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재 서병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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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재 서병오론 - 정태수 2000 1월 월간 까마
아트코리아 | 조회 1,146

석재 서병오론 

 

                                    정 태 수

 

1. 들어가는 말

 석재 서병오는 영남이 낳은 걸출한 서예가로서 우리 나라 현대 서단의 여명을 밝힌 뛰어난 예술가였다. 그는 우리민족의 격랑기였던 구한말과 일제시대에 생애를 살면서 시. 서. 화를 통해 호방하고 활달한 예술정신을 유감없이 표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예술세계는 ‘영남일대에서 필명을 날린 서예가’라고 하는 등 아직까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그의 서화예술에 대한 특별기획은 만시지탄이나 대단히 다행한 일로 생각된다. 그러나 필자에게 지정된 석재선생의 ‘전기적 작가론’은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닌 듯하다. 왜냐하면 한 편의 전기는 보통의 작가론보다 일층 섬세하고 깊은 곳까지 탐구의 저울추가 내려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작가의 전기나 작가론을 서술하는 방법에는 각종 자료를 이용한 객관적 논리의 몫도 있고, 직관의 영역도 있다.

 이 글에서는 잡지라는 매체의 특성에 맞게 쉽게 서술하되 원자료가 변형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선생의 생애와 예술을 형성기, 변화기, 완숙기의 세 단계로 나누어서 이야기를 전개하고자 한다. 또한 선생의 생애를 소개함에 있어 기계적인 시간의 집착에서 벗어나 예술인으로서의 진면목을 살피는데 이야기의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2. 시대적 배경

 석재가 출생할 당시의 조선 후기 사회는 1870년 개항과 더불어 일본 및 서양열강들의 침입으로 날로 위기가 높아가고 있었다. 이 시기는 내적으로 조선사회를 지탱한 신분제의 계급모순이 거세지고, 외적으로 우리 나라와 외국 자본주의 제국 사이의 모순이 드세지는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05년 11월에 강압으로 체결된 을사보호조약으로 인해 민족이 위기에 처하자 서화가들은 오히려 예술활동에 거센 힘을 발휘한다. 누란의 위기 앞에서 자기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며, 고유의 전통을 지키려는 경향은 시대의 요청일 터이다. 그렇지만 서화가들은 밀려드는 서구 근대주의 미술양식에 맞서서 민족과 시대를 담보로 한 실험정신과 도전태도를 질탕하게 보여주지 못하였다. 그들에게 있어 민족 자주성을 지키려는 태도는 서구 근대미술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우선했고, 봉건성 극복이나 근대성 획득보다는 민족자주성을 제대로 확립하는 일이 최고의 가치로 떠올랐던 것이다. 그래서 20세기 초반에 열렸던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서예는 서양화에 비해 쇠미의 기색을 띄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와중에도 조선 후기 이래로 사회경제적 역량을 키워온 중인들의 역할은 점차 두드러져 전통적인 신분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돌파구가 다양하게 모색되고 있었다. 이들은 계급관념이 약해진 당시의 사회적 배경을 바탕으로 문예 분야에서 사대부적인 삶을 지향하여 시. 서. 화에 두각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석재는 바로 이와 같은 사람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로서 일제강점기 영남예단의 중심에 우뚝 서 있었다. 

 

3. 석재 예술의 형성기

 석재 서병오는 대구 갑부 서상민(徐相敏)의 3남 중 차남으로 철종 13년(1862년) 음력 6월 11일 지금의 대구 중구 동성로 3가 8번지(현 농협대구지부 자리)에서 태어났다. 뒤에 석재는 숙부인 서상혜(徐相蕙)씨에게 양자로 입양하여 생가만석(生家萬石)과 양가만석(養家萬石)의 2만석 재산과, 시. 서. 화. 거문고. 바둑. 장기. 의술 등 여덟 가지 재주를 팔만석 재산이라 불렀는데 재산 2만석과 재주 8만석을 합쳐 10만석꾼이라고 불렸다.

 어린 시절의 석재는 서동(徐童)으로도 불렸는데 명민한 개구쟁이로 동네에 소문이 자자했다. 이러한 서동도 아버지의 엄한 훈육에는 꼼짝하지 못했다. 그 당시 석재의 집안은 누대로 대구 팔공산에 있는 동화사에 시주하였기 때문에 석재의 부친은 개구쟁이 서동을 이곳에 보내 산세 좋고 물 맑은 경치를 벗삼아 호연지기를 기르게 하였다. 어린 서동은 이곳에서 하루라도 붓글씨를 게을리 할 수 없었으니 그의 부친은 매일 전지 여덟 장에 그것도 앞뒤로 빼곡하게 글씨를 써서 심부름하는 사람 편으로 본가에 가져와 검사 받게 하였다. 만약 한 번이라도 어기게 되면 당장 불호령이 떨어지고 종아리가 시퍼렇게 멍들도록 매를 맞았다고 한다. 부친의 혹독한 훈육과 석재의 노력으로 앳된 홍안이었지만 그의 글씨는 안진경, 구양순, 왕희지, 동기창, 등의 중국명가들과 우리 나라 추사의 글씨를 비슷하게 흉내낼 수 있었다. 소년 서동은 이미 대가들의 진적과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의 글씨를 써서 주위를 놀라게 하였던 것이다.

