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7    업데이트: 21-12-14 13:49

법문 한자락

​정선스님 법문 한 자락
관리자 | 조회 271
정선스님 법문 한 자락
 

 

 
제1부 서문
 
정선스님 法門(법문) 한 자락
 

 
偶然(우연)한 기회에 幸運(행운)이 찾아온다는 것은 이치에 맞는 말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갑자기 행운이 찾아오는 것도 아닙니다. 因(인)을 지었으므로 緣(연)이 있고 因緣(인연)이 있으므로 그 果(과)가 있는 것입니다. 행운이 찾아왔다는 것조차도 모두 과거에 因果(인과)를 지은 것이 현재에 이르러 나타난 현상일 뿐이지 그냥 생긴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이 이르시기를 이 세상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다고 했던 것입니다.
 

 
일전에 初心(초심)으로 가는 旅行(여행)으로 初發心自警文(초발심자경문)을 편술, 강의를 선보인 바가 있는데, 山門(산문)에 처음 접할 때의 그 감정과 講院(강원)과 禪房(선방)에서 修行(수행)했던 추억, 그리고 불교대학과 대구 성취선원, 해인사 도솔암 창건, 용탑선원 주지, 현재 길상사 창건에 이르기까지 포교 전선에서의 감회가 새롭습니다.
 
지나고 보니 20대와 30대 때는 강원과 선방에서 修行精進(수행정진)에 邁進(매진)하였고, 40대는 불교대학, 장학회, 다도회, 자비회 등 대구불교 지역사회를 위한 포교(布敎) 일선에 섰습니다. 이어 50대는 취미로 하던 서예, 문인화를 열정적으로 지도, 강의, 전시하며 나름대로 대중에게 얼굴을 알리게 되었습니다.
 

 
이제 육십갑자(六十甲子)를 넘어 모든 인연을 뒤돌아보면서 지난날 法門(법문) 자료를 기록으로 남기고자 “‘法門(법문) 한 자락”을 출판·전시하게 되었습니다.
 
본문에서는 초하루 법문과 地藏齋日(지장재일) 법문, 四大齋日(사대재일) 행사 등을 포함해 큰스님과의 선문답, 修行談(수행담), 信仰干證(신앙간증), 靈驗談(영험담), 강원과 선방에서의 회고 일화, 큰스님을 시봉하던 책임감, 포교 전선에서의 일화를 소소하게 담아놓았으니 포교사님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큰스님 말씀에 “처음 입산할 때 그 마음 아직도 가지고 있느냐”고 묻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럴 땐 제 머리를 스스로 만지고는 계면쩍어하지요.
 

 
90년대 중반, 해제 철을 맞아 행각을 할 때 저를 지도하던 옛 스승 강주 스님이 생각났습니다. 스님은 오랫동안 강원에서 주석하면서 후학을 지도하셨는데 무슨 일인지 대중을 떠나 홀로 산속으로 들어가 토굴 생활을 하면서 살고 계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지리산 깊은 곳에 움막을 짓고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는 물어물어 찾아갔습니다. 날이 저물어 동네 사람에게 물으니 여기서 걸어서 한 시간 정도 올라가면 도인이 수행, 정진하신다고 합니다.
 

 
날은 저물어 어두컴컴한데 저 멀리 움막에 호롱불 하나 은은히 켜져 있어 다가가니 스님께서는 參禪(참선)을 하고 계셨습니다. 하도 괴이하여 큰절을 올리고는
 
“스님! 대중을 떠나 홀로 수행한다는 것은 부처님 법을 어기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여쭈었더니, 스님께서는
 
“본래 태어날 때도 혼자였고 죽을 때도 혼자인데 부처님께서도 자명등(自明燈)이라 하지 않았는가?” 그리고는
 
“부처님 법에 어리석은 사람과는 같이 가지 말고 홀로 여여히 가라고 했으니 부처님 법을 어기는 것도 아니다.”하고는 말씀이 없었습니다.
 
