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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의 고사

자신의 존엄함을 보호하고자 하는 의지 - 我
아트코리아 | 조회 823

 

 

2009/4/17

“我字 

 http://blog.daum.net/ttugi77/15711490

 

 

 

漢字의 옛이야기

 吳東平

 

  중국작가 오동평의 <한자의 옛이야기>를 매일 번역을 합니다. 하루도 쉬지 않고 하기란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정윤수님과 송흥기님을 보면서 저도 한번 도전해 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한자의 옛이야기>는 중국

 음운학과 훈고학을 전공하신 오동평 교수의 저작입니다.  2006년 6월에 출간된 이 책에는 한자의 획의

순서에 따라 한자씩 이야기해나갑니다. <한자의 옛이야기>에서는 한 필에 담긴 옛이야기 들려주고

 한 획속의 맺혀있는 세계를 보여줍니다. 글자 한자한자 속에 담긴 옛이야기를 통해 한자의 깊은

 의미를 알려줍니다. 오동평과 함께하는 한자 옛이야기에 깊은 관심을 바랍니다.   민승준/     

  

    吳東平님의 漢字의 故事  http://data.book.hexun.com/book-368.shtml 

오수형님의 한자이야기  http://blog.daum.net/woobo21 

 

 

갑골문

 

금문

 

捍卫自己的尊严

자기의 존엄을 보호하다

“我”字

 

  第一人称代词“我”的本义是什么,历来众说纷纭,没有一个令人满意的答案。

自从20世纪初甲骨文被发现后,“我”的庐山真面目就逐步被人们所认识。

甲骨文的“我”为“”或“”,金文为“”或“”,上述的“我”的形体从直觉上告诉我们:

 

제 1 인칭인 “我”의 본 뜻은 무엇일까?

역대로 학설이 분분하지만 우리를 만족시키는 정확한 답안은 없었다.

20세기 초 갑골문이 발견된 이후 비로서 “我”의 진면목이 우리에게 인식되어지기 시작했다.

갑골문의 “我”는 “ ”혹은 “ ”이고 금문은 “ ”혹은  “ ”가 된다.( " " 고문자가 컴퓨터 인식 불가능)

20세기 초에 드러난 이러한 갑골문과 금문의 모습들은

 “我”에 대해 좀 더 직관적으로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알려주기 시작했다.

 

 

“我”是一种古代的兵器,像戈,却又比一般的“戈”上多几把像匕首形的锋利的小刀。

从整个字形来看,似乎又是一个不可分割的整体,即一个独体的象形字。

王国维先生早就指出“我”像兵器之形,郭沫若先生认为“我”是一种锯形的兵器。

 

“我”는 “戈”과 닮은 고대의 병기이다.

그런데 오히려 일반적인 “戈”보다 비수모양의 날카로운 칼날이 더 있다.

모든 글자 자형으로 보자면 나누어 질수 없는 독체적인 상형자이다.

왕국유 선생은 “我”가 병기 형상과 닮았다고 일찍부터 거론했고,

곽말약 선생은 “我”는 톱날 형태의 병기라고 생각했다.

 

푸펑현 서주묘 중 출토된 병기 [庄白村]

 

   说“我”是一种兵器,还可以从出土的文物中得到佐证。

1975年3月陕西扶风县一西周墓中出土了一种兵器[庄白村],其形状为“ ”,

其刃部为圆齿状,背部有两椭圆形的突出的供装柄用的环形孔。

如果将这种兵器装上木柄,就与甲骨文的“我”形状极其相似,

因此有的学者肯定这就是上古时的兵器“我”。

 

이렇게“我”가 일종의 병기라고 말하는 것은 출토된 문물에서 부터 증거를 얻을 수 있다.

1975년 3월 섬서성 푸펑현 씨죠우 무덤[庄白村]에서 위와 같은 형상의 병기가 출토되었다.

칼날 부분이 둥근 이빨 모양이고 등부분에는 타원형으로 돌출된 자루에 고리모양의 구멍이 있었다.

만약 이런 병기 위에 나무 자루를 장착한다면 갑골문 “我”의 형상과 아주 비슷하게 된다.