 그의 부친은 자식의 뛰어난 재주를 간파하고 있었다. 그래서 석재가 13세 되던 해에 내면의 공부가 더 시급하다는 판단을 하고서 영남의 대문장가요 유학자인 방산(舫山) 허훈(許薰, 1836-1907)과 면우(?宇) 곽종석(郭鍾錫, 1846-1919)의 문하에 맡겨 학문과 문장을 연마시켰다. 그리고 글씨도 당대의 명필인 팔하(八下) 서석지(徐錫止, 1826-?)를 독선생으로 초빙하여 김생, 왕희지, 조맹부의 필법을 익히게 하였다. 그림은 개자원화보(芥子園畵譜)와 십죽재서화보(十竹齋書畵譜)를 중심으로 독습하였다. 이와 같이 학동기의 석재는 체계적인 교육환경과 다양한 자료, 넉넉한 뒷받침 및 타고난 천질과 노력덕분에 이미 사서오경을 통달하였으며 시작(詩作)과 글씨도 상당히 높은 단계로 접어들고 있었다.

 한편 석재는 학문과 예술을 연마하면서 틈틈이 학자이며 한의사인 이석곡(李石谷)에게서 의학을 배웠다. 이석곡은 한방에서 사용하기가 어렵다는 부자(附子)를 특히 잘 써서 이부자(李附子)란 별명이 있을 정도로 뛰어난 의술을 가진 명의였는데, 석재는 훗날 이 때 배운 의술 때문에 중국 주유시에 명성을 얻게되는가하면 자신의 건강도 스스로 지키게된다. 그래서 더욱 이석곡을 정신적 스승으로 생각한 듯하다.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는 가운데 영남지방에서 이름이 제법 알려진 석재는 17세에 이미 서울까지 그 재주가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천하에 권세와 풍류로 이름 높았던 대원군이 이 소식을 듣고 직접 소년 서동을 불러 당대의 석학. 거유 앞에서 시. 서. 화와 바둑 거문고 장기 등을 시험하자 무엇이든 무소불통(無所不通)하니 크게 칭찬하였다. 대원군은 즉석에서 그의 사저인 운현궁에 머물도록 허락하였다. 그래서 석재는 운현궁에 머물게 되었고 거기에서 대원군의 난 화법과 조선 후기 우리 나라 예단의 영수였던 추사의 예술세계를 간접적으로 배울 수 있었다.

 운현궁시절 석재와 대원군과의 관계에 대해 석재의 제자들은 여러 가지 일화들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그 중의 하나는 대원군이 직접 지었다는 석재의 아호에 대한 일화이다. 대원군은 당시 아들의 친정(親政) 이후 특유의 난을 치거나 장기를 두는 등 풍류를 즐겼는데 이 때 여러 분야에 천재성을 보인 석재의 천질(天質)을 보고 “아깝도다(惜哉), 서동아(徐童)”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그래서 대원군은 자신의 호인 석파(石坡)에서 ‘석(石)’자(字)를 떼어 석재(石齋)라고 지어주면서 “너의 재능은 돌로 지은 집처럼 야무져서 깨뜨릴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격려했다. 아무튼 석재는 운현궁생활을 통해 대원군의 학예를 체득화하였고 추사의 영향도 받게 된 것이다.  석재는 29세(1860년)에 꿈꾸었던 성균관 진사에 급제하고 이듬해에 신령군수(新寧郡守, 현 경북 영천)로 부임한다. 그러나 그 동안 자유분방한 생활과 학예에 전념한 생활을 해온 석재는 관직생활에 적응하지 못하여 행정치적을 쌓지 못하고 취임 후 얼마 뒤에 공직에서 물러났다.  

