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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의 고사

동파육의 유래 肉 12/19
아트코리아 | 조회 792

 

2008/12/19

蘇瞻 

 

 
소식 (1037~1101)

1036. 12. 19~1101. 7. 28.

 

 東坡肉

 

유래
  송나라 소동파는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으로 신기질과 함께 사로서 쌍벽을 이룬다.

서예와 회화역시 독보적이었다. 요리예술에서도 명수였다. 
황제에게 버림을 받아 황주로 왔을 때 종종 직접 요리를 해서 친구들에게 선 보였다.

소동파의 요리는 홍샤오로우가 제일 자신있는 것이었다. 
그는 시에서 자신의 요리경험을 말한바 있다.

 약한불에 물을 조금 넣고 지긋이 오래 끓이면 맛있게 된다. 
그러나 이 요리가 그의 이름이 붙여져서 동파육이 된 것이다. 
또 소동파가 두번째로 항주에 지방관리가 되었을 때 일러난 재밌는 일이 있다.

 

그때 서호의 물이 순무에 의해 대부분이 통하지 않게 되었다.

소동파는 지방관으로 재임한 후, 수많은 민공들을 동원하여

 순무밭을 없애고 호수항에 물을 트려고 진흙을 쌓아 긴 제방을 만들기 시작했다.

아울러 다리도 만들어 서호의 물이 통하도록 했다. 서호를 새롭게 단장했고,물도 모아 밭에 물을 대주었다.

이렇게 건설된 긴제방은 환경을 개선하여 여러사람에게 물의 혜택을 가져다 준 동시에

 서호에 아름다운 미관도 더해주게 된다. 후에 서호십경의 으뜸으로 꼽히는 '소제춘효'가 되었다.

 

 

疎導 : 막혀있던 수로를 뚫어 물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다.

 

 

 

당시, 백성들은 소동파를 지방을 위해 이렇게 좋은 일을 해주었다고 칭송했다.

또한 사람들은 소동파가 홍샤오로우 먹는 걸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는 설이 되자

모두 약속이나 한 듯 똑같이 그에게 돼지고기를 주며 그들의 마음을 전했다.

소동파는 그렇게 많은 돼지고기를 받고, 함께 일하며 고생한

수만명의 서호 민공들과 기쁨을 같이 나누는 것이 옳다고 여기고는

가인들을 불러 선물로 받은 돼지고기를 네모나게 썰게 하고 그의 조리방법으로 요리를 시켰다.

그 요리를 술과 함께 민공 인명부에 따라 각각의 민공의 집으로 보냈다.

 

 

 

소동파의 가인들이 요리를 할 때 '술과 함께 보내라' 란 말을  '술과 함께 같이 익히다' 로 알아들어서

 

그 결과 '홍샤오로우'가 나오게 된 것이다. 더욱 맛있게된 요리를 맛 본 사람들은

입에 맞고 기가막힌 맛이라고 소동파를 칭송했다.

많은 사람이 찬양하여 이런 재밌는 소문이 퍼지자 당시 소동파를 찾아 제자가 된 사람중 

서예와 문장을 배우려는 이들 외에 동파육 요리법을 배우려는 자들도 있었다.

 

 

 

후에 음력 추석 밤, 민간에는 집집마다 다들 동파육을 만들었다.

이렇게 전해내려져 풍속이 되어 소동파에 대한 그리움의 정을 표시하게 된다.

현재 항주의 제일 특색있는 전통요리가 되었다.

로우와이로우 식당은 그들만의 방법으로  이 요리를 만들어내고 있다.

실천중 끊임없이 개진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또 다른 유래


여가가 날 때마다 소동파는 틈틈히 돼지고기를 쪄서 먹곤 했다고 전해진다.

요리를 하던 중에 오랜 친구가 그를 방문해서 바둑을 두곤 했다.

소동파는 바둑에 열중해서 타는 냄새가 나도록 고기를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이렇게 내 놓은 것이 바로 동파육(東坡肉)이라고 하여 거지닭(叫花鷄)과 함께 항주의 유명한 음식이다.

 

 

 烏臺詩案

 

소식이 왕안석의 신법을 비방한 7언절구 시 세 수.

 

山  村
 
其一
雨蒙蒙鷄犬聲,有生何處不安生?
但敎黃无人,布谷何勞也勸耕。

(牛+賣) 송아지, 새끼[dú] 

 

其二
老翁七十自腰愧春山蕨甛。
豈是聞韶忘味,來三月食无
낫 겸 [ lian]  笋=[sǔn] 죽순  낫 겸  , 달 첨
    어찌 기즐길 개 [qǐ] 


其三
裹飯去悤悤,過眼靑錢轉手空。
得兒童語音好,一年强半在城中。

 匆=悤 바쁠 총


上次提到蘇東坡是反對王安石推行的新法的,不免发些牢骚。

소동파는 왕안석이 추진하는 신법에 반대함을 밝혔고 불만을 일으키게 된다.

