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1    업데이트: 18-04-11 15:30

칠곡이야기

전민련, 전사헌 양 선생 제단비(祭壇碑)
아트코리아 | 조회 681

정선 전씨 팔거 즉 대구시 북구 도남동 입향조 우헌 전민련과 공의 아들 거옹 전사헌을 기리는 제단비

 

전민련, 전사헌 양 선생 제단비(祭壇碑)

 

북구 도남동은 30 여 년 전만해도 정선 전씨의 집성촌이었다고 한다. 특히 입향 조 우헌(愚軒) 전민련(全敏連, 1546~1615)은 임란 때 수백 명의 장정들을 모아 스스로 군량을 조달하며 함지산에 진을 치고 왜와 싸웠을 뿐 아니라, 망우당 곽재우와도 전황을 교환하였으며 전란 수습 차 이곳을 방문한 도체찰사 류성룡선생이 조정에 보고하여 임금께서 통례원 찬의(贊儀, 정 5품)에 제수하였고, 그 아들 거옹(莒翁) 전사헌(全士憲, 1565~1618)은 한강 정구선생의 제자로 예학에 밝아 가의편(家儀扁)’을 펴냈다. 또한 함지산을 달리 관인산(觀仁山)이라하고도 하였고 진을 함지진(咸至陣)하는 등 옛 지명, 인물, 및 향토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될 것 같아 전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묘를 향해 먼 곳에 단을 짓고 시제를 모신다’고 하였고, 정자께서도 묘 앞자리에 지은 배단을 일러 ‘권대(券臺)’라 하였으니, 묘를 쓴 후에 단을 세우는 일은 옛 성현들 때부터 있어 온 일이다. 하물며 난리를 만나서 묘를 지킬 수가 없고 눈을 씻고 보아도 일할 사람이 없으며, 자손들이 때맞추어 제사를 올릴 수 없는 경우이겠는가? 또한 충성을 다해 나라에 공을 세우고 그 학문적 연원이 영남 선비들과의 계통이 뚜렷한데도, 혼이 깃들어 제를 올릴 곳이 없는 경우이겠는가? 우리나라 선조 임금 때에 통례원 찬의 우헌공 전민련 부자(父子)의 사적이 바로 이런 예이다.

공은 정선인이다. 전씨는 우리 동방의 위대한 가문으로, 환성군 전섭, 문충공 전반, 정선군 전선, 충렬공 전이갑, 석릉군 전윤장이 가장 현달한 분이다. 중랑장 전인련, 진사 전무, 교리 전순동, 현령 전함화 등은 증조부, 조부, 부의 항렬의 어른이시다. 우헌공 전민련은 어릴 적부터 자태가 영특하고 행동에 어김이 없었으며, 자라서 책을 배우기 시작하자 한 번 들으면 곧바로 암송하였다.

《동생(蕫生)》이라는 책에 ‘누구에게 도를 전할 것인가’ 하는 부분을 읽었을 때 탄식하며 가로되, ‘이 사람이야말로 전할 만한 사람이다’ 하였다. 학동 시절에 사서(四書)와 육경(六經)을 자유자재로 읽어 내렸으며, 날마다 책을 짊어지고 다니면서 아랫사람이나 윗사람에게 모두 이름을 날렸다. 늘 몸소 실천하는 데에 힘을 썼을 뿐, 글을 교묘하게 짓는 일은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

부모님 상을 당하자 주문공가례(朱文公家禮)의 예를 그대로 잘 따라 극진한 태도를 보였으며, 무덤가에 여막(廬幕)을 짓고 피눈물을 흘리며 예법을 모두 마쳤다.

 

퇴계 이황선생을 선성(宣城)에서 뵙고, 우리 문목공 한강 정구선생을 분천(汾川)에서 뵙고 난 뒤에 강원도 정선의 옛집에서 이사하여 팔거[八莒, 곧 칠곡] 도덕산 아래 거처를 정하며, ‘영남에는 선비의 기풍이 살아 있어 살만한 곳이다.’라고 하였다.

임진년 난리를 만나자 절구(絶句) 한 수를 지었으니, 다음과 같다.

 

‘꿈을 깨 보니 가을바람 매섭고, 야밤에 금호강이 시끄럽구나.

눈을 들어 거대한 산천을 보고, 해와 달을 향해 마음속에 맹서하노라.’

 

곧이어 수백 명 장정을 모집하고, 집안의 곡식창고를 열고 가축을 풀어 군량을 충당하면서 관인산(觀仁山)에 진을 쳤다. 충익공 망우당 곽재우 장군과 안팎으로 호응하며 서로 첩보를 주고받았으니, 참으로 기각(掎捔)의 형세를 갖추었다. 문충공 서애 유성룡이 진지를 둘러보고 기뻐하며 말했다.

‘천시도 좋고 지리도 좋고 인화도 좋으니, 모두[咸] 지극[至]하오. 마땅히 함지진(咸至陣)이라 고쳐야겠소. 내가 조달해야 할 군사를 줄여주시고 충성을 다하여 나라에 보답해 주시오.’

선조 임금의 행재소에 이런 사실을 보고하자, 임금께서 통례원 찬의에 제수하셨다.

전쟁에 이긴 뒤에는 왜놈을 물리친 공[平吳之功]을 입 밖에 발설하지 않았다. 은거하면서 조용히 노닐다가 경전을 연구하고 도를 즐기면서 삶을 마쳤다. 이때가 을묘년(1615년) 12월 21일이다. 도덕산 임원(壬原) 방향에 장사지내고, 숙인(淑人) 문화 유씨 재춘의 따님과 합장하였다.