이로 인해 어떤 학자들은 이것이 바로 상고시대의 병기 “我”라고 단정지었다.

 

 

三戈戟 삼과극   具體名稱

 

1978年,湖北随州市曾侯乙墓中出土了一种类似三戈戟的兵器。

有的学者叫它多戈戟。学者们较一致地认为这种三戈戟就是“我”。

因此,学术界初步认定作为第一人称代词的“我”的本义,

实在是古代的一种三戈戟的象形字,而且认为这是一种杀伤力很强的武器。

 

1978년 호북성 쑤웨이쪼우시 증후을묘에서는 '삼과극'과 비슷한 병기가 출토되었다.

어떤 학자는 이것을 '다과극'이라도 부른다. 학자들은 이 '삼과극'이 바로 “我”라고 생각했다.

이로 인해 학술계는 제 1 인칭 대명사의 “我”의 본뜻을 초보적으로 인정했다.

사실 고대의 삼과극이라는 상형자는 살상력이 강한 무기였다.

 

  “我”在甲骨文中虽然没有用作本义的例子,

但有不少地方将“我”用于动词,当“宰”、“割”、“切”等意思讲的不少。

如“廿牛不我”(甲二三八二),其意思是20头牛不用“我”(兵器)宰杀。

  “我”作为第一人称代词用,早见于殷商时代的甲骨文中。

甲骨文中的“我”作代词用时,均指“我们”(即指以商王为代表的国家军队,

或以商王为代表的一群狩猎者),而没有指代个人的“我”。

 

“我”는 갑골문 중에서 비록 본래 의미로 사용된 예가 없지만,

적지 않은 곳에서 “我”을 동사로 사용했다.

'잡다, 도살하다, 주관하다',  '나누다',  '가르다'등의 뜻으로 된 예가 적지 않다.

그 예로 <갑골문 2383>에 “廿牛不我”라는 말이 있다.

그 뜻은 20 마리의 소가 병기를 사용해 도살하지 않았다.

“我”가 일인칭 대명사로 사용되어진 것은 은상시대의 갑골문 중에서도 일찌기 보여진다.

갑골문 중의 “我”가 대명사로 사용될 때는 균일하게 “우리”를 가리킨다.

(상왕을 대표로 하는 국가군대를 가리킨다. 혹은 상왕이 대표가 되는 수렵무리이다.)

개인적인 “我”를 가리키는 뜻은 없다.

 

        

란서부의 명문

 

为什么会出现这种现象呢?

这是因为“我”字作为己称代词的出现,应在人的“自我”观念产生以后。

开始,人类的生活方式是以氏族为单位的共同生产、平均分配的共产生活方式,

没有私有财产,没有私人权益,没有家庭。这时以自身为中心的“我”的概念还不可能出现。

但是由于氏族是独立的单位,那种以氏族为中心(或说以氏族全体成员为范围)的

“大我”倒是出现了。这种“大我”,就是“我们”,即一个群体。

 

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일까?

이것은 “我”가 자신을 지칭하는 대명사로 되어져 나왔기 때문에,

분명 사람의 '자아'관념이 나온 이후였을 것이다.

인류의 생활방식은 씨족을 단위로하는 공동생산, 평등한 분배의

재산을 함께 나누는 공산생활방식으로 사유재산, 개인적 권익, 가정이 없었다.

이 때는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我”의 개념은 나올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씨족의 독립적인 단위로서 그 씨족을 중심으로 하는

(혹은 씨족 전체구성원을 범위로 삼는) '대아'가 출현하게 된다.

이 '대아'가 바로 우리이다. 즉 하나의 무리이다.

 

란서부 청동기 기물과 새겨진 명문의 실제모습

 http://blog.daum.net/ttugi77/12381069

 

这种语言习惯首先进入商人的书面语中。

随着私有制的出现,导致个人的私欲渐旺,占有性渐强,

代表个人的“我”的观念顺应这个历史潮流便出现了。

 

이러한 언어 습관은 우선 상나라 사람들의 문어체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사유재산이 출현함에 따라 개인적인 사사로운 욕망이

점점 왕성해져서 점유하고 싶은 성정이 점점 강해지게 되었다.

