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74    업데이트: 21-06-08 14:45

전각

何紹基의 墨飴에 대해서
아트코리아 | 조회 1,042


何紹基의 墨飴에 대해서

청나라의 서예가 하소기는 당나라 해서로 입문했다. 특히 안진경 해서에 매우 힘을 쏟았는데 안진경 속에 담겨 있는 篆隸 유전자의 뿌리와 청나라 비학碑學을 숭상하던 유행은 하소기가 한나라 예서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게 한다. 서예에서 篆隸를 중시하는 청나라 박학朴學, 부산 등석여 완원의 영향을 받으며 하소기는 금석기金石氣를 行楷에 녹여내 융화시켜 일가를 이루게 된다. 

하소기가 73세(1871년)때 남긴 작품 『묵이墨飴』는 楷行 속에 전서와 예서의 필의를 담아냈다. 기이하고 절묘하며 무르익은 매운맛과 창망蒼莽함이 뒤섞여 온 종이에 신비함이 감돈다. 이 작품은 眞草를 창작할 때 篆隸의 맛을 담아내야 한다는 관점을 잘 표현하고 있다. 즉 행초를 쓸 때의 중봉을 지키는 법을 말한다. 마종호는 말한다. “하소기는 70세 이후 종이에 붓을 댈 때 모험심으로 가득차 불안하게 표현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불안하면 할수록 더욱 묘해졌다.” 이는 중봉中峰의 붓을 다루는 법과 현완懸腕과 회완回腕의 붓을 잡는 법과 깊은 관계가 있다. 

하소기가 임서한 漢碑는 대단히 많다. 특히 장천비(張迁碑), 예기비(禮器碑), 형방비(衡方碑) 등에 특히 힘을 기울였다. 그는 임서 공부를 할 때, 되도록 다양한 옛 것을 참고하여 새로운 것을 창조해야 한다고 여겼다. 형상에 얽매여 구속되어서는 안 되며 자기 스타일로 작가정신을 담아낼 수 있는 기세를 중시했다. 동시에 팔을 허공에 걸어놓은 현완으로 회완回腕의 붓을 잡는 법으로 전서의 맛을 해행에 융합시켰다. 

하소기는 20대에 산동 제남에 거주하면서 산동성 일대의 비갈을 구하여 서예를 연마했다. 당시 그는 제남에서 장흑여묘지명을 구하여 공부하였고 북경의 포세신을 찾아가 탁본을 보여주면서 발문을 받았다. 현완懸腕의 붓을 잡는 법(猿臂法)에 대해 그는 《跋魏張黑女墓誌拓本》에서 "한 자 한 자 임서할 때 반드시 팔을 높이 매달아 회완回腕으로 공부해야 한다. 글씨에 온몸의 힘이 도달하도록 해야 글자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중봉의 기법은 한편으로는 고박함을 추구하는 하소기의 목표와 관계가 있고 한편으로는 각 체에 걸친 그의 사상과 관계도 있으며 또한 전예의 탐색과 금문과 전서의 필법을 귀감으로 삼던 청나라 시대배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물론 이것은 하소기의 생활 중의 깨달음과 관련이 있다. 그가 중국 四川省으로 學政을 갔을 때 보았던 원숭이에게 힌트를 얻었던 것이다. 아래의 시 《猿臂翁》을 보자.

書律本與射理同 서예의 법은 활쏘는 이치와 통한다
貴在懸臂能圓空 현완법으로 둥근여백을 만든다
以簡禦繁靜制動 간으로 번을 통제함은 곧 정이 동을 제어함이니
四面滿足吾居中 모든 만족은 내가 머무는 곳에서 나온다.

李將軍射本天授 이 장군은 본래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권한을 쏜 것을 보라!
猿臂豈止兩臂通 유인원의 팔이 어찌 두 팔에 그치겠는가?
氣自踵息極指頂 발뒤꿈치에서 정수리까지 숨을 차올리는 가장 길고 느린 호흡법을 체험하라!
屈伸進退皆玲瓏 굽히고 펴며 나가고 들어옴에 있어 모두 다 영롱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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