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갤러리 열
한국화 벗어나 추상회화로 변신
작품 속 ‘비행기’로 시간성 극복
시간 중첩에 화풍 속 색면은 고요
표현 도구는 합판·아크릴 등 다양
박형석 작 ‘Passing By’.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 첫 울음을 터트리는 순간부터, 쉼 없이 돌아가는 시간의 고리 속으로 빨려든다. 그렇다고 인간이 마냥 시간에 굴복하지 만은 않았다. 현재를 살면서도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설계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의식의 작용에 불과할 뿐, 과거와 미래의 시간 속에 실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역사 기록과 미래 설계로 시간의 한계는 극복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형석 작가는 시간여행자를 꿈꾼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넘나들며 시간과의 초월적인 삶을 꿈꾼다. 그것은 곧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초월이기도 했다. “시간여행자라면 100년의 삶을 1,000년의 삶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시간은 오랫동안 철학자와 예술가의 탐구영역이 돼 왔다. 시간은 인간 능력 밖에 존재하는 미지의 영역이지만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핵심 개념이어서 순응적인 자세로만 일관할 수는 없었다. 그가 시간을 사유의 주제로 삼은 근본적인 이유도 여느 철학자나 예술가들과 다르지 않았다. 다만 그가 탐구의 단초로 삼은 것은 ‘역사’였다. 유적지나 박물관에서 고구려 벽화나 삼국시대의 도자기를 자주 접하면서 시간 탐구의 대상으로 역사에 주목했다.
“역사 속 유적지나 유물을 접하면서 과거의 유물들과 영적인 교감을 나누고 싶다는 열망이 꿈틀댔습니다.”
인간이 역사를 기록하고 기억하는 것은 잘못된 역사를 반성하고 개선하기 위함이다. 역사는 현재를 살아가는 인류에게 삶의 방향을 제공하는 나침반 같은 역할을 한다. 기록된 역사는 단순한 과거의 보존이 아니라, 현재를 성찰하고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한 단초로 기능하게 된다. 그에게도 역사는 지혜의 보고로 인식됐다. “저에게 역사는 과거의 수많은 시행착오들이 깨달음의 원천이자 지혜의 보고입니다.”
그림의 주제를 시간이라는 개념으로 대체하자 화풍도 그에 따라 변화했다. 한국화를 전공하고 수묵화에 집중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추상회화로의 변신을 시도했다. 추상적인 개념인 시간을 다루면서 동양의 전통 풍경을 그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그의 화폭에는 시간이 중첩되기 시작했다. 현재와 과거와 미래가 색면의 형태로 묘사됐다. 작품 ‘시간여행자’ 시리즈의 탄생이었다. 이 시리즈는 현재 아트갤러리 열에서 진행되는 그의 개인전에서 만날 수 있다.
‘시간여행자’ 시리즈에서 유일하게 구상적인 형상도 포착된다. 비행기다. 비행기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넘나드는 작가 자신에 대한 은유적인 상징이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모호한 화폭을 비행기가 종횡무진 날며 제한적인 시간성을 극복하고 있다. 그것은 곧 인류가 도달할 수 없는 무한의 시간에 대한 경험이자, 시간에 대한 새로운 지평 열기였다.
시간의 중첩으로 형성된 화폭 속 색면은 고요하고 정적이다. 그러나 고요를 깨트리며 비행중인 비행기에선 끊임없는 변화와 움직임이 포착된다. 그가 “정중동(靜中動)”을 언급했다. 그 속뜻은 정(靜)과 동(動)에 대한 조화였다. ‘정중동’은 동양철학의 핵심 개념이다. 유교에서는 ‘겉은 조용하지만 속은 활발한 이상적인 인격’을 강조했고, 불교에서는 명상 할 때 몸은 정적인 상태지만, 내면에서는 깊은 통찰과 깨달음이 일어난다고 했다. 그리고 도교에서는 “고요함 속에서 자연의 이치를 따르는 것이 곧 움직임이다”라고 했다.
동양의 예술과 문학에서 정중동의 개념은 유의미하게 다뤄졌다. 서예와 그림에서는 정적인 여백(餘白)에 보이지 않는 생동감을 부였고, 음악에서는 감동 포인트로 정적인 부분과 움직이는 부분의 조화를 포착했고, 건축에서는 고요한 사찰이나 정원의 변화를 자연과의 조화 속에서 찾았다. 일과 휴식의 균형을 강조하는 현대인의 생활패턴에서도 정중동의 철학은 엿보인다.
“정중동은 단순한 철학으로만 기능하지 않았습니다. 삶을 바라보는 태도이자 균형을 찾는 방법이었습니다. 저는 겉으로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며, 진정한 힘과 변화는 고요함 속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추상색면 회화에서 서술하고자 했습니다.”
그의 화면에선 무한히 영속되는 시간만 존재한다.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시간들이 정중동의 기윤으로 묘사된 결과다. 그것은 곧 깊이에 대한 이야기와 일맥상통했다. “시간의 깊이를 어떻게 묘사할 것인지”는 그에게 주어진 과제였다. 해결책은 중첩이었다. 억겁의 세월동안 지구상에 수많은 생명들이 생멸을 거듭했고, 존재들이 살다간 에너지는 지구에 그대로 살아 숨 쉰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이번 전시 제목은 ‘스친다(Passing by)’다. 지구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시대를 달리하며 살았고, 그 인연들은 서로 스치고 갔다는 의미가 내포됐다. 그 수많은 호흡들의 스침을 그는 중첩의 방식으로 묘사됐다. “지구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생존했고, 그들이 스쳐간 기운들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지금도 지구에서 돌아간다고 믿습니다. 그 믿음을 중첩의 방식으로 시각적으로 표현했습니다.”
그의 추상은 선과 면을 기본으로 한다. 하지만 물성이나 표현법에서는 자유로움을 추구한다. 한지와 먹 일변도에서 벗어나 나무 합판을 사용하고, 동양화 물감인 분채에 서양의 아크릴 물감을 혼합한다. 비행기 또한 철사로 입체적인 선으로 구현하고, 물감을 중첩한 표면도 도구로 긁는 방식으로 선적인 요소들을 끌어들이고, 완성 직전의 표면에 흰색을 바르고, 반듯한 면 대신 삐딱한 면을 묘사한다. 이 모든 선택들 이면에 자유를 향한 그의 갈증이 녹아있다.
“세상은 반듯반듯한 것을 추구하지만 저는 자유롭고 싶었습니다.” 아트갤러리 열에서의 박형석 개인전 ‘스친다’는 30일까지.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