 개인적인 “我”를 대표하는 관념이 순조롭게 역사상의 조류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因此,进入商代以后,

“我”指代个人的这种语言现象在商人的口头语中必然会出现,

只是没有进入书面语而已。

这就致使甲骨文中的“我”只代“我们”,不代个人。

这是“我”作为第一人称代词用时与后代不同的地方。

 

이로인해 상나라에 들어간 이후 는 개인을 대신하는 언어현상으로

상나라 사람의 습관적 언어에서 필수적으로 나타날 수 있게 되었고, 문어체에 들어가지 못했을 따름이다.

갑골문 중의 “我”는 다만 “우리”를 가리키고 개인을 대신하지 않게 되었다.

이것이 “我”가 일인칭 대명사로 사용되어질 때 후대와 다른 부분이다.

 

 

            ​

 

란서부에 새겨진 명문

以祭我皇祖  세째줄 아래에서 세번째가 以

 

  到了西周时代,“我”便开始指代个人了。

如“以祭我皇祖”(见栾书缶)。从此,“我”在古代既指个人,也指集体。

这就是学术界所说的古汉语中人称代词单复数同形的现象,

也是古代汉语中人称代词发展不够完备的一种表现。

古汉语不像现代汉语单数为“我”,复数为“我们”,彼此区别十分清楚。

 

서주시대에 이르러 “我”는 개인을 대신하는 뜻을 가리키기 시작했다.

그예가 <란서부>“以祭我皇祖”에 보인다.

이로부터 “我”는 개인을 지칭하기도 하며 단체나 무리도 가리켰다.

이것이 바로 학술계에서 말하는 바의 고대중국어 중의 인칭대명사 단복수동형의 현상이다.

또한 고대 중국어 중의 인칭대명사 발전상 완비할 수 없는 현상이다.

고대 중국어는 현대중국어 처럼 단수형이 “我”이고 복수형이 “우리”가 되는 것이 이니다

서로간의 구분이 매우 정확하다.

 

以祭我皇祖

 

  有的学者认为“我”用于第一人称代词是一种假借现象。

对此有的学者提出了不同的看法。

他们认为,从“我”字来看,“我”是一种兵器,

说明作为表人的“我”与指兵器的“我”是有联系的。

 

어떤 학자는 “我”가 일인칭 대명사로 사용되는 것은 가차된 현상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대해 어떤 학자는 다른 견해를 제시한다.

그들 생각에는 “我”를 보았을 때, “我”는 일종의 병기였다.

사람을 표시하는 “我”와 병기를 가리키는 “我”는 연관이 있다는 것을 설명한다.

 

 

 

私有制出现后,人与人,部族与部族之间的争夺便开始了,为了保卫部族“大我”的利益,

或个人的“小我”的权利与尊严,是要靠武力的。

由于古人要用兵器来捍卫个人的利益与尊严,于是“我”便引申为第一人称代词。

 

사유제가 출현한 후에 사람과 사람, 부족과 부족간의 다툼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부족을 보호하는 '대아'의 권익이나 개인적인 '소아'의 권익과 존엄을

지키기 위해 무기에 의존했던 것이다.

고인들은 병기를 이용해 개인적인 이익과 존엄을 보호하고 지켜나왔다.

그래서 “我”는 1인칭 대명사의 의미로 파생된 것이다.

  还有的学者认为,“我”是由“戈”(兵器)和“禾”(禾谷)构成,

“禾”是古人最大的私有财产,用武器来保卫财产“禾”就是“我”。

(参见徐一青、张鹤仙著《姓名趣谈》第49页)

 

또 어떤 학자들은 “我”가 “戈”(병기)과 “禾”(벼곡식)의 구성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禾”는 옛 사람들의 제일 큰 사유재산이었다.

 “戈”(무기)로 큰 재산인 “禾”를 지키는 것이 바로 “我”인 것이다.

