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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급제 화관에 꽂는 어사화 능소화 곁에 선비가 사랑한 달항아리 / 영남일보 / 2018-09-14
관리자 | 조회 755
장원급제 화관에 꽂는 어사화 능소화 곁에 선비가 사랑한 달항아리



두둥실 환하게 뜬 보름달 위로 능소화의 빨간 자태가 포개져 있는 줄 알았습니다. 이는 아마 고운 색감과 자태를 가진 능소화의 아름다움에 빠져서이겠지요. 미처 달항아리의 형상을 보지 못하고 구름에 가려진 보름달이라 착각했습니다. 강렬함에 길들여진 현대인의 자화상을 류시숙 작가의 ‘세상을 품은 달항아리’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같은 저의 우둔함은 어쩌면 류 작가의 가장 능소화다우면서도 진짜 능소화와는 무언가 다른 모습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능소화는 예로부터 구중궁궐에 피는 꽃이라 귀하게 여겨졌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장원급제한 사람의 화관에 꽂아 ‘어사화’라고도 불렸답니다. 그래서 꽃말도 ‘명예’ ‘영광’ 등으로 좋은 기운을 전해줍니다.

능소화와 관련한 여러 이야기 중 소화의 이야기가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옛날 어느 궁전에 소화라는 아름다운 궁녀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 소문을 들은 왕이 소화를 찾았고 첫눈에 반해서 하룻밤을 보냈답니다. 그 후 소화는 매일 왕이 다시 오기를 기다렸지만 왕은 다시 오지를 않았습니다. 소화는 왕에 대한 그리움에 지쳐 죽었다가 궁궐 벽을 타고 올라 왕을 보려고 꽃으로 피었답니다. 능소화에 얽힌 가슴 아픈 이야기를 들은 뒤부터는 담벼락에 고개를 내밀듯 화사하게 피었다가 어느 날 꽃봉오리째 뚝뚝 떨어지는 능소화를 보면서 왠지 모를 처연함이 느껴집니다.

이런 능소화를 류 작가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새롭게 피워냈습니다. 어사화 등으로 불리며 선비의 꽃처럼 여겨진 능소화를 선비들이 사랑했던 달항아리와 접목시켜 풀어나간 것입니다. 달항아리는 눈처럼 흰 바탕색과 둥근 형태가 보름달을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유난히 밝은 보름달은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데 그 빛과 형태가 주는 푸근하고 넉넉한 서정은 한국적인 아름다움과 정서가 잘 스며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그 옛날 선비들은 달항아리를 늘 가까이 두고 소중히 여겼다고 합니다.

류 작가는 능소화를 그리게 된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안동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때까지 그 곳에서 자랐는데 어릴 때부터 능소화를 많이 봤습니다. 그래서 왠지 친근감이 있었지요. 어린 시절부터 꽃을 좋아해서 한국적인 꽃을 그리고 싶었는데 이미 많이 알려진 난초·매화가 아닌 다른 꽃을 찾다보니 능소화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난초나 매화와는 다른 느낌을 주는 것도 작가적 욕심을 자극했습니다.”



[[김수영의 그림편지] 류시숙 작 ‘세상을 품은 달항아리’]
주말섹션부장

능소화를 그리기 전 그는 이미 많은 꽃을 캔버스로 옮겨왔습니다. ‘들꽃의 합창’ ‘함박웃음’ 등의 연작을 통해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박한 들꽃들을 담아냈습니다. 이런 꽃 연작에 이어 2000년대 초반부터 그리기 시작한 능소화 작품은 다양한 꽃 작업의 방점을 찍는 시도라 할 수 있습니다.

“화려한 꽃보다 소박한 꽃들을 그리다가 능소화로까지 이어진 것은 어쩌면 일맥상통한 작업이면서도 방향을 달리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능소화는 굉장히 화려하고 아름다운 꽃이니까요. 하지만 능소화에 얽힌 아름다운 전설이나 한여름에 피어나 시들지 않고 봉오리째 뚝 떨어져 생을 다하는 모습은 저에게 여러 가지 시사하는 바가 많았습니다.” 그는 특히 일반 꽃들처럼 시든 모습을 보이지 않고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한 채 봉오리째 떨어지는 모습이 마치 선비들의 올곧은 정신을 보는 것 같아 좋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능소화 곁에 선비들이 사랑하는 달항아리를 두고 싶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뜨거운 한여름에 선선한 바람이 그리워질 즈음, 어두움이 찾아들기 시작하고 옅은 구름 사이로 보름달이 서서히 자태를 드러냅니다. 어둠과 구름 사이에 은근히 비춰지는 달의 모습은 왠지 모를 설렘, 때로는 그리움과 정겨움을 불러일으키지요. 그런 달빛에 취해서인지 저도 모르게 잠깐 동안 달과 달항아리를 구분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달과 달항아리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정서나 상징성은 모두 선비의 정신을 닮았으니까요.

주말섹션부장 sykim@yeongnam.com

#류시숙 화가는 이화여대 서양화과와 경북대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개인전 및 초대전을 17차례 열었다. 대구시전 초대작가, 한국현대여성미술대전 운영위원 등으로 활동했으며 현재 대경미술연구원 원장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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