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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시인동네 시인선 190, 이구락 시집, 『이구락의 오행시편』 / 2022. 11. 23
아트코리아 | 조회 410

이구락 시집 | 이구락의 오행시편 | 문학(시) | 변형국판 | 120쪽 | 2022년 11월 24일 출간

값 10,000원 | ISBN 979_11_5896_570_9 03810 | 바코드 9791158965709

오행시편에 담긴 역동성과 우주적 비의



1979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이구락 시인의 네 번째 시집 『이구락의 오행시편』이 시인동네 시인선 190으로 출간되었다. 『이구락의 오행시편』은 그동안 한국 시사에서 볼 수 없었던 ‘오행시’라는 새로운 장르의 출현을 알리는 서막이라 할 수 있다. 이구락 시인의 지난 20여 년의 노력과 산고의 고통이 낳은 결실이라 할 수 있는 이 시집은, 끝없이 난해해져만 가는 현대 시에 경종을 울림과 동시에 시 창작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이다

시인의 말

나의 오행시는 오랫동안 서랍 속에 쌓여 홀로 낡아가고 있었다.
이제는 세상으로 흘려보내 자유롭게 떠돌게 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떠돌다 어느 언덕 가시덤불에 걸려 다시 일어나지 못하더라도,
홀로 반짝이다 해가 뜨면 사라지는 이슬처럼 별처럼
그곳에 잠들어 좋은 거름이라도 되었으면 좋겠다.

2022년 11월
이구락


해설 엿보기

이구락 시인이 이번 시집을 내면서 ‘오행시편’이라는 명칭을 들고 나왔다. 그것은 시인이 5행시라는 장르에 도전하여 성취를 이뤄냈다는 의미이다. 첫 시도부터 자그마치 20년의 결실이고 보면 그의 5행시에의 고투가 얼마나 치열하고 내공은 또 얼마나 탄탄한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우리의 정형시는 일찍이 신라의 향가에서부터 발원했다. 일반적으로는 4구체와 8구체, 10구체로 나누지만 향가는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우리말을 차용한 향찰 표기로 인하여 언어가 주술성과 신비감, 깊은 서정의 여백을 거느리고 있다. 독자들의 개입 여지가 무궁무진한 장르라는 특징을 거느린다. 시조의 경우는 단수는 초, 중, 종장 3구체이므로 결국 3행시라 할 수 있다. 다만 더 깊은 세계를 펼치기 위해서는 여러 수로 나누어 전개하는 등 확장의 여지가 충분하다. 현대시로 넘어오면 김영랑과 강우식, 박희진 등에 의해 ‘4행시’의 장르화가 시도되었고, 특히 김영랑의 시에서는 의도적인 호음조(好音調)·음성상징(音聲象徵)·압운법(押韻法)을 사용하여 음성 구조와 의미 구조 사이의 조화와 긴장을 통한 창조적 리듬을 달성하기도 했다.

두물머리 내려다보며 듣는
수종사 범종 소리는
무료 찻집 삼정헌에 앉아 들어야 제맛이다
종소리가 수평으로 날아가다 강물 위에 내려앉는 모습은
눈감고 보아야 제대로 보인다

― 「수종사」 전문

현대시에서 아직 의도적인 ‘5행시’를 주장한 경우는 없다. 5행시라는 개념을 의식하지 않고, 쓰다 보니 결과적으로 5행시가 된 작품들이다. 서정주의 「동천」, 정호승의 「하늘의 그물」 등 시상을 압축하고 리듬을 살리는 과정에서 뛰어난 5행시가 나오기도 했다.