쉬이칭, 짱허씨엔<성명취담> p. 49 참조

  

安子介先生也有相同的说法,他认为“我”是由“禾”和“戈”来描述的。

因此他说,人们为了生存下去,禾谷可使人免受饥饿,有了武器后,

可以捍卫个人尊严,抗御强敌的侵犯,有了这两样东西才有“我”的存在。

(参见《解开汉字之谜》第112页)

 

안쯔지에 선생도 같은 견해가 있었다.

그는 “我”는 “禾”와 “戈”로 묘술되어 나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로인해 그는 말한다. 사람들은 생존해 나가기 위해 이 두 가지가 필요하다.

벼 곡식은 사람을 굶주림을 면하게 해주고

무기가 있으면 강한 적의 침범에 대항해 개인적인 존엄을 지킬 수 있었다.

이 두가지가 있고나서야 비로서 “我”가 존재하게 되었다.

<한자의 수수께끼를 밝히다> p. 112 참조

 

 

-------------------------------------< 주석 1 >------------------------------------

 

청동아에 대해서

 

曾经昙花一现 "我"是青铜兵器 

한순간 나타났다 금방 사라져버렸던 "我"는 청동기 병기였다. 

 

글: 张颂斌   번역:민승준

출처:齐鲁晚报 (산동성 제남시 일간지)

 

青铜我

 

    在介绍了部分青铜兵器后,我还想介绍两件曾经昙花一现,甚至在古代兵器史上没有留下自己名字的兵器,而且还将名称变成了代词和量词。有一个最常用的代词“我”。看一下甲骨文的“”字,三个齿,戈字旁,我们知道在古文字中凡带“戈”字旁的字,原本与兵器、军事、杀戮有关,例如“伐”、“战”、“戕”、“戟”、“戣”等。

 

일부분의 청동기 병기를 소개한 후 다시 두 개의 청동기 병기를 더 소개하고 싶었졌다.

그 둘은 청동아青铜我이다. 일순간에 사라져 버렸던 청동기였다.

심지어 고대병기사상 스스로의 이름을 남기지 못했고 후대에 그 명칭이 대명사와 양사로 변했다.

바로 우리가 아주 흔히 사용하는 대명사 이다. 갑골문의 我를 보자.

세 개의 이빨모양 형상 오른쪽으로 戈가 자리하고 있다.

 

우리는 戈가 방으로 사용되는 글자는 병기, 군사, 살상용 도구와 관계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 예로 “伐”、“战”、“戕”、“戟”、“戣”등의 글자가 있다.

 

那么“我”是一件什么样的兵器呢?请看图片。这是1975年陕西扶风县庄白村出土的西周青铜我,现藏扶风博物馆。另一件是现藏故宫博物院的西周时期的青铜我。与矛和戈等长兵器相比,青铜我的出土量很少,说明当时使用并不多,但我们不难看出,古人发明的这件长兵器,装长柄之后,用于砍杀,突出的三角刺,砍将下来,一般的皮制的甲胄都难以保全。而象形字“”字,正是装柄之后兵器“我”的形象。

그럼 我는 어떠한 병기였을까? 사진을 보자.

이것은 1975년 협서성 푸펑현의 좡바이마을에서 출토된 서주청동아青铜我이다. 현재 푸펑박물관에 소장중이다.

다른 하나의 청동아青铜我는 고궁박물원에 소장중이다. 矛와 戈 같은 길다란 병기와 비교해 보면

청동아青铜我는 그 출토된 수량이 극소수이다. 이는 그 당시 사용빈도가 아주 적었음을 의미한다.

한편  고대인이 발명한 이러한 길다란 병기는 긴 칼 자루를 장착한 후

 찍거나 쪼개는 용도로 사용되었으며 보통의 가죽으로 제조된 투구나 갑옷은 이 병기를 이겨낼 수 없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상형자에서 볼 수 있는  자는 바로 자루를 장착한 병기 의 형상이다.

 

  

 

------------------------------<주석2>--------------------------------

 

란서부에 대해서

 

 

《栾书缶》是栾书祭祀祖先时盛酒的用器,

高48.8厘米、口径16.5厘米。

 

 란서부는 란서가 선조에게 제사지낼때 술을 담는 용기였다.

