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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평론

[인연 .51 끝] 박남희 경북대 명예교수와 화가 류시숙 / 영남일보 / 2016-04-19
관리자 | 조회 644
“워킹맘이라 잘 통했죠”


경북대 안에 있는 ‘한·일 우정의 벽’에서 포즈를 취한 류시숙 화가(왼쪽)와 박남희 경북대 명예교수. 일하는 여성의 당당함이 느껴진다. 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뒤늦게 미술공부 시작한 류작가
박교수는 언제나 든든한 지원군

가정살림을 하면서 미술작업하는
여성 작가들의 고달픔 알고 있어
동병상련 마음으로 서로의 일 도와
스승과 제자지만 동지같은 느낌



지금은 세상이 변해 많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한국에서 여성, 또 어머니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것도 몇십 년 전에 직장생활을 하면서 한 가정의 주부로 살림을 도맡아 하고 육아까지 담당하면서 직장에서도 맡은 바 업무를 다하는 삶은 여러 가지 육체적, 정신적 어려움이 뒤따랐다.

대구가 고향인 박남희 경북대 명예교수(65)는 서울대학과 동대학원을 나온 뒤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미술을 좀 더 깊이 있게 공부했다. 귀국한 뒤 대구로 돌아와서 1980년대 초 대구가톨릭대를 거쳐 경북대 미술대학 교수로 임용돼 30여 년간 후진양성에 힘을 쏟다가 올해 초 퇴임했다. 1960년대 말 여성의 몸으로 서울로 공부를 하러 떠난 것은 물론 프랑스까지 유학을 다녀온 그의 삶은 그 당시 일반 여성들과는 약간 달랐다고 할 것이다. 그는 고향에 내려와서도 곧바로 직장생활을 하면서 한 가정의 살림꾼으로서, 직장인으로서의 우먼파워를 유감없이 보여줬다. 특히 대학에 몸담고 있으면서 경북대미술관 초대관장, 한국미술이론학회 회장, 경북대 디지털아트콘텐츠연구소 초대소장, 경북대 평생교육원장, 전국여교수연합회 회장 등을 맡아 왕성한 활동을 보여줬다.

“남들이 보면 어떻게 직장생활하면서 가정살림까지 그렇게 할 수 있느냐고 묻지만 사실 힘들다고 생각한 적이 별로 없었습니다. 열심히 일하는 게 즐거웠고 늘 바쁘다 보니 힘들다고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고 할 수 있지요. 쉽지 않은 삶의 길이었지만 그렇다고 결코 그 길이 싫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일중독자라고 하는데, 현재 직장생활을 하는 많은 여성들이 저와 비슷한 생활을 하고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요?”

서양화가 류시숙(54)은 박 교수의 이런 삶에 매력을 느끼고 그를 롤모델로 삼은 제자 중 한 명이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지만 대학 졸업 후 곧바로 결혼을 한 뒤 남편의 유학길에 따라나선 류 작가는 귀국한 뒤 그동안 남편과 자식 뒷바라지 때문에 미뤄왔던 창작활동을 하고 싶어서 경북대 미술대학원에 시험을 쳤다. 그러고는 그 이듬해인 91년부터 다시 그림공부를 시작했다. 류 작가는 대학원에 입학하면서 자연스럽게 박 교수를 만났다.

“교수님이 대학원에 입학하자마자 대학원생 몇 명을 데리고 세미나를 가셨습니다. 세미나에 저희를 이끌고 가서 참여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일하는 여성의 당당함과 적극성, 열정 등을 두루 느꼈습니다. 교수님이면 제자들에게 일을 시키셔도 되는데 모든 일을 교수님이 직접 처리해 나가셨습니다. 제자를 비롯해 다른 이를 대할 때의 겸손함, 소탈함 등도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한마디로 첫 만남에서 굉장히 상쾌하고 유쾌한 느낌을 주는 분이었지요.”

이런 류 작가의 마음을 알았을까. 박 교수는 나이가 들어서 다시 공부를 시작하는 류 작가에게 여러 가지 자극제가 될 만한 일들을 만들어주었다. 지역의 여류화가들이 모여 결성한 청백여류화가에 참여하라며 추천을 해줘 류 작가는 자연스럽게 그 모임에서 활동을 하게 됐다. 또 류 작가 등을 포함한 여류작가들이 모여서 여류100호라는 단체를 만들었는데 여기에는 박 교수가 적극적으로 참여해 모임 활성화에 큰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사실 제자뻘 되는 작가들이 모임을 하면 교수님이 동참하기가 쉽지 않은데 박 교수님은 여성의 힘을 보여주는 일이면 적극적으로 참여하셨습니다. 또 대학원생들이 일본과의 교류전을 만들어 히로시마대학에서 전시를 하는데 여기에 출품하시는 것은 물론 작품 포장, 설치 등을 제자들에게 시키지 않고 교수님이 손수 하시는 모습을 보고는 역시 대단한 분이란 생각을 했습니다.”