 

这三首诗本来是蘇東坡抄录自己的旧作赠送给老友沈括的,

沈大科学家写写《夢溪笔談》搞搞科研可以,

做人可不怎么样:该老兄经过三#讲教育和保持先#进#性教育的学习后,

政治鉴别力和政治敏锐性得到了提高和加强,他马上看出了三首诗背后意味深长的东西,

回去就把这三首诗呈给神宗皇帝了。

 

이 세 수는 본래 소동파가 자신의 오랜 벗 쳔쿠오에게 주려던 것을 채록한 것이다.


王安石当政时大人雅量,多少能容忍苏东坡之流的讥讽和不满,

王安石下台后推行新政的人就开始收拾苏东坡了。

除了沈括呈献的三首诗外,政敌们收集起来的苏的讥刺时政的诗文还有不少,

不过比较有代表性的就是这三首。

 

왕안석은 소동파의 조롱과 불만을 용납할 수

왕안석이 물러난 후 신정을 추진한 이가 소동파를 수습해 주기 시작했다.

심괄정이 세 수의 시를 바친 것 이외에,

그런데, 비교적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 세 수이다. 
 
蘇東坡是如何讥讽王安石的新法的呢?

简单解析一下这三首绝句:

소동파가 어떻게 왕안석의 신법을 조롱했는가?

간략하게 세 절구를 분석해보자.


其一:
诗中描述农业萧条,时局动荡,鸡犬不宁,村里无牛耕作,否则,又何劳布谷鸟催人耕作呢?


其二:
老人七十多岁了还要亲自劳作,砍竹笋挖蕨根充饥,近来几个月吃不到盐,吃笋和蕨根都无味,

这可不是当年孔老夫子闻《韶》乐而三月不知肉味的情况啊!

——当时的盐法峻急,很多偏僻地方几个月吃不到盐。


其三:
青黄不接的时候,农民纷纷进城求贷款,一年里倒有大半年呆在城里,

到头来一无所获,只是小孩子们在城里久了学会了城里的普通话。

——新法中的“青苗法”规定:

各地方政府每年两次放款,听民户自愿贷款,借贷期限半年,出息二分。

这首诗意在讽刺农民贷款不好贷。

 

작은 아이들만이 성안에서 오래도록 표준어를 배운다.

왕안석 신법중의 청묘법을 규정한다.
 
哼哼、苏东坡讥讽朝廷抵制新法之心昭然若揭啊!
来啊!给我拿下!关到御史台监狱去!
汉代的御史台柏树丛中常有乌鸦栖息,所以后来人们都把御史台称作“乌台”,

由此,苏东坡由诗获罪,被羁乌台,“烏臺詩案” 得名。

 

漢나라의 어사대 측백나무 숲에 까마귀가 서식하고 있었다

 후에 사람들은 어사대를 '烏臺 오대'라고 불렀다.

이로 인해 소동파는 시로 죄를 얻어 오대에 속박되어,  烏臺詩案 이란 이름을 얻게 된다.

 

 

 

 

夜泛西湖五絶 


  新月生魄迹未安,才破五六漸盤桓。

今夜吐艶如半璧,游人得向三更看。


  三更向阑月漸垂,欲落未落景特奇。

明朝人事誰料得,看到蒼龍西沒時。


 蒼龍已沒牛斗橫,東方芒角升長庚。

漁人收筒及未曉,船過惟有菰蒲聲。

(湖上禁漁,皆盜釣者也。)


  菰蒲无邊水茫茫,荷花夜開風露香。

漸見灯明出遠寺,更待月黑看湖光。


  湖光非鬼亦非仙,風恬浪靜光滿川。

須臾兩兩入寺去,就視不見空茫然。



족보
오늘날까지 동양에서 이어지는 족보의 원형은

소순(蘇洵; 부)·소식(蘇軾)·소철(蘇轍; 제)이 정리한 '보첩'에서 비롯하였다.

보첩(譜牒)은 한 가문의 계통과 혈연관계를 부계를 중심으로 알기 쉽게 체계적으로 나타낸 책으로,

흔히 족보(族譜)라고 한다. 동일 혈족의 원류를 밝히고 그 혈통을 존중하며

가통의 계승을 명예로 삼는 한 집안의 역사책이다.

 

 


보다는 뜻을 가진 한자는 여러가지가 있다. 
일반적으로 보는 것은 '見, 看'이다.

환자를 잘  '照顧'하는 '간호사 看護師'

눈에 잘 띄게 걸어두는 표지인 '간판 看板'


한곳을 집중해서 보는 것은 '視, 示'이다.