한동안 침묵이 흐르는 속에 나는 큰스님께서 무슨 말 못 할 사정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대중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던 큰 스님이 움막을 짓고 외롭게 수행하고 있는 것이 뭔가 있을 것 같아 나는 며칠을 같이 수행하기로 하고 土窟(토굴)에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니 묵묵히 參禪(참선)을 주로하고 틈틈이 뭔가 經(경)을 외우셨습니다. 들어보니 행자님들이 처음 절에 들어와서 공부하는 初發心自警文(초발심자경문)이었습니다.
 
지혜와 덕망(德望)이 높은 스님께서 하루를 시작하는 예불을 올리고 참선하고 경을 외우면서 낮이고 밤이고 수행하시길래 그 모습이 너무나도 괴이하여 시간 내어 물어보았습니다.
 

 
“큰스님, 수많은 경전 가운데에서 왜 하필 초발심자경문을 외우고 계십니까? 금강경, 능엄경, 원각경 화엄경. 조사어록, 전등록 등이 있지 않습니까?”
 
스님께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말했습니다.
 
“初發心變正覺(초발심자경문)이라. 初發心(초발심)의 마음이 正覺(정각)의 마음이요.
 
처음 출가할 때의 마음이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으면 바로 正覺(정각)으로 가는 길인 것을 알기 때문이지.”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큰 깨달음을 얻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큰절을 올렸습니다.
 
누구나 하는 얘기일 수 있으나 실제 바로 와 닿고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 다시 초발심자경문을 접하고 다시 깨닫게 되었으니 전생에 因緣(인연)이 없었다면 어찌 큰스님을 만날 수가 있었겠으며, 전생에 숙연이 없었다면 어떻게 神妙(신묘)한 글귀를 다시 접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
 
저에게는 평생의 話頭(화두)요 精進(정진)의 길입니다.
 

 
본문 내용에서 인용한 것이지만 서른일곱 법문 한 자락 중 큰스님과의 법거량 대화, 수행, 득도, 일화 등을 서술한 것이고 상단법문은 초하루, 지장재일, 사대명절, 처음 교당을 운영하며 불교대학과 기도 중 일어난 가피 신도님의 신앙간증, 영험담을 수록하고 서예관련 부문은 일기형식의 기록을 남겼습니다.
 

 
何名爲經이요 經者徑也니라
 
하명위경이요 경자경야니라
 
................................咄!
 

 
경이란 무엇인가? 경이란 길이니, 부처가 되는 길이다.
 

 
무릇 중생이 이 길로 일고자 하면 응당히 자경문을 닦아야 究竟涅槃(구경열반)에 이른다. 만약 능히 외우고 말하기만 하고 마음으로 의지하여 행하지 않으면 자기 마음에 경이 없음이요. 실답게 보고 실답게 행하면 자기 마음에 경이 있음이니 부처에 이른다.
 

 
불기 2565년 8월31일(수능엄신주 7독 7년 기도 중)
 
大邱 師子窟 吉祥寺 住持 沙門 心虛堂 定禪 合掌
 

 

 

 

 

 
첫 번째 법문 한 자락...
 
마음이란 실체가 없다
 

 
爾喜我不喜요 君悲我不悲라
 
鴈思飛塞北하고 燕憶舊巢歸로다
 
秋月春花無限意를 箇中에 只許自家知니라
 
.....................................................나무아미타불!(목탁송)
 

 
이희아불희요 군비아불비라
 
안사비새북하고 연억구소귀로다
 
추월춘화무한의를 개중에 지허자가지니라
 

 
너는 기뻐도 나는 기쁘지 않고
 
그대는 슬퍼도 나는 슬프지 않다
 
기러기는 북쪽 변방으로 날아갈 것을 생각하고
 
제비는 옛집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도다
 
가을 달과 봄꽃의 무한한 뜻은 (본래의 참모습)
 
그 속에서 다만 스스로 아는 것을 허락할 뿐이로다
 
..............................................................탁!탁!탁!(주장자)
 

 
너와 나, 그대와 나는 본래 부처님 자리에서 오늘을 수행하는
 
今時人(금시인)을 향해 이르노니 네가 능히 내려와 머물면 마음이 기뻐하고,
 
능히 내려와 머물지 아니하면 마음에 슬픔과 근심이 생긴다.
 