 

맏아들 전사헌의 자는 경보, 호는 거옹이었다. 성품이 신칙하여 조무래기들과는 노는 것이 구분되고 구차스럽지 않았다. 위로 치 배우는 경우가 많았고 한결같이 아버지의 가르침을 따랐다. 사람들은 모두 그것이 ‘태교(胎敎)다’고 말했다.

제사 지낼 적에는 반드시 목욕재계를 했고 뜰과 마당을 깨끗이 청소하며 제기와 음식을 정성스럽게 진열하였는데, 모두 의례의 격식에 들어맞았다. 우리 선조 문목공 정구선생을 찾아뵙고 예법과 관련하여 의심나는 부분을 질문했는데, 그것이 하나의 책이 될 만하여 책 이름을 ‘가의편(家儀扁)’이라고 했다. 평소에 늘 이런 말을 하였다.

 

‘내 벗은 곧 여기에 심겨진 송죽(松竹)과 매란(梅蘭) 뿐.

그 속을 천천히 걸어 다니면서,

고개 들어서는 생각에 잠기고 고개 숙여서는 독서로 일삼으니

흐르는 세월이 부족한지도 모르겠구나.”

 

무오년(1618년) 11월 20일에 세상을 떠났다. 장지는 달성군 높은 지대의 손원(巽原) 방향이었고, 달성 서상호의 따님이신 부인과 합장하였다. 아들은 공용, 여봉이었고, 손자는 응희였다. 증손과 현손은 모두 생략한다.

 

공의 종손[冑孫]인 전익동이 백 리 먼 길을 달려와 내가 있는 오군(梧莙) 아래를 찾아와 말하기를,

‘우리 선조 우헌공과 거옹공이 나라에 세운 큰 공훈과 유림들의 훌륭한 본보기가 된 일은 참으로 세월 속에 사그라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후손들이 불민하고 또 난리 통에 흩어져서 산소의 위치에 대한 기록도 편지 글에 조금 남아있을 뿐이었는데, 지금에 와서 청산은 너무나 막막하고 장소의 명칭도 모두 변해버렸습니다. 공자 시대의 추만보 같은 사람도 없습니다. 사대부 중에서 예를 아는 이들이 모두 ‘단을 짓는다면 괜찮지요’라고 하여, 금액을 갹출하고 흙을 떠서 평소 살던 도남재 뒤에 단을 세운 뒤 ‘기(氣)와 의(義)가 거의 한결같다’고 하면서 종이로 지방[紙位]만 갖추어 제향하였습니다. 저희 선조 두 어른[兩祖]께서 선생의 선조이신 문목공 정구선생과 친분[契分]이 얕지 않으니, 비문에 올릴 글을 몇 마디 얻어 백세 후손들에게 징험이 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라고 하였다.

내가 대답하기를,

《예기》에 ‘골육(骨肉)이 흙으로 돌아가면 혼령이 이르지 못하는 곳이 없다’고 하였고, 또한 ‘성묘[展掃]하는 날에 비나 눈이 내리면 재사(齋舍)의 제단(祭壇)에 지패(紙牌)만 갖춰 놓고 제향한다’고 하였다네. 그러니 산소를 찾을 수 없을 경우에는 단을 짓고 제사를 지내는 것이 의기(義起) 중의 한 방법일세. 이 어찌 전씨들의 영원토록 변함없는 추념의 뜻이 아니겠는가?

라고 하였다.”

 

무인년(1938년) 소서절 서원 정종호가 글을 짓고,

기묘년(1939년) 정월 여강인 이대원이 글씨를 쓰다.

 

 

1)주문공가례(朱文公家禮) : 남송(南宋)의 주희(朱熹)가 편찬한 관(冠)•혼(婚)•상(喪)•제(祭)의 의례서(儀禮書). 통상 ≪가례(家禮)≫ 혹은 ≪주자가례(朱子家禮)≫라고도 일컬음.

2)여막(廬幕) : 상주가 묘를 지키기 위하여 그 옆에 지어놓고 거처하는 초가.

3)선성(宣城) : 안동 예안의 옛 이름

4)분천(汾川) : 안동 영지산(靈芝山) 근처를 흐르는 강, 근처에 분천리가 있다.

5)관인산(觀仁山) : 지금의 함지산, 또는 관니산(冠尼山). 지명은 팔거역사문화연구회장 이정웅선생의 사이트 참조.

6)기각(掎捔) : 요새에 진을 치고 적을 맞받을 준비를 한 상태.

7)평오지공(平吳之功) : 글자 그대로는 오나라를 평정한 공훈이지만, 속뜻은 왜군을 물리친 공로라고 읽어야 한다. 일제시대 1939년 쓰여 진 비문인 점을 감안할 때, 일본을 직접 거론하기 어려워 우회적으로 중국의 남쪽 변방의 오랑캐 나라를 지칭하는 오나라를 대신 사용한 것으로 짐작된다.

8)한강 정구선생에게 예에 관한 질문을 하고 대답한 내용이 현재 한강집 제7권 문답 편에 기록되어 있다.

9)지패(紙牌) : 종이로 만든 위패, 곧 지방(紙榜).

10)의기(義起) : 고유한 예법이 적합하지 않을 경우 개인의 의견에 따라 새로운 예법이나 기준을 창작하는 것을 말한다.

 

*번역 및 각주(脚註) 방손 한의학 박사 전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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