눈길을 모아 한 곳을 본다는 것으로 凝視


'관람하다'는 말이 있다.

쭉 늘어놓고 상세히 보는것은 觀 
두루 살펴보는 것은 覽  


서로 마주보는 것은 賞

  '상줄 상'으로 주로 쓰이는 글자이지만

賞春客상춘객이란 말에서 보듯 서로 마주대해 본다는 뜻도 있다.


들여다 보는 것은 監

자세히 들여다 보는 뜻이 파생되어 '살피다'는 의미가 된 글자

그릇에 물을 담아 놓고 거울처럼 들여다보는 뜻으로 거울이라는 뜻의 글자였으나
청동거울이 나오면서 金을  더하여 '鑑'또는 '鑒'을 만듬  

또, 감이 상을 만나 監賞감상


명부에 일일이 점을 찍으며 조사하다의 '占考 '

이 '점고'의 의미를 가진 閱

檢閱검열하다


바라보다는 뜻을 가진 瞻

쳐다보다, 경주의 별자리를 보던 瞻星臺


언뜻보다는 의미의 瞥

  별안간瞥眼間

 

이외에도 본다는 의미의 한자는 더 있다.

그리고 이제 알아보고자 했던 글자인 '瞰 감' '瞻 첨'을 보자.

'눈 목目'과 '굳셀 敢감' 으로 이루어진 '굽어볼 감'

우리말에 '감히' [敢히] 라는 부사가 있다.
이 말은 두려움이나 송구함을 무릅쓰다 말이나 행도이 주제넘다. 
'감히 ~ 못하다' , '감히~할 수 없다.'형식으로 '함부로, 만만하게' 의 뜻을 나타낸다. 

이  '敢'은 '監 살필 감'과도 뜻이 통한다고 한다. 
'鳥瞰圖'는 새가 하늘 위에서 내려다 본 것처럼 그린 그림이다.
 

쳐다볼 첨

 

 

 

 

字子瞻,一字和仲,号东坡居士,眉州眉山(今四川眉山县)人,北宋大文豪。

 

其诗,词,赋,散文,均成就极高,且善书法和绘画,是中国文学艺术史上罕见的全才,

也是中国数千年历史上被公认文学艺术造诣最杰出的大家之一。

其散文与欧阳修并称欧苏;诗与黄庭坚并称苏黄;词与辛弃疾并称苏辛;

书法名列“苏、黄、米、蔡”北宋四大书法家之一;其画则开创了湖州画派。

 

소식(蘇軾, 1037년~1101년)은 중국 북송 시대의 시인이자 문장가, 학자, 정치가이다.

자(字)는 자첨(子瞻)이고 호는 동파거사(東坡居士)였다. 흔히 소동파(蘇東坡)라고 부른다.

현 쓰촨 성 미산(眉山)현에서 태어났다. 시(詩),사(詞),부(賦),산문(散文) 등 모두에 능해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다 ; 산문은 구양수와 함께 구소로 불린다.

시는 황전견과 더불어 소황으로 불린다 ; 사는 신기질과 함께 소신으로 불린다.

서예로는 소식, 황정견, 미불, 채양 북송 4 대 서예가중의 한명이다.

그림에서도 '호주화파'를 개창했다.

 

 

 

 

생애

家世
宋代著名文学家,唐宋八大家之一,和其父苏洵,其弟苏辙并称“三苏”。

其名“轼”原意为车前的扶手,取其默默无闻却扶危救困,不可或缺之意。

 

송나라 때 저명한 문인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인 소순(蘇洵)이었고,

그 아우도 소철(蘇轍)로 유명한 문인이다.

이 세 부자를 사람들은 삼소(三蘇)라고 불렀는데, 모두 당송팔대가로 손꼽혔다.

 당송 8 대가의 하나인 구양수 문하에서 배웠으며, 22세에 과거에 급제 일찌감치 문재를 알렸다. 


 仕途
宋仁宗景佑三年生,嘉佑二年进士,累官至端明殿学士兼翰林侍读学士,礼部尚书。

神宗时苏轼任祠部员外郎,因反对王安石新法而求外职,任杭州通判,知密州、徐州、湖州。

元丰二年,四十三岁时,发生了著名的李定 “乌台诗案” ,

他因此事入狱,几死,其弟苏辙自请贬职以轻其罪才得以保全,翌年被贬至黄州。

( 后以作诗 “谤讪朝廷” 罪贬黄州 )

哲宗时任翰林学士,曾出知杭州、颍州等,官至礼部尚书。

后又被章惇贬谪至惠州、儋州(海南岛)。

北还后第二年病死常州,终年六十六岁。南宋时追谥文忠。

他在政治上较偏于旧党,但也有改革弊政的要求;

既反对王安石比较急进的改革措施,也不同意司马光尽废新法,

因而在新旧两党间均受排斥,仕途生涯十分坎坷。

他在各地居官清正,为民兴利除弊,政绩颇多,口碑甚佳,杭州西湖的苏堤就是实证。

在政治上属于旧党,但也有改革弊政的要求。其文汪洋恣肆,明白畅达,为“唐宋八大家”之一。

 

당시 북송(北宋)은 왕안석 등이 주창한 신법을 둘러싸고 당쟁이 확산될 시기였는데,

소동파는 신법에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이를 구법당이라 하며, 구법당은 영수는 '자치통감'의 저자인 사마광이다)

이로 인해 정치적인 부침을 거듭했다.

