 떠나는 여정의 정서였다면, 마지막 제3시집은 여정의 끝에서 만나는 삶의 이치에 가 닿았으면 좋겠다.

 

이제 나는 내 시를 정리할 때라고 생각한다. 간혹 줄기차게 시집을 내는 경우를 보면 부러움보다는, 다음 세대가 그의 '시인론'을 쓸려면 자료 수집과 군더더기 걸러내기에 참 고생하겠구나, 라고 혼자 중얼거린다. 작년 대구시협상을 수상하고 난 뒤, 한 인터뷰에서 나는 앞으로 서정시집을 한 권만 더 낼 작정이라고 했다. 그리고 덧붙여 시집 한 권 분량의 서사시 한 편만 마지막으로 더 쓰고 싶다고도 했다.

 

자정이 넘으면 나의 더듬이는 / 숨죽인 먼지까지도 감지한다 / 먼 곳에서 잠든 그대 숨결도 수신한다 / 자정이 넘으면 나의 더듬이는 또 / 속으로만 중얼거리던 작은 노래 하나 내보낸다 / 자정이 넘으면 그러나 나의 더듬이는 / 빈틈없이 다가서는 어둠과 어둠 뒤에 멈칫 돌아눕는 / 비어서 쓸쓸한 마음 하나 / 낭패한 표정으로 끌어안는다 / 나의 더듬이 끝에서 비로소 불 밝히는, 그대 / 아, 비어서 빛나는 / 마음 하나

- 「빈 마음 하나」 전문

 

원고청탁을 받고 처음에는 시 한 편을 텍스트로 하여, 시의 발상에서부터 완성까지 그 과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볼까 하다가, 누구나 겪는 일에서 크게 벗어날 것 같지 않아 결국 이런 어정쩡한 얘기가 되어버렸다. 시가 삶에 선행한다면 얼마나 행복할까마는, 그건 천재시인이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나는 다만 앞으로 내 시가 부끄러움은 철저히 드러내고 그리움은 녹여 감추며, 말갛게 깨어있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詩하늘』 2003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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