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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평론

김수영의 그림편지_ 박형석 作 ‘어해화’
아트코리아 | 조회 1,491
 
영모화·화조화 등 한국 전통화의 재해석 몰두…덧칠 통한 오묘한 色으로 친근감과 깊이를 더하다
영남일보 2018-01-26 김수영 기자

 
 
 
미국의 심리학자 알버트 메라비안은 “첫인상은 만나는 3초 안에 결정되어 이후에도 계속해서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첫인상이 중요하단 말이지요. 저 역시 그 말에 동의합니다.

팸플릿 등을 통해 사진으로만 봤던 박형석 화가의 그림을 최근 이런저런 기회가 돼 몇차례 직접 보게 됐습니다. 팸플릿을 통해 본 작품은 아기자기하고 약간은 어설픈 듯한 분위기가 풍겼습니다. 커다란 캔버스에 꽃 한 송이, 고기 한 마리 등을 그냥 쓰윽 그려놓은 느낌이랄까요. 솔직히 무언가 감상자를 단박에 사로잡거나 압도하는 느낌은 별로 들지 않았습니다. 작가가 들으면 유쾌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냥 평범히 흘려보낼 수도 있는 그림이었지요.

하지만 그의 그림을 갤러리에서 본 뒤 연이어 그의 작업실에서 보고는 섣부른 판단이었음을 알게 됐습니다. 첫인상은 참 괜찮았는데 만날수록 실망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처음에는 별로였지만 만날수록 정이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그림은 후자라 할 수 있을 듯합니다.

팸플릿 속 사진으로 봤을 때 단순해 보이던 그의 그림을 직접 보니 아주 세밀한 손맛이 정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많은 덧칠로 인해 만들어진 오묘한 색상들이 특히 친근감과 깊이를 만들어냈습니다. 사진이 이 같은 그림의 섬세함을 미처 잡아내지 못한 것입니다.

작업실에서 여러 작품을 보다 보니 자연스럽게 화면 속에 자주 등장하는 꽃과 고기의 의미가 궁금해졌습니다. 경주에서 태어난 박 작가는 지리적 환경 때문인지 어릴 때부터 역사에 관심이 많았답니다. 남산을 비롯해 불국사, 석굴암 등을 자주 찾았기 때문이었지요. 그래서 늘 역사서를 끼고 살았고 지금도 새로 나온 역사서적이 있으면 틈나는 대로 읽습니다.

“아마 한두 달에 한 권 이상 읽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우리 역사에 흥미를 느껴서 읽었는데 어느 정도 읽고 나니 책을 비교 분석하는 재미도 있었습니다. 같은 사건이라도 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전혀 다른 것이 많으니까요.”

이 말을 들으니 최근 개봉됐던 영화 ‘남한산성’이 문득 떠오르더군요. 조선 병자호란 때 청의 대군이 공격해오자 임금과 조정은 적을 피해 남한산성으로 가고 여기서 대신의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됩니다. 순간의 치욕을 견디고 나라와 백성을 지켜야 한다는 편과 청의 치욕스러운 공격에 끝까지 맞서 싸워 대의를 지켜야 한다는 편이 맞서지요. 같은 상황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그는 이런 역사적 사실이 흥미롭기도 하지만 우리 역사의 뼈저린 아픔이 책을 놓지 못하게 한다고 합니다.

“우리 역사를 보면 처절함이 느껴집니다. 늘 침략당하면서도 이에 굴하지 않고 찬란한 문화를 일궈 현재의 발전된 모습까지 보여준 데서 자부심도 느낍니다. 가슴 아프면서도 위대한 민족의 저력을 느끼지요. 파란만장한 역사를 보면 만감이 교차하는데 위대한 선조의 정신과 그 유산을 그림으로나마 보여주고 이어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전통화인 영모화(새, 짐승 등을 소재로 한 그림), 화조화(꽃과 새를 그린 그림), 어해화(물에 사는 동물을 그린 그림) 등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데 몰두했습니다.

박 작가는 20년 전쯤 공황장애를 앓고 나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작업하는 방식이 많이 달라졌다 했습니다. 10년 넘게 작업실을 같이 쓰던 친구가 갑자기 세상을 등진 뒤 병명도 모른 채 7~8년간 엄청난 정신적 고통 속에 살았습니다. 나중에 병명을 알고 치료받은 뒤 제2의 삶을 살고 있다고 합니다.

“이 병을 앓기 전에는 그림에 미쳐 2~3시간만 자고 작업했습니다. 육체적인 고갈 상태에서 친구의 죽음이 정신적 충격을 주니 몸과 마음이 버티지를 못했나 봅니다. 병이 낫고 난 뒤에는 작업도 여유 있게 하고 나보다는 타인을 앞에 두며 비워가는 삶을 살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작업도 변해갔습니다. 복잡했던 선과 면이 단순해지고 화려했던 색상도 깊고 무거워졌지요. 그동안 꾸준히 비워낸 때문일까요. 구상화에 가깝던 그의 작품이 비구상을 넘어서 추상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공황장애를 앓는 동안 작업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손으로 작업한다고 여겼던 무의식적인 믿음이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작업은 마음에서 나오지요. 다만 손을 빌려서 표현할 따름입니다.”

이쯤 되니 그의 작업이 새롭게 보였습니다. 첫인상도 중요하지만 볼수록 매력적인 것이 있지요. 바로 그의 작품이 그러했습니다. 곰삭은 김치나 된장의 맛, 그것을 느꼈습니다.

주말섹션부장 sykim@yeongnam.com[Copyrights ⓒ 영남일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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