말년에 신법당이 득세하면서 해남도까지 귀양을 갔으며, 신법당을 지지했던 철종이 죽고 복권되었으나,

귀양길에서 돌아오는 도중 6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2번 결혼하여 슬하에 네 아들을 두었다. 항주, 밀주, 서주, 호주 등에서 벼슬을 지냈다.

 

생애
소동파는 북송 인종(仁宗) 때 메이산[眉山:지금의 쓰촨 성(四川省)에 있음]에서 태어났다.

 8세 때부터 메이산의 도인(道人)이라 불리던 장역간(張易簡)의 문하에서 공부를 시작했는데,

그 영향을 받아 도가(道家), 특히 장자(莊子)의 제물철학(齊物哲學)을 접하게 되었다.

 1056년 그의 아버지 소순은 두 형제를 데리고 상경하여

 이들의 시를 구양수(歐陽修)에게 보여주고 격찬을 받았다.

이들 형제는 그해 가을 진사(進士)가 되었고

 이듬해 예부(禮部)에서 주관하는 시험에 나란히 급제했지만 모친상을 당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

1060년 복상(服喪)을 마치고 수도인 카이펑[開封]으로 돌아온 소동파는

관리임용 특별시험인 제과(制科)에 동생과 함께 급제했다.

이어 봉상부(鳳翔府:지금의 산시 성[陝西省]에 있음)의 첨서판관(簽書判官)이 되어

수도에 남게 된 동생과 헤어져 임지로 떠났다.

봉상부는 서주(西周) 이래의 여러 문화유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그는 공자묘의 석고와  왕유, 오도현의 불화 등을 접한 감회를 

〈봉상팔관 鳳翔八觀〉에서 읊었다.

石鼓:고대문자를 새긴 10개의 북 모양의 돌

開元寺 東塔에 남아 있는 당대 왕유(王維)·오도현(吳道玄)의 불화(佛畵)

 

 봉상부에서의 임기가 끝나 상경한 1065년에 부인 왕씨(王氏)와 사별하고

 그녀의 생전 모습을 〈망처왕씨묘지명 亡妻王氏墓地銘〉에 담았다.

이듬해 아버지 소순마저 죽자 아버지의 관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가 상을 치렀다.

 

탈상(脫喪)하고 상경한 1068년은 신종(神宗)이 즉위한 해로,

참지정사(參知政事:부재상) 왕안석(王安石)을 중심으로 한 개혁파가

중앙정부의 물자조달을 합리화하기 위한 균륜법(均輪法),

농촌에 저리자금을 융통하여 빈농을 보호하려는 청묘법(靑苗法) 등

이른바 신법(新法)을 시행하던 시기였다.

 

신법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던 소동파는 감관고원(監官告院)이라는

지극히 사무적인 업무를 담당하다가 지방 근무를 청하여 절강성[浙江省] 항저우[杭州]에서 근무했고,

 이어 밀주(密州:지금의 山東省에 있음)·쉬저우[徐州]·후저우[湖州] 등지의 지방관을 역임했다.

또한 그는 신법으로 인해 고생하는 농민들의 생활상을 시로써 묘사하고는 했다.

湖州 知事로 있던 1079년 조정의 정치를 비방하는 내용의 시를 썼다는 죄목으로

 어사대(御史臺)에 체포되어 수도로 호송되었다.

이때 어사들의 심문과 소동파의 변명을 담은 기록이

〈오대시안 烏臺詩案〉에 남겨져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다행히 사형을 면한 그는 100일간의 옥살이를 마치고 '황주'의 단련부사 團練副使로 좌천되었다.

(黃州:지금의 湖北省  황강현 黃岡縣)   

 정치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고 황주에 거주할 의무가 지워진 일종의 유형(流刑)이었다.

황주에서의 생활은 매우 비참했다. 부인은 양잠을 했고, 그는 본래 병영이었던 땅을 빌려 농사를 지었다. 이 땅을 동파(동쪽 언덕)라 이름짓고 스스로를 동파거사라고 칭했는데, 그의 호는 여기서 유래한다.

그 유명한 〈적벽부 赤壁賦〉가 지어진 것도 이곳에서였다.

