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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 : 수성아트피아, 대백프라자갤러리 초대전 갖는 일사 석용진
13/04/02 21:30:11 Artkorea 조회 1831

 

시대와 소통하는


서예의 코드를 찾다 

 

 

  ‘서예도 예술이 될까? 서예가는 슬픔, 분노, 허망함, 이런 감정들을 어떻게 표현할까?’
  대학에서 서예 동아리 활동을 통해 본격적으로 서예공부를 시작한 그는 문득 스스로에게 물었다. 주위 선배, 스승도 그 질문에 속 시원하게 대답해 주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생각했다. ‘서예가 예술이라면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찾아보겠다.’ 그렇게 시작된 서예 인생이 30년을 훌쩍 넘겼다. 현재 그는 전통서예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서예 문화를 개척하는 선두주자에 서 있다. 이달 9일부터 21일까지 수성아트피아, 대백프라자 갤러리에서 대규모 초대전을 갖는 일사 석용진(55)이 바로 그다.


  40번 째 개인전을 여는 그에게 이번 전시의 의미는 남다르다. “이번 전시를 그동안 제가 실험하고 시도해온 서예 작품의 양식을 어느 정도 완성시킨 시점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의 집을 완성했다고 봅니다. 앞으로는 이 집 안에 꽃도 꽂고 인테리어도 해 볼까 합니다.” 그가 말하는 작품의 양식이란 ‘기운생동’, ‘표상’, 그리고 그것들을 연결하는 연기(緣起)이다. 이번 전시에서 그는 최소한의 표현 요소인 선과 암시적인 대상물인 새, 꽃, 인물 등을 새로운 조형 원리로 그려낸 작품들을 선보인다.
 

그는 31세의 나이에 1989년 한국서예협회가 주최한 제1회 대한민국서예대전에서 대상을 탔다. 국전에서 38년 만에대구 사람이 대상을 탄 것, 갓 30세를 넘긴 젊은 사람이 국전에서 대상을 탄 것 모두가 화젯거리였다. 마치 혜성같이 서예 분야에 등장한 것이다. 하지만 국전 대상에 오르기까지 남모르는 갈등과 좌절, 번뇌의 시간을 보냈다.



  “1979년부터 10년 가까이 국전 등의 공모전에 작품을 냈지만 수상보다는 낙선이 더 많았어요. 1980년대 중반부터는 새로운 서예, 추상미술을 시도하며 공모전에 참가했지만 보기 좋게 떨어졌죠. 어린 나이였으니 자만도 있었을 겁니다. 나는 왜 안될까 하는 생각에 1988년에는 한동안 서예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적도 있었어요.”


  그는 국전 대상으로 전통서예의 정점을 찍고 이후 현대서예라는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1991년 4월 동아미술관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반응은 극과 극이었다. “서예계에서는 돌았다, 미쳤다, 서예를 망친다고 하고 미술계에서는 신선하다, 재밌다 하며 관심을 가졌습니다. 플레이보이지와 같은 잡지 일부를 화선지 위에 복사해 먹작업을 하는 식이었어요.”
이듬해 11월 송아당화랑에서 두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문자를 모르더라도 단어를 보면 느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기표와 기의의 합일’에 대한 실험과 연구였어요. 단어와 동양의 상형문자 그 두 가지를 가지고 저 혼자의 내면 세계로 끌고 갔죠.” 소쉬르의 기호학을 연구하는 지역의 한 대학 교수는 그의 작품을 연구논문사례로 이용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서예와 회화가 공존하는 ‘신문인화’ 형식으로 나아갔다. 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하고 서예로 전향한 그답게 작품은 회화와 서예, 전통과 현대를 자유자재로 넘나들었다.



  “전시장에서 저것을 어떻게 서예라고 하느냐, 혹은 작품이 너무 난해하다 등의 이야기를 들을 때가 많습니다. 그때마다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라고 얘기합니다. 인상파 화가들에 의해 우리는 사물을 밝게 볼 수 있게 되었고, 피카소,브라크와 같은 입체파 화가들 덕택에 사물의 다양한 면을 알게 되지 않았습니까?”
  현대미술은 다양한 실험, 전위, 하이테크가 결합된 새로운 예술 세계를 선보이며 기존 미의 개념을 무너뜨리고,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고 있다. 현대미술의 이러한 흐름 속에서 서예는 어떠한가? “전 영역에 걸쳐 인접 학문을 모르고서는 학문을 할 수 없습니다. 전 인류적인 정보의 통합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서예 역시 유연한 사고와 더불어 타 영역과 적극적인교류를 통해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현대와 공존하는 새로운 대화 코드를 찾아야 할 때입니다.”


  그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매일 경북 청도 자택에서 대구 대봉동 작업실까지 출퇴근하며 작업한다. 한 획을 긋기 위해 만물의 기를 붓 끝에 모으듯 그는 하루에 두 차례 집중해서 작업한다. 오전 9시부터 정오까지,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사색과 명상과도 같은 작업은 수행과 다름없다. 그는 한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수십 번의 드로잉과 스케치과정을 거친다. 그런 발자취를 모은 스케치북만 50여 권이다.“분명 제가 가는 길은 남이 가지 않은 길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가는 길이 좋은 길이든 나쁜 길이든, 시대적 영향은 받겠지만 번뇌, 사색, 명상을 통해 계속해서 이 길을 갈 겁니다. 분명 가치 있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스케치 등을 담은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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