그러나 나의 이 세계(본분사=본래 부처님 자리)는 본래 스스로 맑고 고요해서
 
어지럽거나 정돈됐다든지 하는 것이 없으니
 
무엇에 기분이 상하고 무엇에 기뻐하리.
 
움직이는 本分人(본분인)의 그 마음(변화하는 마음)은 무엇인가 ?
 
...........................................................突!
 

 
마치 기러기가 저 북쪽을 생각하는 것과 제비가
 
옛집을 생각하는 것과 같으니 어찌 기쁨이나 슬픔으로 마음을 삼겠는가?
 
다만 공(空)이 있어 오고 감이 자유로울 뿐이로다
 
.............................................................나무아미타불!(목탁송)
 

 

 
중생의 마음은 그 누구도 알 길이 없습니다. 옛말에 샘물의 깊이는 잴 수 있어도 사람의 마음은 잴 수가 없다고 합니다.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마음을 잡을 수만 있다면 중생은 고민거리가 없을 것으로 생각되며, 누구나 다 행복을 이룰 수 있고 이 세상이 즐거울 것입니다.
 
山僧(산승)으로 선방에서 문고리를 잡고 마음속의 움직임을 관찰해 보았지만 하나가 잡히면 또 하나가 나타나고 의문에 의문이 더하여 나중에는 혼돈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환히 밝기도 하고, 내가 나를 잊는 무아의 경지를 맛보기도 합니다. 그 잠깐의 순간을 맛보기 위해 또 정진하고 씨름하며 선방에 골똘하던 때가 순수하고 가장 해맑았습니다. 지금도 그 시절이 그리울 때가 많습니다.
 

 
그렇게 정진하지 않으면서 서예를 한다, 그림을 그린다, 衆生 功德(중생 공덕) 베푼다는 것은 전부 핑곗거리일 뿐이고 인연의 고리가 왜 그리 많은지 여태 놓지 못하고 포교라는 방편(중생 공덕)으로 사는 내 모습에 부끄러울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때가 되면 산으로 간다는 그 신념 하나는 굳건히 간직하고 있음을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모든 것에는 실패도 있고 혼돈도 찾아오고 성공도 있습니다만 그 실타래를 풀어보니 결국은 因緣法(인연법)이란 것을 깨달았습니다.
 
정신과 육체에서 일어나는 작용과 의식의 상태, 이 모두가 緣起(연기)의 法則(법칙)이니 마음의 변화도 사물의 변화도 인생도 신앙도 그러합니다.
 
이놈의 마음을 움직이는 그놈이 무엇일까 ?
 
마음을 움직이는 실체는 무엇일까 ?
 
답은 역시 인과 연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선사들은 인간의 궁극적인 실체는 무엇일까 ? 에 대해 입에 침을 튀겨가며 法擧量(법거량)을 합니다.
 
종교학자들도 육체가 없으면 정신도 없다, 물질은 사라지지만 정신은 영원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차를 마시는데 찻잔이 없으면 찻물도 없다는 말과 같이, 인간의 궁극적 실체는 육체를 구성하는 물질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불교도 육체란 인간의 영혼을 담는 그릇에 불과하므로 육체는 소멸해도 영혼은 불멸한다는 영혼불멸론 및 유심론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영원불멸하고 윤회하기 때문에 착하게 살기를 권하고 수행을 권합니다.
 
부처님께서 竹林精舍(죽림정사)에 계실 때 선을 닦는 수행자끼리 공부하다 의문이 생겨 법거량을 하다가 고참인 사리불에게 묻습니다.
 
“존자께서는 늙음과 죽음을 누가 만들었다고 생각합니까 ? 자기가 만든 것입니까 ? 아니면 남이 만든 것입니까? 아니면 아무 원인 없이 만들어진 것입니까 ? ”
 
사리불이 말하기를
 
“내가 생각하기에 늙음과 죽음은 누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또 원인 없이 만들어진 것도 아닙니다. 다만 태어남을 연연하기 때문에 늙음과 죽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하다면 늙음과 죽음이 일어나는 정신과 육체는 누가 만든 것입니까 ?
 