 

1085년 신종이 죽고 철종(哲宗)이 즉위하자

 神宗의 어머니이며 철종의 할머니인 선인태황후(宣仁太皇后)가 섭정을 시작했다.

그녀는 뤄양[洛陽]에 운둔해 있던 사마광(司馬光)을 불러들여 왕안석 일파가 만든 신법들을 폐지했다.

이때 소동파도 다시 발탁되어 예부랑중(禮部郞中)을 시작으로

 중서사인(中書舍人)·한림학사지제고(翰林學士知制誥) 등의 요직에 올랐다.

그러나 사마광의 신법 폐지가 모역법(募役法)의 폐지에 이르는 등 과격해지자,

소동파는 중서사인이 되어 수도로 올라온 동생과 함께 그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사마광이 죽고난 후 당쟁이 시작되었고, 선인황태후마저 사망하자 철종의 친정(親政)이 시작되었다.

철종은 신법들을 다시 부활시켰으며, 소동파는 다시 좌천되어 혜주사마(惠州司馬)로 임명되었다.

그에 대한 탄압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그를 질시하는 정치인들로 인해

 하이난 섬[海南島]으로 유배되어 그곳에 주로 거주하던 리족[黎族]과 함께 비참한 생활을 했다.

철종의 죽음으로 휘종(徽宗)이 즉위하면서 제거옥국관(提擧玉局觀)이라는 명예직에 봉해져

 상경하던 도중, 큰 병을 얻어 창저우[常州]에서 66세의 생을 마감했다.

 소식의 風格
文风
其文汪洋恣肆,明白畅达,《答谢民师书》中曾自谓:

“大略如行云流水,初无定质,但行于所当行,常止于所不可不止,虽嬉笑怒骂之辞,皆可书而诵之。”

其诗清新豪健,善用夸张比喻。其体浑涵光芒,雄视百代,有文章以来,盖亦鲜矣。

一时文人如黄庭坚、晁补之、秦观、张耒、陈师道,举世未之识,轼待之如朋俦,未尝以师资自予也。

(节录《宋史》卷三百三十八《苏轼传》)

黄州词,是苏词的奇观;黄州文,则是苏文的高峰;《赤壁赋》是其高峰之巅。

 

시풍

소동파는 구양수·매요신(梅堯臣) 등에 의해서 기틀이 마련된 송시(宋詩)를 더욱 발전시켰다.

구양수·매요신 이전의 시가 대개 비애(悲哀)를 주제로 해왔던 데 비해서

 이 두 사람은 평안하고 고요한 심정을 주로 읊었고,

소동파는 이에서 벗어나 훨씬 적극적·자각적인 관점을 취했다.

즉 인생체험에 대한 시각의 전환을 생활의 지혜로 삼아

인간 불행의 내면에서 자신만이 인식할 수 있는 행복을 추구했던 것이다.

그가 이처럼 비애의 지양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장자의 제물철학, 불교의 묘리(妙理) 등의 사상적 배경 때문이었으며

〈적벽부〉에는 이같은 그의 사상이 잘 표현되어 있다.

그의 시는 자유분방한 심정과 재능의 표현을 통해 경쾌한 리듬 속에 절묘한 비유와 유머를 담고 있다.

 제재에 있어서도 특별히 구애받지 않아 이전까지 다른 사람들이 취하지 않았던 것,

 간과되어 왔던 것들도 시로 썼다. 그의 시는 모든 사람에 대한 폭넓은 애정을 기저에 깔고 있으며,

 인간의 욕망을 긍정했고 인간의 선의(善意)를 신봉했다.


 詩風
苏轼工诗,与黄庭坚合称“苏黄”。现存约四千首[来源请求],其诗内容广阔,风格多样,而以豪放为主。

对后人影响也最大的是抒发人生感慨和歌咏自然景物的诗篇。表现出宋诗重理趣,好议论的特征。

《饮湖上初晴后雨》

(水光潋艳晴方好,山色空蒙雨亦奇。欲把西湖比西子,淡妆浓抹总相宜。)

 

元丰四年暮春三月,东坡写下《黄州寒食诗帖》。

此帖为两首五言古风,诗句沉郁苍劲,低回长叹,极富感染力。

其书法笔力沉劲,气势磅礴,在书法史上影响很大,

后世誉为《兰亭序》、《祭侄文稿》之后的“天下第三行书”。

 

원풍 4년 1082년 3월에 동파는 <황주한식시첩>을 썼다.

그의 나이 45세였다.

이 첩은 두 수로 된 오언고풍이다.

시구는 침울하나 기품있게 길게 탄식하며 배회하는 감흥력이 뛰어하다.

서예의 필력도 힘차고 기품있는데 기세가 웅장해 서예사에서 영향력이 매우 크다.