류 작가는 이처럼 존경심을 우러나게 하는 박 교수와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어서 학교생활이나 창작활동이 너무나 즐거웠다. 결혼과 동시에 집안일에만 몰두했던 그는 갑자기 바깥 활동에 너무 열성적이 되다 보니 남편과 자식들에게 미안한 마음까지 들 정도였다. 하지만 박 교수와 하는 여러 일들이 즐거웠고 자신이 작가로서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돼 이 일을 멈추기가 힘들었다. 그러던 중 2001년에는 류 작가가 미국교류전을 직접 추진했다. 오랫동안 미국에 살았던 류 작가는 영어에 능통하고 미국에서의 활동 폭도 제법 넓었던 터라 여성작가들의 활동 폭을 좀 더 넓혀보자는 취지에서 기획한 행사였다.

“교수님과 여러 가지 일을 하다 보니 저도 일하는 데 점점 자신감이 생겨 미국과의 교류전을 제의했는데 교수님이 두말 않으시고 추진하자며 힘을 실어주는 것은 물론 실질적으로 큰 도움도 주셨습니다. 교류전 첫해에 먼저 미국작가들을 초청했는데 교수님이 먼저 홈스테이로 작가들의 숙식을 맡아주셔서 참여작가들이 이에 다 동참했습니다. 지금까지도 이 교류전에서는 작가들이 오면 홈스테이를 하는데 그 틀을 박 교수님이 만드셨던 것이지요.”

이 말에 박 교수는 류 작가가 제안한 사업이 좋았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도와준 것이라고 답했다.

“예산이 빠듯했기 때문에 작가들을 홈스테이하게 해야 했는데 제가 보통 서너 명의 작가를 맡았습니다. 어떤 때는 방이 부족해 어머니 댁에까지 신세를 졌지요. 이렇게 해야 다른 분들이 아무 말 없이 홈스테이에 동참할 테니까요.”

이처럼 솔선수범하는 생활이 일상화된 박 교수를 보면서 류 작가는 그동안 주부로서의 삶에 충실한 채 꿈을 잊고 살았던 자신을 되돌아보는 기회를 가졌다. 그리고 화가로서의 삶을 새롭게 시작했다.

“박 교수님이 부럽기도 하고 저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가정 살림을 하면서 자신의 꿈을 갖고 그 일을 위해 매진하는 여성의 롤모델이 바로 박 교수님이었던 것이지요. 일하는 여성으로서 박 교수님의 최고 강점은 바로 외유내강입니다. 밖으로는 늘 웃고 화 한번 안 내시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씀하지요. 하지만 일을 추진함에 있어서는 남성보다 훨씬 추진력이 강하면서 고집스러움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류 작가를 늘 곁에서 지켜본 박 교수는 “가정살림 잘하면서 뒤늦게 화가의 꿈을 펼치려는 류 작가를 보고는 내 젊은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동병상련의 아픔을 느껴 더 잘 해주고 싶었는지 모릅니다”라고 말을 했다.

“류 선생은 좀 늦게 시작해서인지 젊은 학생들보다 훨씬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일만 한다고 가정일에 소홀한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늘 가졌습니다. 그런 모습이 안돼서 학교에서의 일이나 작가로서 활동에 제가 미력하게나마 도움을 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아이를 넷이나 키우면서 작가로서 활동하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으니까요.”

박 교수의 말에 류 작가는 “박 교수님이 없었다면 작가로서 활동을 재개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다시 한번 고마움을 표시했다. 박 교수는 류 작가의 작업에 대해서도 칭찬의 말을 던졌다.

“작가로서 오랫동안 활동하면 작업에서 매너리즘에 빠지기 십상이지요. 류 선생을 본 지 20년이 넘었는데 늘 작품에서 변화하고자 하는 의지가 느껴집니다.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진화해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진짜 괜찮은 작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러하니 제자가 더욱 사랑스럽고 도와주고 싶었을 것이다.

이들은 서로에게 인간적인 매력도 느꼈지만 가정살림을 하면서 작업을 하는 여성작가들의 고달픔이 서로를 더욱 강하게 묶어줬다. 그래서 지금도 박 교수의 일이라면 류 작가가 두말 않고 적극적으로 나서고 류 작가의 일에는 박 교수가 큰 힘을 실어주고 있다. 이들은 스승과 제자이지만 어찌 보면 같은 꿈을 꾸고 있는 동지인지도 모른다. 여성들이 자신이 원하는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을 꿈꾸는 동지 말이다.

김수영기자 sy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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