한시의 5언 또는 7언의 절구나, 3행 17음절(각 행 5, 7, 5)로 구성된 엄격한 정형시인 일본의 하이쿠도 정형시의 장르화를 이룬 좋은 예다. 기승전결이나 두함경미는 한시의 엄격한 형식미로 발전해왔고, 하이쿠는 4계절 중 어느 한 계절을 암시하는 객관적 묘사에 국한되었다가 가능한 한 가장 적은 단어 수로 더 많은 것을 표현하고 암시하는 예술로 남게 되었다. 서양의 경우 12행의 소네트가 대표적인 정형시다. 또한 ‘세비야나(sevillana)’는 스페인 세비야에 전승되어 온 4분의 3박자의 민요 또는 무용으로, 가사는 보통 5행시로 되어 있기도 하다.

이런 와중에 이구락이 오행시편을 들고 나왔다. 수록시만 80편, 적은 숫자가 아니다. 이구락의 5행시는 기존의 정형시와 구별되는 점이 있다. 가장 뚜렷하게 보이는 점은 한 행의 길이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시상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밀고 당길 수 있게 함으로써 독자적인 개성과 호흡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이 긴장감과 여운을 주어 시의 역동성도 살린다. 이외에도 그의 5행시는 복잡하지 않은 구조, 자기 호흡을 실은 개성적인 문체, 흔들리지 않는 정연한 초점을 그 특징으로 거느리고 있다. 그러면서도 가끔은 시적 여백이 몇 가지 해석의 여지를 열어놓고 있다. 이는 애매성과는 일정한 차별성을 가지는 것으로 미지의 영역을 거느리는 향가의 미학을 닮았다. 또 시의 전개상으로는 기승전결의 원리를 원용한다는 점에서 한시와 맥이 닿아 있다. 다만 5행이라서 언어의 운신이 더 자유롭고 주제성을 강화하기도 더 편하다는 이점이 있다. 시인은 주로 다섯째 행만 고정시켜 놓고, 나머지는 자유롭게 풀어놓아 ‘승’이나 ‘전’을 2행으로 하거나, 드물게는 ‘기’를 2행으로 늘여놓고 전개하는 시도를 한다.

― 손진은(시인)

책속에서

겨울 산이 울면 눈이 내린다
겨울 산에 눈 내리면 밤이 길다
긴 겨울밤 눈에 갇혀 산사(山寺)는 열반에 들고
풍경 홀로 얼지 않고 밤새도록 염불 왼다
달빛이 눈 위에다 그걸 받아쓰고 있다

― 「달빛 경전」 전문

물오른 버들가지에 송알송알 맺혀 있던 샛노란 꾀꼬리
소리, 물 위에 동동 떠 있는 개구리 소리 위에 사뿐 내려앉는다
먼 산 뻐꾸기 소리도 배경처럼 안개오줌 속에 스며든다
연못에 시나브로 내려앉는 송홧가루 위로
봄의 화음이 풀잎을 환하게 흔드는 봄날이었다

― 「봄의 화음」 전문

댓잎 오래도록 서쪽 하늘 쓸어놓으니
그 자리 별 하나 톡, 돋았다
박새 한 마리 갓 돋아난 별 쪼아 물고
대숲 둥지로 빗금 그으며 사라지자
새 새끼 이른 잠투정 소리 먼 우주로 번져나간다

― 「노천탕에서」 전문

돌담에 기댄 노구 일으켜 세우며
늙은 매화가 내보인 빛깔이다
선홍의 저 화엄 세계는 어디서 왔는가
혼자 졸던 동백이 구경삼아 내다보는, 화엄사 흑매
봄날 노고단 아래서 벌어지는 한때의 야단법석

― 「야단법석」 전문

밤이 되자 약속처럼 사랑산 위로 보름달 떴다
화양구곡 야영장 텐트 속에서 여자 하나 몰래 나와 
달보다 더 흰 엉덩이 드러내고 뒷물한다
긴 화양동 굽은 물길 부르르 몸 떨며 무너져 내린다
바위에 부딪힌 물 낙영산 밤하늘로 별 튕겨 올린다

― 「여름 화양동」 전문

개심사 돌계단 옆 능수벚나무
초파일 기다려 꽃 피우려다
요실금처럼 아랫도리에 찔끔 흘려버린, 연둣빛 첫 청벚꽃 몇 점
어쩔거나,
이 봄날 숨 막히는, 저 아찔한 화두!