후에 난정서, 제질문고에 이은 제 3 행서로 추앙받게 된다.

 

黄庭坚在此帖后题跋:

“东坡此诗似李太白,犹恐太白有未到处。此书兼颜鲁公、杨少师、李西台笔意,

试使东坡复为之,未必及此。它日东坡或见此书,应笑我于无佛处称尊也。”

朱弁《曲洧旧闻》:

“东坡文章至黄州以后,人莫能及,唯黄鲁直诗时可以抗衡;

晚年过海.则鲁直亦瞠乎其后矣。”

其诗清新豪健,善用夸张比喻,在艺术表现方面独具风格。

少数诗篇也能反映民间疾苦,指责统治者的奢侈骄纵。

词开豪放一派,对后代很有影响。

 《念奴娇·赤壁怀古》、《水调歌头·丙辰中秋》传诵甚广。

 诗文有《东坡七集》等。

 

시문집으로는 동파칠집(東坡七集)이 있고, 수필집으로는

'答謝民師論文帖 답사민사눈문첩',  '祭黃幾道文 제황기도문'

 '전적벽부(前赤壁賦) 黃州寒食詩帖 황주한식시첩'등이 있다.

 

천하 제3행서 한식첩


詞格

송사의 풍격
现存三百四十多首,冲破了专写男女恋情和离愁别绪的狭窄题材,具有广阔的社会内容。

在中国词史上占有特殊的地位。将北宋诗文革新运动的精神,扩大到词的领域,

扫除了晚唐五代以来的传统词风,开创了与婉约派并立的豪放词派,对后代很有影响,扩大了词的题材,

丰富了词的意境,冲破了诗庄词媚的界限,对词的革新和发展做出了重大贡献。

《念奴娇·赤壁怀古》、《水调歌头·明月几时有》传诵甚广。

相传苏轼官翰林学士时,曾问幕下士:“我词何如柳七?”幕下士答曰:

“柳郎中词只合十七八岁女郎,执红牙板,歌‘杨柳岸晓风残月’。

学士词须关西大汉,铜琵琶、铁绰板,唱‘大江东去’。” — 俞文豹《吹剑录》

 

그는 사(詞)에서도 기존의 완약(婉約) 대신에 호방한 사풍을 창시했다.

 '적벽회고'(赤壁懷古)라는 부제가 붙은 〈염노교 念奴嬌〉·〈수룡음 水龍吟〉 등은

영물시(詠物詩)의 극치라 일컬어진다.

한편 산문에서는 당송8대가 중 소씨 부자, 즉 3소가 포함되었다.

 동파의 산문은 송대의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 비해 이색적이다.

그의 작품이 지닌 가장 큰 특징은 그 무엇에도 구속받지 않는 자유분방함이다.

동파는 작가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묻어나와야만 훌륭한 문장이 된다는

청년기의 생각을 평생토록 일관했다.

〈조주한문공묘비 潮州韓文公廟碑〉 등의 비문, 〈유후론 留侯論〉·〈범증론 范增論〉 등의

사론(史論)을 비롯해 많은 산문을 남겨 지금까지도 널리 읽혀지고 있다.

 

서예의 풍격
擅长行书、楷书,取法李邕、徐浩、颜真卿、杨凝式,而能自创新意。

用笔丰腴跌宕,有天真烂漫之趣。与蔡襄(原为蔡京)、黄庭坚、米芾并称“宋四家”。

苏轼早年学“二王”,中年以后学颜真卿、杨凝式,晚年又学李北海,又广泛涉猎晋唐其他书家,

形成深厚朴茂的风格。他的书法,用笔多取侧势,结体扁平稍肥。

这与他握笔的姿势也很有关系,苏轼执笔为“侧卧笔”,即毛笔侧卧于虎口之间,

类似于现在握钢笔的姿势,故其字右斜,扁肥。

他讲自己书法时说:“作字之法,识浅见狭学不足,三者终不能尽妙,我则心目手俱得之矣。”

他讲他的书法艺术创作过程时说:“我书意造本无法,点画信手烦推求。”他重在写“意”,

寄情于“信手”所书之点画。他在对书法艺术深刻理解的基础上用传统技法去进行书法艺术创造,

在书法艺术创造中去丰富和发 展传统技法,不是简单机械的去模古。

 

黄庭坚将苏轼书法分为早、中、晚三个时期:早年姿媚、中年圆劲、晚年沉着。

早期代表作为《治平帖》,笔触精到,字态妩媚。中年代表作为《黄州寒食诗帖》。

此诗帖系元丰五年(1082)苏轼因为乌台诗案遭贬黄州时所写诗两首。

诗句沉郁苍凉又不失旷达,书法用笔、墨色也随着诗句语境的变化而变化,跌宕起伏,

气势不凡而又一气呵成,达到“心手相畅”的几近完美的境界。

所以元朝鲜于枢把它称为继王羲之《兰亭序》、颜真卿《祭侄稿》之后的“天下第三行书”;。

晚年代表作有行书《洞庭春色赋》、《中山松醪赋》等,此二赋以古雅胜,姿态百出而结构紧密,

集中反映了苏轼书法“结体短肥”的特点。其最晚的墨迹当是《与谢民师论文帖》(1100年)。

 