높이는 48.8센티미터 지름은 16.5센티미터이다.

 

器身及盖各有四环纽,纽作斜角云纹。

 

그릇의 몸과 덮개에 각각 4개의 고리가 있다.

 이 고리에는 각운문양이 비스듬히 새겨져 있다.

 

自颈、肩及於上腹有错金铭文五行四十字,盖内铸铭两行十字,

 

목과 어깨 및 상부 복부로 부터 5행으로 40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덮개 안쪽 면에도 2행 10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由左而右,字皆嵌金,

为栾书子孙祭祀祖先而作,但多年来习称栾书缶。

 

 좌에서 우로 새겨져 있으며 금으로 상감되었다.

란서자손들이 제사의 목적으로 사용하였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란서부로 불리어지게 된 것이다.

 

栾书又称“栾武子”或“栾伯”, 

是春秋时晋国大夫,执政14年,

 

于鲁成公四年(公元前587年)将中军,卒于公元前573年。

 

  错金相嵌铭文,始於春秋中期。

错金铭文多见於兵器,铭文往往数字。

 

란서는 란무자, 란백이라고도 불리어지는데

춘추시대 진晉나라 대부로서, 14 년을 집정했고

 노나라 성공4년(BC 587년)에 중군에 이르렀고, 

BC 573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금으로 상감되어진 명문은 춘추시대 중기부터 시작되었다.

 

 

이런 명문에는 주로 숫자가 많이 드러나고, 병기에 주로 보여진다.

 

象《栾书缶》这样长篇错金铭文,十分罕见。

 也是传世最早的错金铭文铜器。

 

란서부欒書缶와 같은 금으로 상감되어진 긴 명문은 매우 드문 것으로 

 

 

세상에 전해지는 제일 초기의 금이 상감된 명문이 있는 청동기이다.

 

 

《栾书缶》铭文十分精美,

铭在器物显著的位置上,具有装饰作用,

文字异体较多,字呈纵势,线条圆婉转,显得婀娜多姿。

 

 란서부의 명문은 매우 정교하고 아름다운데

기물에 새겨진 명문의 위치로 보면 장식성을 추구한 것이 분명하다.

문자는 이체자가 비교적 많고 글자는 세로의 세를 띤다.

획은 둥글고 완미하여 여성스럽고 우아한 자태를 드러낸다.

 

此缶无论从器形还是字体看,都属楚国作风,

故可能是后来入于楚国的栾书子孙的遗物。 


이 부는 기물의 형태로 보나 명문의 글자체로 보나 모두 초나라 시기에 속하는 것이므로

 아마도 초나라 란서자손의 유물로 보여진다.

 
 도움의 말
1. 란은 欒(모감주나무 란)의 속자

2. 착금錯金, 특수 공예의 일종으로 금속, 도자기등의 표면에

 여러가지 무늬나 글자를 파서 금, 은, 적동 등을 넣어 채우는 것.

 

 중국 청동기 기물 사이트
http://www.cchicc.com/index.php?id=537

http://www.610.126.com

 

 

갑골문의 我를 보자.

세 개의 이빨모양 형상 오른쪽으로 戈가 자리하고 있다.

 

우리는 戈가 방으로 사용되는 글자는 병기, 군사, 살상용 도구와 관계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 예로 “伐”、“战”、“戕”、“戟”、“戣”등의 글자가 있다.

 

那么“我”是一件什么样的兵器呢?请看图片。这是1975年陕西扶风县庄白村出土的西周青铜我,现藏扶风博物馆。另一件是现藏故宫博物院的西周时期的青铜我。与矛和戈等长兵器相比,青铜我的出土量很少,说明当时使用并不多,但我们不难看出,古人发明的这件长兵器,装长柄之后,用于砍杀,突出的三角刺,砍将下来,一般的皮制的甲胄都难以保全。而象形字“”字,正是装柄之后兵器“我”的形象。

그럼 我는 어떠한 병기였을까? 사진을 보자.