― 「개심사 청벚꽃」 전문

오랑캐꽃 톡! 불거져 나온 봄날 아침
산책길 쪼그려 앉아 가만히 들여다본다
오래 잊고 있었지만 지워지진 않았던,
한 점 흰 그늘로 남아 있는, 낡은 그리움 하나
아, 참 잘도 보인다

― 「봄날의 아다지오」 전문


시인의 산문

시냇가의 돌멩이를 쓰다듬는 물처럼, 무심히 떠돌다 문득문득 멈춰 서서 오래 생각에 잠기는 바람처럼, 어쩌다가 여기까지 와 닿은 나의 노래여. 이제 가을 추수처럼 한 권의 시집으로 묶이면서, 비로소 장르 개념에 도전하려는 첫 시도의 무모함이여. 그저 땀 흘리는 이웃에게 슬그머니 다가가, 짐짓 먼 데 바라보며 슬쩍 내어주는 한 뼘의 그늘이기를 꿈꾼다.


이구락 시인


작가소개

경북 의성에서 태어나 경북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대구가톨릭대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79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으며, 시집으로 『서쪽 마을의 불빛』 『그해 가을』 『꽃댕강나무』, 시선집 『와선』 『낮은 위쪽, 물같이』, 문집 『길 위의 시간들』 등이 있다. 대구시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차례

제1부
매화꽃 멀미•13/꽃댕강나무•14/만월•15/노천탕에서•16/지는 해•17/구층암 모과나무 등신불•18/통도사 자장매•19/금둔사 납월홍매•20/산초나무 젓가락•21/낙화야, 낙화야•22/영광 백바위•23/침묵 한 덩어리•24/구절송 가는 길•25/저무는 강변에서•26/정각산•27/화전놀이•28

제2부
달빛 경전•31/북행•32/수종사•33/사랑에게•34/겨울 장고도에서•35/이끼•36/봄의 화음•37/여름 화양동•38/돌들이 모여앉아 강 걱정을 합니다•39/칠평천 1•40/칠평천 2•41/황여새 똥•42/햇차 볶는 날•43/야단법석•44/화엄사 흑매 아래서•45/매괴장미•46

제3부
가을 동화•49/숨어 있는 절•50/달빛고속도로•51/아무렇게나 세상에 나온 빛깔은 없다•52/가을 산•53/달을 찌르는 솔잎•54/개심사 청벚꽃•55/다시 개심사 청벚꽃•56/잠복근무•57/막차•58/봉원석•59/여름 소나기를 보며•60/베네치아 점묘 1•61/베네치아 점묘 2•62/베네치아 점묘 3•63/아라홍련•64

제4부
첫눈•67/새벽 동행•68/오이식탁•69/운흥사 산벚꽃•70/순영문방구•71/봄, 내도에서•72/관매도•73/감은사지에서 1•74/감은사지에서 2•75/매지리 양안치 임도에서•76/길•77/도솔암•78/칠보산 가는 길•79/지죽도에서•80/난청, 소리의 탑•81/알람브라, 처형당한 사이프러스 나무•82

제5부
봄날의 아다지오•85/정취암 분청 안개•86/봄바람은•87/글을 낳는 집 1•88/글을 낳는 집 2•89/삼월 교정 잔디밭•90/두루미의 명상•91/개밥바라기별•92/별하에게•93/광주극장•94/덤블링 트리•95/삿포로 가는 길•96/융플라우•97/유로스타 밤 기차•98/대리고성에서•99/구름 위의 산책•100

[출처] 시인동네 시인선 190, 이구락 시집, 『이구락의 오행시편』|작성자 시인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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