其代表作有《黄州寒食诗帖》、《天际乌云帖》、《洞庭春色赋》、《中山松醪赋》、《春帖子词》、

《爱酒诗》、《寒食诗》、 《蜀中诗 》、《醉翁亭记》、《人来得书帖》、《答谢民师论文帖》、

《江上帖》、《李白仙诗帖》、 《次韵秦太虚诗帖》、 《渡海帖》、 《祭黄几道文卷》、

《梅花诗帖》 、《前赤壁赋》、《东武帖》、《北游帖》、《新岁展庆帖》、 《宝月帖》、《令子帖》、《致南圭使君帖》、《次辩才韵诗》、《一夜帖》、《宸奎阁碑》、《致若虚总管尺牍》、《怀素自序》 等。苏轼的书法,后人赞誉颇高。

 

擅长行书、楷书,取法李邕、徐浩、颜真卿、杨凝式,而能自创新意。用笔丰腴跌宕,有天真烂漫之趣。

与蔡襄、黄庭坚、米芾并称“宋四家”。能画竹,学文同,也喜作枯木怪石。

最有发言权的莫过于黄庭坚,他在《山谷集》里说,

“本朝善书者,自当推(苏)为第一”。

论画主张 “神似”,认为 “论画以形似,见与儿童邻”;

高度评价 “诗中有画,画中有诗” 的艺术造诣。

存世书迹有《答谢民师论文帖》、《祭黄几道文》、《前赤壁赋》、

《黄州寒食诗帖》等。画迹有《枯木怪石图》、《竹石图》等。

 

서풍

소동파는 서예에도 뛰어났다.

그의 글씨는 동진(東晋)의 왕희지(王羲之)·왕헌지(王獻之) 부자의 정통적인 서법과

당대 안진경(顔眞卿) 일파의 혁신적 서법을 겸비하고 있는데,

그 자신은 글씨 자체보다도 살아 있는 정신과 기백의 표현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겼다.

그는 〈제발 題跋〉이라는 평론에서 해서(楷書)가 모든 서체의 기본이며

서예는 사람 됨됨이의 표현이라는 생각을 일관되게 주장했다.

 

그의 글씨로는 유배지 황주에서 쓴 〈한식시권 寒食詩卷〉,

예부상서 시절에 쓴 〈이태백선시권 李太白選詩卷〉 등이 원본으로 남아 있다.

항저우에서 쓴 〈진규각비 宸奎閣碑〉와 같이 탁본이 남아 있는 경우도 있으나,

모두 신품(神品)이라 일컬어진다. 그의 필적을 모은 〈서루첩 西樓帖〉도 전해진다.

 

화풍

한편 그의 죽화(竹畵)는 문동(文同)에게서 배운 것이라고 스스로 밝혔다.

동파는 그림을 그리는 데 기교를 쓰지 않았으며,

친구들은 그러한 그의 그림에 한 점의 세속성도 보이지 않는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왕유의 그림에 대해 "시 속에 그림 있고 그림 속에 시 있네"라는 말을 남겼는데,

이는 이후 중국 화론사에 면면이 이어지고 있다.

 

이같은 예술 사상과 기교에 대한 무관심은

문인화(文人畵)를 크게 부흥시키는 힘이 되었다.

다른 문인들과는 달리 동파의 시문집은 생전에 이미 간행되어 재판의 물증으로 제출될 정도였다.

〈동파집 東坡集〉 40권과 〈동파후집 東坡後集〉 20권은 남송 데의 판본이 여러 종류 남아 있다.

이 두 책에 〈주의 奏議〉·〈내제집 內制集〉·〈외제집 外制集〉·〈응소집 應詔集〉·〈속집 續集〉

을 합친 〈동파칠집 東坡七集〉은 100권이 넘으며, 〈동파전집 東坡全集〉이라 불리기도 한다.

 

 

소식의 그림으로는 행목괴석도(枯木怪石圖) , 죽석도(竹石圖) 등이 있다.

소동파는 화론에서 '대나무를 그릴 때는 먼저 네 마음 속에 대나무가 있어야 한다.' 라 했다.

이는 각 개인마다 지닌 대나무를 먼저 들여다봐야한다는 뜻으로

소동파가 생각하는 회화론의 특징에 대해 알 수 있다.

