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박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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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일보 문향만리 / 박숙이 「바다여인숙에서」 / 김동원 시인·평론가 / 2025.5.12
아트코리아 | 조회 50
대구일보 문향만리 / 박숙이 「바다여인숙에서」 / 김동원 시인·평론가



바다여인숙에서

 박숙이
 

  나를 바다여인숙까지 끌고 간 것은, 그래 그건 순전히 몰락이었다 내가 몰락을 순순히 수락한 것도 바로 그 바다여인숙의 첫 밤이었다 그러므로 이제 나는 몰락과 한 몸이 된 셈이다 수락하고 보니 이렇게 편할 수 있는 걸, 내 자신을 왜? 짐승처럼 피해 다니기만 했을까, 허름한 불빛이 허름한 生을 감싸줄 수 있을 것 같은, 천 날 만 날 물안개에 싸여 나처럼 글썽이는 바다여인숙, 썰물에 쓸려쓸려 눈치 하나는 빨랐다 무엇보다 나는 늙그마한 숙박계의 뱃고동 같은 퉁명한 친절이 덥석,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생각된다 귀가 늙은 숙박계는 귀신같이 갈매기들의 몸부림을 손바닥 보듯이 훤히 다 들여다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바다는 대충 몇 시부터 잠에 곯아떨어지는가에 대하여, 몇 시쯤이면 동해가 해를 머리에 이고 일어서는가를, 그리고 나는 열쇠 없이도 드나들 수 있는 창이 있는 바다 한 칸을 부탁하기도 했다 내가 바다에게 몸을 맡기고 있을 동안은 몰락은 잠시 나를 피해 어디론가 꼭꼭 숨어버렸다 새벽까지도 내 가슴에 등대처럼 환히 불이 켜져 있었던 걸 보면, 밤새도록 파도소리가 나의 살갗을 파먹도록 다만 나는 몰락하는 달빛만 아름답게 지켜보고 있었다 나 또한 그랬으면 하고, 바다여인숙처럼 홀랑 벗은 채

 
출전 : 시집『활짝』(2011, 시안)

 
〈작품 해설〉그녀의 시는 ‘들춤’의 은유다. 확 싸지르는 불씨는, 몸의 안쪽과 바깥을 통해 관음(觀淫)한다. 요컨대 박숙이(1955~, 경북 의성 출생)는, 전혀 다른 명사 두 개를 시제(詩題)로 멋지게 합치하였다.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바다’와 ‘여인숙’의 낯선 공간은, 아이러니하게도 모던한 궁합을 낳았다. 표면적으론 에로틱erotic하지만, 이면엔 내면의 어둠이 치열하게 갈등한다. “나를 바다여인숙까지 끌고 간 것”이 “몰락”이라니, 이 얼마나 멋진 상상력인가! 시의 첫 행은 하늘이 내린다는 말이 있듯, 그녀의 언어유희는 적확하다. “내가 수락한” 한밤중 “바다여인숙의 첫 밤”은 야한 신음이 들린다. 이런 소리 은유는 “몰락과 한 몸”이 될 때 증폭된다. “허름한 불빛” 속에서 “내 자신”을 벗어버린 가쁜 호흡은 카타르시스를 준다. 그녀의 행간은 심리적 긴장과 팽창으로 다겹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내 마음을 사로잡”은  “늙은 숙박계의 뱃고동 같은 퉁명한 친절”은 공감각적이다.「바다여인숙에서」는 함께 잔 ‘남자’가 없지만, ‘수락과 몰락’을 통해 은밀히 암유된다. “몸을 맡”긴 바다는 ‘남성’의 은유이면서도, “창”을 통해 그 비밀스런 행위를 다 지켜본 주체이기도 하다. 이런 ‘낯설게 하기’ 시법은 독창적 내재율로 빛난다. 그녀는 전시대 서정시의 기법을 흡수하면서도, 전혀 새로운 ‘바다 이미지’를 창조하였다. “바다여인숙처럼 홀랑 벗은 채” 그녀는 “달빛”이 “아름답게 지켜”보는 그 시간에, 그녀만의 에로틱한 시법을 절묘하게 보여 주었다.(김동원 시인·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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