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7    업데이트: 21-12-14 13:49

법문 한자락

다섯 번째 법문 한 자락...정선스님 入山記(입산기)
관리자 | 조회 239
 
다섯 번째 법문 한 자락...정선스님 入山記(입산기)
 
- 伽倻山 海印寺(가야산 해인사)에 入山(입산)하다
 

 

 
戒香 定香 蕙香 解脫香 解脫知見香
 
光明雲臺 周徧法界 供養十方 無量 佛法僧
 

 
獻香眞言
 
옴 바아라 도비야 훔
 
......................................................나무아미타불!(목탁송)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
 
광명운대 주변법계 공양시방 무량 불법승
 

 
헌향진언
 
옴 바아라 도비야 훔
 

 

 
오늘은 가슴에 품어있던 가족사 일과 옛 追憶(추억)을 지금에 와서 이야기합니다.
 
문화 예술의 고향 밀양에서 태어나 시골의 평범한 가정으로 아버님은 敎職(교직, 선생님)에 계셨고 어머님은 일찍 병고로 인하여 초등학교 5학년 때 세상의 인연이 다하였습니다. 위로 형님 세 분이 계셨고 아래로는 여동생이 있었지만 나는 죽음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었기에 어머님이 돌아가셨어도 천지를 모르고 동네에서 뛰어놀았습니다. 마침내 3일 상 나가는 날 구슬픈 곡소리가 울려 퍼지고 상여가 나가자 그때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나와 여동생은 상여를 붙들고 울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한번 가신 어머님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금방이라도 살아서 오실 것 같았는데 돌아가셨다고 하나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형제가 다 힘든 시기지만 막내 여동생이 고생을 많이 하여 지금 생각해 보면 마음이 짠합니다.
 
어머님이 생활환경에서 사라지자 불안함과 두려움과 외로움이 싹트기 시작하였고 그 외로움과 고통이 나의 성격을 변하게 하였고 마음속은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일 년쯤 지날 무렵 거창에서 선생님을 하시던 얼굴이 예쁜 새어머니가 집으로 오셔서 인사하게 되었습니다. 새엄마가 와서 처음에는 분위가 밝아졌습니다. 예쁜 새엄마가 좋아 동네에 자랑하며 살았는데 그 건 잠시였습니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고 사춘기에 접어들자 조금씩 가정에 불만이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새엄마는 선생님을 하시다 보니 잔소리가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그것이 싫었고 반항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옛날 어머님이 생각나서 늘 비교하게 되었으며, 사사건건 이해가 맞지 않아 반항과 반목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나는 늘 밖으로 돌기 시작하였고, 새어머니가 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아닌데 사춘기 시절에는 힘들었습니다.
 

 
세월은 흘러 고등학교 1978년 여름 방학 때에 친구가 海印寺(해인사)로 공부하러 가지 않겠느냐고 제의해 왔습니다. 그러하지 않아도 마음이 늘 복잡하고 번민이 많아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는데, 나한테는 반가운 얘기이니 바로 승낙하고 다음 날 대구에서 고령 비포장 길을 온종일 버스를 타고 해인사로 가고 있었습니다.
 
버스정류장에서 얼굴이 옥같이 깎아 놓은 듯 반듯하고 눈빛이 맑은 스님이 올라탔습니다. 친구는 스님이 오시는 것을 보고 즉시 자리를 양보하면서 앉을 것을 권했는데, 처음에는 사양하는 듯하더니 이내 자리에 앉아서 어디에 가느냐고 우리에 물었습니다
 
“해인사로 가는데 절에서 공부할 수가 있습니까 ? ”
 
“큰 절에서 공부하는 것은 도 닦는 것뿐인데... 학생들은 할 수 없어.”
 
“절에서 있을 수 있다면 아무거나 좋습니다.”
 
아무래도 의심이 있었는지 혀를 차는 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스님은 우리를 데리고 해인사 본당으로 들어가더니 행자들이 수행하는 행자실로 안내하고는 어디론가 가버렸습니다. 두려웠지만 바로 행자 반장님이 들어와 이런저런 기본적인 것을 묻고는 행자복 한 벌 주고는 입고 있던 옷과 소지품을 모두 내놓으라고 하고는 후원 부엌 아궁이에 불살라 버렸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공부하러 왔다가 이제는 집에도 가지 못하고 꼼짝없이 해인사에서 살게 되었으니 큰일이었습니다. 그런 생각도 잠시, 반장은 우리를 데리고는 공양간으로 가더니 한구석에 세워 놓고 그대로 있으라고 하였습니다. 손은 叉手(차수)를 하고 두 눈은 반쯤 감은 채로 공양간에서 菜供(채공)을 하는 행자님들이 어떠한 일을 하는지 분위기를 잘 보라며 세워 두었는데 새로운 생활이 두려웠습니다. 이윽고 일과를 마치고는 모두 행자 방으로 모였는데 큰방이 가득 찼습니다.
 
반장님은 우리에게 행자 방에서 지켜야 할 規律(규율), 律法(율법)을 알려 주었는데 무조건 대답만 하고 주위를 돌아보니 나보다 어린 행자, 국민학생, 중학생들이 수두룩했습니다.
 

 
반장은 여러 행자님께 인사를 시키고는 바로 初發心 自警文(초발심 자경문)을 외우는데 나이가 많은 이나 적은 사람이나 모두 한 마음으로 한 음률로 讀誦(독송)을 하는 것이 너무 좋아 보였습니다. “여기가 바로 극락이고 부처님 계신 常住道場(상주도량)이로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우린 책을 보면서 따라 읽기 시작했습니다.
 
좋은 생각도 잠시, 경을 강하는 중강 스님이 점검을 받기 시작했고 행자님들은 외운 내용을 받치기 시작했는데, 못 외우는 행자님에게는 죽비로 경책을 내렸습니다. 또 낮에 후원에서 있었던 일과에 대하여 점검하고 선배가 후배에게 또는 스스로 참회(自恣悔 자자회)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분위기가 참으로 삼엄했습니다.
 

 
삼경이 되어 大寂光殿(대적광전)에서 종소리가 나더니 불을 전부 꺼서 조용히 누웠으나 잠은 안 오고 갑자기 고향 생각, 부모 형제 생각에 나도 모르게 가슴이 저며와 눈물이 났습니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어느 순간 비몽사몽간 헤매고 있는데 돌아가신 어머님이 나타나 슬픈 모습으로 바라보고는 나를 앉히시더니 그것도 잠시 어머니는 멀어져 갔습니다. 나는 울면서 어머니를 따라 올라갔습니다. 그때 행자 방에서 죽비 소리가 나서 일어났는데 새벽 2시 30분이었습니다. 일어나자마자 묵상에 들어가더니 3시가 되자 도량 송 목탁 소리 울려 퍼지고 죽비소리에 맞추어 모두 세면을 하고 새벽 예불을 준비했습니다. 친구와 나는 그들을 따라 세수하고 서로 눈빛만 교환한 채 아무런 말 없이 줄줄이 줄을 맞추어 大寂光殿(대적광전)으로 가서 고참 순서대로 자리에 앉자 그 뒤를 따라 스님들이 들어와 앉았습니다.
 

 
세상은 하루하루가 바쁘게 지나가고 있고
 
사람들의 마음 또한 세상을 따라 움직이고 있네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도 번거로웠으며
 
입산 출가 또한 조사 관문이 아니겠는가!
 
................................咄!
 

 
가야산 계곡물이 시원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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