 

 

 A memorial concerning the iron industry

제철산업에 관한 자료를 남긴 소식의 업적

 

 

This medieval printed illustration depicts waterwheels powering

 the bellows of a blast furnace in creating cast iron.

 

This illustration is taken from the 14th century treatise Nong Shu,

written by Wang Zhen in 1313 AD, during the Chinese Yuan Dynasty.

 

이 중세 산업활동을 담고 있는 삽화는

물의 에너지를 이용하여 원동력을 얻는 수력 터빈의 물레방아를 묘사하고 있다.

이 물레방아로 송풍로에 바람을 불어넣어 일으켜 철을 주조하고 있다.

이 삽화는 14세기 농슈의 원저에서 나온 것으로, 중국 원나라 시기인 1313년 왕젼에 의해 그려졌다.

 

물레방아, 수력발전

사진 출처 :  http://www.waterhistory.org/histories/waterwheels/

 

While acting as Governor of Xuzhou,

Su Shi on ce wrote a memorial to the imperial court in 1078 AD about problems faced

in the Liguo Industrial Prefecture, which was under his watch and administration.

소식이 '서주 徐州'를 관리하고 있을 때,  1078년에 소식은 宋 神宗의 元豊元年을 위해 기념비를 썼다.

그의 감시 관리하에서 리구오 산업 지방관리 문제에 대해 썼다.

 

In an interesting and revealing passage about the Chinese iron industry

during the latter half of the 11th century,

 Su Shi wrote about the enormous size of the workforce employed in the iron industry,

11세기 하반기동안 중국의 제철산업에 대해 흥미롭게 폭로했다.

소식은 제철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인구와 노동력에 대해 비교적 방대하게 썼다.

 

competing provinces that had rival iron manufacturers seeking favor from the central government, as well as the danger or rising local strongmen who had the capability of raiding the industry and threatening the government with effectively armed rebellion.

 

경쟁자는 중앙정부로 부터 호감을 사려는 라이벌 제철산업가들이었다.

또,  무장반란군과 함께 정부를 위협하고, 제철산업을 강탈하는 떠오르는 위험한 지역세력이 있었다.

 

It also becomes clear in reading the text that prefectural government officials in Su's time

often had to negotiate with the central government in order to meet

 the demands of local conditions:

소식은 종종 지역의 정황을 만족스럽게 만들기 위해 중앙정부 관료들과 자주 교섭을 진행해야 했으므로

정확하게 지방관료들의 문서를 보다 정확하게 읽게 되었다.

 

 水碓  물레방아

[shuǐ duì] 
用水碓春米   물레방아를 찧다

 

 

절구


水碾  [shuǐ niǎn]   연자방아

碾子 : 롤러,  물건을 찧거나 가루를 만들거나 지면의 평탄화에 이용되는 기구

[dao]

찧다. 빻다.

把大米捣成粹末就能做饺子了 쌀을 빻아 가루를 내면 만두를 만들 수 있다. 
这是专门用来捣大蒜的。 이것은 전문적으로 마늘을 찧는 데 쓰인다. 
在车上的时候不知道被谁的手肘捣了一下。 차에 있을 때 누구의 팔꿈치에 찧었는지 모르겠다. 
你把蒜捣一捣。 너는 마늘을 좀 찧어라.

 

《食猪肉》

황주의 돼지고기는 질은 좋으면서 가격이 진흙처럼 싸, 
부자는 먹으려 하지 않고 가난한 자는 삶을 줄 모른다.
약한 불로 천천히, 물을 적게 넣고 삶아 충분한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제맛이 난다.
매일 아침 한 그릇 뚝딱, 내 배가 부르니 그대 뭐라 하지 마오.

 

黃州好猪肉,价賤如糞土。
富者不肯吃,貧者不解煮。
慢着火,少着水,火候足時它自美。
每日早來打一碗,飽得自家君莫管

 

이것에 대한 "돼지고기 송"도 있다.

 

냄비를 깨끗이 씻어, 물을 적게 넣고, 화염이 일지 않을 정도의 약한 불로 천천히 익히되,

익기 전에 급하게 뚜껑을 열지 마라. 충분한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제맛이 날 것이다.

황주의 돼지고기는 질이 좋으면서도 가격은 진흙처럼 싸다.

부자들은 먹으려고 하지를 않는데 가난한 사람은 삶을 줄을 모른다.

아침에 일어나 한두 그릇 뚝딱 먹는다. 내 배가 부르니 누가 뭐래도 상관 없지.


净洗锅,少著水,柴头罨烟焰不起。

待它自熟莫催它,火候足时它自美。

黄州好猪肉,价贱如泥土。

贵人不肯吃,贫人不解煮。

早晨起来打两碗,饱得自家君莫管。

<猪肉颂>

 

출처 :  http://lunatic.textcube.com/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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