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민족 시인 이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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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26    업데이트: 17-12-11 09:39

상화 앨범

중학교 시절 이상화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아트코리아 | 조회 1,362


키 170cm에 70kg이었던 女傑 어머니

이상화는 이시우(李時雨)와 김신자(金愼子)의 4남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시우가 1908년 사망해 4형제는 편모 슬하에서 자랐다. 어머니 김신자는 덩치가 큰 여장부였다. 문중에 따르면, 키가 5척6촌(169.7cm 추정), 몸무게가 18관(67.5kg 추정)으로 당시 여성의 평균 신장보다 훨씬 컸다.

그래서인지 이상화를 제외한 3형제의 키가 6척(尺)이 넘었다고 한다. 1척이 30cm라면 180cm가 넘었다는 얘기다. 이상화는 신장과 몸집이 보통이었다고 한다.

맏아들 이상정(李相定)은 광활한 중국 만주벌판에서 임시정부와 중국 장계석 군대에서 독립전쟁을 벌인 장군이 되었다. 셋째 이상백(李相佰)은 일본 와세다대 농구부 주장으로 활약, 나중 일본체육회 고위인사가 되었고 해방 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에 올랐다. 넷째 이상오(李相旿)는 ‘대한사격회 초대회장’을 역임한 수렵인이다. 이상오는 훗날 《한국야생동물기》 《세계명포수전》 같은 책을 썼다.

상화의 어머니 김신자는 억척스레 자녀를 키웠지만 정이 많아 베푸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일찍 과부가 되어서인지 불심(佛心)이 지극했다는 증언도 있다. 충희씨는 “어린 시절, 할머니 사랑을 많이 받았는데 세 살 버릇 여든 간다시며 버릇을 잘 들여야 한다는 말을 수시로 들었다”며 “아버지가 할머니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계속된 그의 말이다.

“상화의 백부가 소남(小南) 이일우(李一雨) 선생입니다. 당대 부호로서 재력을 바탕으로 팔운정(現 수창초등학교 부근)에 우현서루(友弦書樓)를 세워 많은 인재를 길렀습니다. 우현서루는 단순 책방이 아니라 수천 권의 책이 있는 도서관이었어요. 우현서루와 인연을 맺은 인물이 많은데 ‘목놓아 크게 소리내어 통곡하노라’고 쓴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의 장지연(張志淵), 상해 임시정부 국무총리와 제2대 대통령을 역임한 박은식(朴殷植),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한 이동휘(李東輝) 등이 대표적입니다.

이 우현서루에 인재들이 모여들자 1915년 일제는 폐쇄하고 말았어요. 그 후 강의원(講義院)으로 바뀌었다가 교남학교(1921년 설립)의 모태가 됩니다. 이 교남학교에서 이상화 시인이 영어와 작문을 가르쳤는데 이 학교 후신이 지금의 대구 대륜중고교입니다.”

충희씨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

“그러나 이상화가 백부의 영향을 많이 받았겠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백부보다 어머니(김신자)의 영향이 더 컸을 것으로 보입니다. 조카자식이 귀하겠습니까, 아들자식이 더 귀하겠습니까. 가훈인 ‘혼자 있을 때도 나를 속이지 말라’는 당당함과 성실성은 할머니 훈도에 의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 가르침 덕에 아들 4형제가 모두 출중했으니까요.”

—아버지 시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시는 무언가요.

“〈빼앗긴 들…〉과 〈나의 침실로〉를 좋아해요. 아버지 시비가 전국에 6개 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로 대구 달성공원에 세워진 시비가 ‘상화시비’입니다. 천안 독립기념관에도, 아버지가 교사로 재직했던 대륜고 교정과 아버지가 잠시 다녔던 서울 중앙고 교정에도, 대구 두류공원에도 시비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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