자기가 만든 것입니까? 남이 만든 것입니까? 아무 원인 없이 만들어진 것입니까 ? ”
 
“정신과 육체는 누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의식이 因緣(인연)하여 생긴 것입니다.”
 
“그러면 의식은 누가 만든 것입니까? 내가 만든 것입니까? 남이 만든 것입니까? 아니면 아무 원인 없이 만들어진 것입니까 ? ”
 
“그것은 정신과 육체를 因緣(인연)하여 생긴 것입니다.”
 
“조금 전에 정신과 육체는 의식에 因緣(인연)하여 생긴다고 하였는데 의식이 정신과 육체에 因緣(인연)하여 생긴다니 무슨 뜻입니까 ? ”
 
사리불이 말하기를
 
“여기 세 개의 갈대가 있다고 합시다. 이 갈대가 땅에 서려고 하면 서로서로 의지해야 합니다. 만일 하나가 없으면 둘은 서지 못하고, 둘이 없어도 하나는 서지 못합니다. 의식이 정신과 육체를 의지하는 것이나 정신과 육체가 의식을 의지하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대화의 내용을 보아도 육체와 정신, 의식이 한 다발로 因緣(인연)하여 모인 것이 한 인간이며 根源的 自我(근원적 자아, 업의 유산)라고 봅니다.
 
모이면 存在(존재)가 構成(구성)되고 흩어지면 존재도 흩어질 뿐이므로 모든 것이 영원하다고 하는 실체적 자아가 없는 것입니다.
 
선방에서 문고리를 잡고 움직이는 마음과 씨름해 보아도 마음이란 실체가 없으며, 아무리 잡으려 해도 잡을 수가 없으니 기를 쓸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 몸속에 있는 참 자아를 맑힐 필요는 있습니다. 참 자아란 자기 부처이지요. 자기 부처는 가슴 깊은 곳에 있습니다. 無念無想(무념무상)의 도리는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저절로 깨닫고 체득해야 합니다. 기러기가 북쪽을 향해 날아가듯이, 제비가 옛집을 그리워하듯이,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눈이 오면 눈이 오는 대로, 좋으면 좋은 대로 해맑은 자기 마음을 표출하며 하나의 자연인으로 살아가는 참 지혜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는 잘나고 못남도 없으며, 계산도 없고 타산도 없으며, 무상한 도리를 깨달은 순수한 한 자연인이 있을 뿐입니다.
 

 

 
마음이란 영원하지 않습니다.
 
實物動(실물동)은 實體無(실체무)라. 움직이는 것은 실체가 없습니다.
 
眞理(진리)는 非動(비동)이라. 진리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영원한 것이 없다는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세상사의 모든 것은 변하며
 
변하기 때문에 무상하고 실체가 없는 것입니다.
 
실체가 없는 마음에 집착할 필요가 없으며
 
마음으로부터 진정 자유로워야 합니다.
 

 
나는 지금, 이 순간 마음에 집착을 놓았는가 ?
 
나는 지금, 이 순간 마음이 어떠한가 ?
 
나는 지금, 이 순간 마음은 편안한가 ?
 
.............................................................割!
 

 
問處孤高答處深하니
 
妙圓眞淨不須尋이라
 
虛空境界豈思量가
 
大道淸幽理更長이로다
 
.....................................................나무아미타불!(목탁송)
 

 
문처고고답처심하니
 
묘원진정불수심이라
 
허공경계기사량가
 
대도청유이경장이로다
 

 
묻는 곳도 높고 답한 곳도 깊으니
 
묘(妙)하고 圓滿(원만)하며 참되고 깨끗한 것을
 
모름지기 찾을 수 없어라.
 
허공과 경계를 어찌 생각으로 헤아리오 ?
 
대도(大道)가 맑고 깊어 그 이치 더욱 길도다.
 
..............................................................탁!탁!탁!(주장자)
 

 
불기 2553년 9월 26일
 
심허당 정 선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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