이것은 1975년 섬서성 푸펑현의 좡바이마을에서 출토된 서주청동아青铜我이다. 현재 푸펑박물관에 소장중이다.

다른 하나의 청동아青铜我는 고궁박물원에 소장중이다. 矛와 戈 같은 길다란 병기와 비교해 보면

청동아青铜我는 그 출토된 수량이 극소수이다. 이는 그 당시 사용빈도가 아주 적었음을 의미한다.

한편  고대인이 발명한 이러한 길다란 병기는 긴 칼 자루를 장착한 후

 찍거나 쪼개는 용도로 사용되었으며 보통의 가죽으로 제조된 투구나 갑옷은 이 병기를 이겨낼 수 없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상형자에서 볼 수 있는 자는 바로 자루를 장착한 병기 의 형상이다.

 

    

 

-----------------병기 2-------------------

 

 

青铜嵗 중국 수도박물관 소장

 

 还有一字“”字,即“岁”字,繁体字“嵗”字,也有戈字旁,其字也有原形。现藏首都博物馆,称为有銎(qiong)钺,商代长兵器,装长柄,也是砍杀类兵器。“”字正是装柄之形。岁字上的两个点正是表示兵器上的圆孔,这是岁字的最显著特征。

 

嵗도 오른쪽에 戈를 방으로 두고 있다. 중국 수도박물관에 소장중이다.

공월이라고 불리는 무기는 상나라의 길다란 병기였다. 역시 찍어서 죽이는 무기이다.

칼자루의 형상이 잘 드러나 있다. 갑골문 문자에 보이는 두 점은 병기의 둥근 구멍을 표시한 것으로 청동세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세상 세

 

 知道早期古文字不完备,一方面常有一字多用的情况,另一方面古时用字常有专名,例如“灾”字,现在指一切灾害、灾难。甲骨文时,火灾写作“”,水灾写作“”,兵灾写作“”,“”读作“在”、“才”,火灾、水灾、兵灾都是形声字,用了“在”的声和“火”、“水”、“戈”的形。

 

우리는 초기의 고문자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늘상 한 글자가 많이 사용되어지거나 옛날에 사용했던 문자에 전문적 명칭이 있다.

예를 들면 災(灾)가 있다. 지금은 모두 재해, 재난이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갑골문 때에는

화재, 수재, 병재를 다르게 사용했다. 즉 독음은 와 이다.

화재, 수재, 병재는 모두 형성자이다. 의 소리와 火, 水, 戈의 형태를  사용했다.

 

 

 

古时祭祀时,祭祀对象有三祭之说,祭天地、祭祖先、祭圣贤,在时间上有四祭,

即春祭、夏祭、秋祭、冬祭,也有专名,分别为“礿”、“禘”、“嘗(chang)”、“蒸”。

而以上两种兵器“我”、“岁”也应是当时的专名,“岁”的专名归为钺的总称也是符合规律的。

汉字中由原名词转化为其他词的不少,例如节约、模范、计较、规矩、关键、运筹、符合等,

也都反映了文字通假、借用的发展规律,原意淘汰后不用了,有了新的词意。

 

고대에 제사를 지낼 때는 제사를 지내는 대상에 따라 세가지 제사가 있었다. 천지, 선조, 성현 이었다.

제사 시간에 따라서는 춘제, 하제, 추제, 동제가 있었다.

또한 전문적인 이름으로 礿, 禘, 嘗, 蒸의 분별이 있었다.

 

위에서 설명한 두가지 병기 “我”,“역시 당시의 전문적인 이름이었다.

의 전문적인 이름은 의 총칭에 들어가는 것으로 역시 규율에 부합되는 것이다.

한자 중에는 원래의 명사가 다른 품사로 바뀌어진 것이 적지 않다.

예를 들면 절약, 모범, 계교, 규구, 관건, 운주, 부합[节约,模范,计较,规矩,关键,运筹,符合]등이 있다.

또한 모두 문자의 통가, 가차의 발전의 규율을 반영하는 것이다.

원래의 뜻은 도태된 후 사용되지 않게 되었고 새로운 뜻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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