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5    업데이트: 18-04-11 15:50

노거수와사람들

[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아트코리아 | 조회 2,066

문무 겸비한 대봉 양희지 선생과 오천서원 은행나무

도시 외곽지였던 칠곡, 안심, 월배 등이 1970, 80년대 거대한 아파트 숲으로 변하면서 지금은 옛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지산지구도 예외가 아니었다. 범어천을 가운데 두고 양 쪽에 넓은 들이 있어 농사짓기가 수월했던 이곳은 중화 양씨(中和楊氏)의 집성촌이었다. 중화는 평안남도에 있는 고을이다. 고려 23대 고종 때 정승을 지내고 당악(중화의 옛 지명) 군(君)에 봉해진 포(浦)를 시조로 하고 있다. 그들이 지산동에 터를 잡은 것은 대봉 양희지(楊稀枝`1439~1504) 선생으로부터 비롯된다.

공은 1439년(세종 21) 순창군수를 지낸 아버지 맹순(孟純)과 어머니 나주 정씨 사이에 3남으로 태어났다. 4, 5세 때 모친과 함께 울산으로 가서 당시 이 지역의 세력가였던 이예(李藝`1373~1445)의 후원으로 학업에 정진했다. 이예가 손녀의 배우자로 공을 맞아들인 데서 알 수 있다.

1474년(성종 5) 문과에 합격하고 성종의 부름으로 알현했는데 ‘버드나무는 가지가 적은 것이 귀하다’ 하여 이름 희지(熙止)를 희지(稀枝)로 하사 받았다.

검열, 승문원 정자를 거처 1475년(성종 6)부터 3년간 사가독서를 하였다. 그후 부수찬, 교리 등을 역임했다.

1478년(성종 9) 홍문관 부수찬으로 있을 때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사직을 청하자 왕이 승정원에 묻기를 ‘양희지는 문무의 재질이 있으니 내가 만류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하였는데 승지 등이 아뢰기를 ‘양희지의 재주는 문무를 겸하였으며 쓸 만한 사람입니다. 형이 있어 어머니를 모시고 또 질병이 없으니 만류하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하여 결국 승낙 받지 못했다.

그러나 곧이어 대사헌 윤효손이 다시 건의하여 윤허를 받아 외직인 사천현감으로 제수되어 80 노모를 봉양할 수 있었고, 1483년(성종 14)에는 현풍 현감이 되었다.

1494년 연산군 즉위 후 홍문관 전한을 거쳐 상의원(임금의 의복이나 대궐 안의 재물과 보물 따위를 관리하는 관청) 책임자로 있으면서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고, 1497년(연산군 3) 직제학이 되었다. 왕이 경상도로 보내 삼포에 출몰하여 양민의 재물을 약탈하는 왜인들을 잡아 죄를 주어 다스리고 회유하여 평온을 되찾게 했다.

이듬해 무오사화 때에는 좌부승지로 있다가 충청도관찰사로 나간 뒤 바로 사직했다. 1500년(연산군 6)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거쳐 대사헌이 되었다. 인사에 불이익을 받은 박림종을 변호하다가 익산에 유배되었다. 장령 이의손 등이 공에게 죄를 묻는 것은 언로를 막는 길이라 하여 시정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502년(연산군 8) 죄가 풀려 동지중추부사 겸 세자우부빈격이 되었으며 이듬해 동지성균관사를 거쳐 한성부 우윤(右尹`종2품) 재임 중 사망하니 향년 66세였다.

박안성이 왕에게 아뢰니 세자가 2일 동안 강을 금하도록 했다. 1507년 중종이 이현보에게 지참시켜 제문을 보내왔다.

저서로 ‘대봉집’이 있고 대구의 오천서원(梧川書院)에 배향되었다.

조광조가 유배 중인 한훤당 김굉필 선생에게 학문을 배우려 할 때 공은 소개 편지를 써 주어 그가 조선성리학의 맥을 잇게 하고, 도학정치를 실현하고자 노력한 인물로 자리 잡게 했다.

1478년(성종 9) 6월 5일 자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노모가 형과 그 아들과 함께 대구부에 살고 있다고 했고, 서영곤이 쓴 무릉서당기(武陵書堂記)에는 우거한 곳을 미리(美理) 즉 오늘날 동촌 일대라고 했다.

따라서 공의 나이 40세 전후 모친과 형이 울산에서 대구로 옮겨와서 살았던 것 같다.

그 후 둘째 아들 배선(拜善)이 대구의 재지사족으로 파동에 살던 옥산인 전중견(全仲堅)의 딸과 혼인하여 처의 고향에 살게 되면서 지산동 일대에 세거한 것으로 보인다.

‘대구읍지’에 의하면 공은 조선조 청백리이자 문장이 뛰어난 명신이었다. 시대를 초월해 사표로 삼아야 할 분이나 공을 기리는 파동로 2안길 20번지 무릉계곡에 있는 오천서원은 조용하기 만하다. 다만, 서원 앞 은행나무만 노랗게 물들고 있었다.

대구생명의 숲 운영위원(ljw167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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