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9    업데이트: 22-12-26 16:23

자유게시판

[이구락시인 정년퇴임 문집] 중에서 - 서지월
아트코리아 | 조회 2,342

[이구락시인 정년퇴임 문집]

길 위의 시간들-토현 이구락시인 문집」서지월-나하고는 불과분의 인간관계에 놓여있는 시인

나하고는 불과분의 인간관계에 놓여있는 시인

서 지 월

이구락선배는 나하고는 불과분의 인간관계에 놓여있는 시인이시다. 사람 중에는 그리고 시인 중에는 인간성이 참 좋다는 말을 듣는 사람 중의 한 시인이라 감히 말해 보는데 이구락선배가 바로 그러한 시인이요 선배이시다. 어떻게 보면 너무 조용해서 심심한 호수의 수면처럼 너무 갈앉은 성격 같아서 재미없는 건 아니고 좀 심심한 면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느 땐가부터 나는 내 나름대로 이구락선배에 대해서 이성수선생님과 비슷한 스타일을 느끼게 되었는데 역시 두 분이 키도 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매사 심사숙고 스타일이며 함부로 말을 내뱉지 않고 할 말만 하며 아예 남들에게 눈살 찌푸리는 말이나 행동은 선천적으로 하지 못하는, 그러면서 대륜고교 문예반 및 대륜문학회를 이끌어 오는데 맥을 같이 해 온 두 분이라 더욱 그렇게 느껴졌던 것이다. 일년에 한두 번씩 대륜문학회 백일장 행사의 일로 모교를 찾아가면 과거에는 이성수선생님께서 대륜출신 시인들을 반겨주셨는데 어느 땐가부터는 이구락선배께서 반겨주었다, 그만큼 시대의 변화도 읽을 수 있었다.

내가 8년이나 늦게 대학을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때 교생실습을 모교인 대륜학교에서 가졌다. 2주간인가 매일 모교로 출근하면서 이구락선배께서 국어과 교생 담임선생님을 맡았는데  영남대 여대생 등 서너 명이었던 같다. 그때 나는 인기를 독차지했던 것 같은데 내가 말하면 여대생교생들이 아주 좋아하고 재밌었는데 지금은 구체적인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이런 인연도 남다른 인연이었던 것이다.

그때만 해도 나는 개인적으로 이구락선배가 아주 부러웠다. 가장 가까이 있는 등단한 시인이었으니까 말이다. 나는 시인이 빨리 되고 싶어도 시인이 되어있지 않으니 창피하기도 했다. 그후 나는 30세의 나이에 늦깎기로 등단을 하게 되었는데 내 제자 중에 정이랑시인이 있었다. 어느 지면에 이구락선배의 시 <개망초꽃>인가를 소개했더니만  그 시를 읽고는 이구락선배의 팬이 되었던 것 같다. 등단하지 않은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문학소녀로 시인과 편지를 교환한다는게 그녀 역시 영광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후 그녀도 내가 지어준 필명 정이랑으로 문단에 시인으로 등단하게 되었는데 등단하지마자 화려하게 작품 활동을 했는가 하면 신문마다 지면을 매우며 신인으로서는 아마 대한민국에서 가장 화려한 활동을 전개한 것으로 안다. 그래서 대구시인학교 명성도 높아졌는게 사실이다.

이때 이구락선배가 한 말이 생생하게 기억나는데 "나하고 뒤바꿨네" 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이구락선배가 그런 말을 할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이구락선배의 경우, 사람이 너무 잔잔해 그냥 시인이 되어있는 경우이며 정이랑시인의 경우 스승인 내 말만 듣고 열심히 따르며 광개토정신으로 만주땅까지 활동을 눈부시게 하니 그만큼 시인으로서의 입지도 서는 경우라 할까.

이구락선배는 시집도 다른 동료시인들처럼 문학상을 노려 자주 내는 시인이 전혀 아닌데, 아마 첫 시집 『 서쪽하늘의 불빛』을 출간하고 난 후의 일인 것 같다. 이구락선배의 시집 『 서쪽하늘의 불빛』해설을 보니 경희대 김재홍교수가 썼는데 마침 김재홍교수가 나하고 이런저런 연유로 대구에 오게 되어서 나는 선배를 챙긴다고 (사실은 선배가 후배를 챙겨야 하는데 이것도 뒤바뀐 셈이다) 김재홍교수와 저녁에 만촌동 어느 식당에서 모임이 있으니 꼭 나오시라 했던 것이다. 이때 이구락선배는 내가 한 말이 좀 띵하게 느껴졌는지 "시집 해설을 써주었다 해서 꼭 나가야 되나?" 하고 어안이벙벙한 심사였던 것 같다. 이런 경우 어떻게 설명을 해야 옳을지. 어쨌던 이처럼 이구락선배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바깥 날씨에는 초연한 시인이었다.

이구락선배가 한번은 서종택선배를 두고 서종택같은 시인이 시를 써야 하는데 시 이외의 업에는 철저하고 확실하니 안타깝다는 말을 했다. 나는 또 깜짝 놀랐던 것이다. 겉으론 무난하며 무관하게 보이는 것 같아도 예리한 면이 있다는게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인은 실천적이지 못하는 것 같아 내가 이구락선배에 대해서 안타까워해 왔던 것도 사실이다.

이구락선배가 대구시인협회 회장 시절, 지금도 생각하면 별 도움이 못 되어서 송구한 마음인데 그때 서너 편의 글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고 써주었는데 원고료를 주지 않아 원고료를 달라고 한 적 이 있다. 물론 대구시협에서 나오는 그 책은 원고료를 주고 수록하는 성격은 아니나 주문원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전업시인으로 살아가는데 너무 어려워 담배도 사 피워야 하고 휴대폰값도 내어야 하고 전기료도 내어야 하고 애 둘이 중학교 고등학교 다니는데 아침마다 돈 달라는데 교통비도 주어아 하는 아주 난감한 때였기로 다른 방법이 없었던 것이며, 또한 같은 시인들이라 하지만 모양을 내어주는 시집 해설이나 강연 또는 사적인 그런 글은 글은 공짜로 써 줄 수 있는 성격이 아닌 먹고 사는 전업시인으로서는 원고료를 받아야 하는 것으로 생각해 말했던 것이다. 이걸 기억하고 있었던지 이구락선배는 달성공원 상화시비 앞 대륜백일장을 마치고 나와서 달성공원 정문 밖 수퍼로 나를 끌고 가더니 담배를 있는 대로 긁어모아 사 주시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이구락선배는 대구땅에서 나서거나 구속되거나 돈 드는 것이나 앞지르는 걸 싫어하고 조용히 시를 쓰는 걸 원하는 스타일이랄까. 그리고 후베들이 버릇없이 굴어도 별 나무람 없이 좋은 게 좋다는 식의 천성의 착한 시인으로 살아온 것으로 보인다. 아직도 이구락선배가 정년퇴임이라니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때 그 모습 그대로인 이구락선배! 안타까운 것은 지금이라도 많이 늦었지만 좀 진취적이시길 바라는 마음이다. (2013년 7월 27일)

덧글 0 개
덧글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