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5    업데이트: 18-04-11 15:50

노거수와사람들

[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중국계 귀화인 두사충과 계산동 뽕나무골목
아트코리아 | 조회 696

대구를 알면 알수록 독특한 이야깃거리가 많은 도시라는 생각이 드는데 수성구 만촌동 남부정류장 뒤편 형봉 아래에 있는 모명재(慕明齋)도 그중 한 곳이다. 중국 명나라 장수 모명 두사충(杜師忠)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재실이다.

공은 본관이 중국 두릉(杜陵`서안)으로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위기에 처한 조선을 도와주기 위해 그해 12월에 파견된 명나라 지원군 총사령관 이여송의 참모였다. 수륙지획주사(水陸地劃主事, 또는 복야`僕射)로 아군의 병영과 진지를 구축하는 것이 임무였다.

시성 두보(杜甫)의 후손으로 기주자사 두교림(杜喬林)의 아들이다. 조`명연합군으로 전장을 누비며 정철, 류성룡 같은 문신은 물론 이순신과 같은 장수들과도 수시로 작전을 협의하면서 왜적을 물리치는 데 공을 세웠다. 전쟁이 어느 정도 소강상태에 이르자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간악한 왜군은 공을 평안하게 놔두지 않았다.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다시 조선에 왔다. 이번에는 매부인 수군 도독 진린(陳璘)은 물론 두 아들을 동행했다.

이때 바다의 영웅 이순신과도 재회하게 된다. 그 감회를 충무공은 ‘봉정두복야’(奉呈杜僕射)라는 시로 화답했다.

북거동감고(北去同甘苦): 북으로 가기까지는 고락을 같이했고 / 동래공사생(東來共死生): 동으로 오면 죽고 사는 것을 함께하며/ 성남타야월(城南他夜月): 성 남쪽 타향의 밝은 달밤 아래 / 금일일배정(今日一盃情): 오늘 한 잔 술로 정을 나누네.

난이 끝나자 다시 왔던 명나라 군사들은 모두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공 역시 귀환 대열에 합류하여 국경지대인 압록강에 이르렀다.

이때 공은 매부인 수군 도독 진린에게 ‘조선 사람이 될지언정 머지않아 오랑캐나라가 될 명나라 백성이 되지 않겠다’고 하면서 맏이 산(山)과 둘째 일건(逸建)을 데리고 대구에 정착했다.

선조는 달구벌의 노른자위인 현 경상감영공원 일대를 하사했다. 그러나 이도 잠시 1601년(선조 34) 경상감영이 대구로 이전해 오자 일가는 거처를 계산동 일대로 옮겨야 했다.

그곳에서 뽕나무를 가꾸고 누에를 치며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때 옆집에 예쁜 과부가 살고 있었다. 홀아비인 공은 뽕을 따는 것보다 그 과부를 엿보며 연모하는데 오히려 많은 시간을 보냈다.

보다 못한 아들이 그 여자를 찾아가서 아버지의 속내를 털어 놓아 마침내 부인으로 맞아들일 수 있었다. 흔히 알려져 있는 ‘뽕도 따고 임도 본다’ 는 이야기는 이 일로부터 비롯되어 전국에 퍼졌으며 지금도 일대를 ‘뽕나무골목’이라고 한다.

노년이 되어 거주지를 최정산(그러나 대명단의 위치를 고려해 볼 때 앞산이 맞는 것 같다) 밑으로 옮겼다.

대명단(大明壇`지금의 대구고교 자리로 비정)을 설치하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 고국의 황제를 위해 관복을 입고 절을 하며 신하로서 예를 다했다. 오늘날의 마을 이름 대명동은 이렇게 해서 유래되었다.

풍수지리에 밝아 일찍부터 장차 당신이 묻힐 곳으로 지금의 수성구 고산 일대를 잡아 두었다. 어느 날 묘 터를 아들에게 일러주기 위해 담티 고개에 이르렀으나 너무 쇠약해 고개를 넘지 못하자 가까운 형봉을 가리키며 ‘저산 아래 묻어 달라’고 하여 쓴 묘 자리가 지금의 유택이다.

저서로 풍수지리서인 ‘모명유결’(慕明遺訣)을 남겼다. 산수에 정통해 이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은 옳은 지관이 아니라고 할 정도라고 한다.

모명재는 1912년 경산객사가 헐리자 그 재목을 구해 짓고 그 후 몇 차례 중수한 것이다.

공교로운 것은 그 후 본국으로 돌아갔던 매부 진린의 후손도 1644년(인조 22) 우리나라에 귀화해 현재 해남군 산이면 황조리에 정착해 살고 있다.

광동 진씨(廣東 陳氏)의 시조인 진린은 해군 도독으로 충무공과 여러 번 해전을 함께했었다.

해남군은 이 기이한 인연을 살려 진린의 고향 광동성 옹원현과 교류하고 있다.

대구생명의 숲 운영위원(ljw167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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