 

4. 석재 예술의 변화기

 석재는 37세(1898년)가 되자 고향의 잡다한 일을 훌훌 털어 버리고 아울러 새로운 예술창작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7년간 1차 중국유학의 길을 단행한다. 그는 북경, 상해, 소주, 남경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당시 중국의 시. 서. 화계의 대가인 오창석(吳昌碩, 1844-1927), 서신주(徐新周), 포화(蒲華, 1834-1911) 등과 교류하였다. 그리고 우리 나라의 망명정객이자 시. 서. 화의 대가인 민영익(1860-1914)의 집에서 3년간 머물게 되었다. 민영익은 1895년부터 상해에서 본격적인 망명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의 저택인 천심죽재(千尋竹齋)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충분한 자금을 운용하고 있어서 상해에서 돈을 쓰는 것이 왕공(王公)의 위치를 넘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생일이 되면 중국서화계의 명가를 초청하여 여러 날을 묵어가며 잔치를 벌였다. 이 가운데 오창석과 민영익은 절친한 관계였는데 오창석이 민영익에게 전각 300여과를 새겨준 사실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따라서 천심죽재에 거처를 정한 석재도 그들과 빈번한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의 만남은 민영익이 석재에게 선사한 벼루에 기록으로 남아있는데, ‘벼루의 글씨는 포화가 쓰고 전각은 서신주가 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석재와 당시의 중국명가들이 얼마나 상호간에 예술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았는지 알 수 있다. 더욱이 포화는 석재의 그림과 글씨에 제발을 남기거나 직접 작품을 제작하여 주고받았으며, 석재의 예술과 학문에 대해 크게 칭양하고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석재의 서화수준이 청나라 말기 중국의 어느 예술인보다 높음을 알 수 있다.

 석재는 1909년 2차 상해여행 때 다시 포화를 만나자 뛰어난 의술로써 그의 병을 고쳐 주었다. 이에 대해 포화는 “석재는 뛰어난 선비로 의술에 정밀하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 해 8월 귀국길에 산동성 청도에 있는 영국령 위해위(威海衛)를 지날 때 당시 위해위의 영국총독인 낙임정(駱任廷)이 중국대륙에 서화로써 명성을 날리던 해동인(海東人, 당시 중국에서는 조선인을 이렇게 불렀다)인 석재를 초빙해 놓고 시종 거만한 자세를 보이고 있었다. 주연이 벌어지고 총독이 글씨 한 폭을 청하자 가소로운 생각이 든 석재는 굴원(屈原)의 고사를 빌려 백인종인 그를 비꼬는 시 한 수를 지은 후 즉석에서 휘호했다. “초나라 사람(굴원)이 먹은 뒤에 이름 멀리 전해왔고, 진나라 선비(도연명)가 따신 이래 향기는 사라지지 않는구나. 흰국화 누른국화 별종도 많다지만, 황국이 그 중에도 으뜸임을 알리라.” 이 시는 의역하면 백인종 황인종 등 인종도 많지만 그 중에 황인종이 제일이라는 뜻이다. 석재는 바로 백인종인 영국총독의 코를 납작하게 하는 모욕적인 시를 지어서 보란 듯이 휘호하고는 만면에 미소를 가득지어 보이면서 당당히 걸어나오니 그가 얕잡아 보고 말한 해동인이 그렇게 당당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두 차례의 중국유학을 통해 석재의 예술적 심미안은 크게 바뀌었다. 문인화는 사의적이면서 호방한 필치로 문기넘치는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고 글씨도 안진경체를 바탕으로 형태보다 신운을 강조하는 독특한 서풍을 형성하게된다. 즉 중국서예인과의 교류를 통해 그들의 다양한 조형미감을 소화하여 석재자신의 것으로 만든 것이다.

 

5. 노후의 완숙기

 글씨와 사람은 같이 늙어간다는 말이 있다. 석재 또한 말년에 이르면 시. 서. 화에 대한 진정한 가치를 깨달아 그의 예술세계는 완숙한 경지에 접어들게 되고 후진양성에 온 정열을 다한다. 이 시기 석재의 명성은 이미 한반도는 물론 해외에까지 널리 알려졌고, 전국에서 서화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밀려들고 있었다. 그래서 석재는 61세(1923년) 때 조선문화의 창달과 후진양성을 목적으로 ‘교남시서화연구회(嶠南詩書畵硏究會)’를 조직하여 전국에서 한시(漢詩) 작품을 현상모집 하여 1등에서 10등까지 상금을 수여하였다.

 또한 당시 시회가 열린 우세정(又洗亭, 현 사찰), 수성들의 모구정(慕邱亭) 등에는 전국에서 유명한 문인. 묵객들은 거의 모였다. 대표적인 사람들은 서울의 김돈희, 김규진, 고희동, 김용진, 오세창, 개성의 황성하, 황용하, 평양의 김유택, 김윤보, 김우범, 경주의 최윤, 전주의 최규상, 광주의 허백련, 함북의 지창한, 영남의 박기석, 박기돈 등으로 당시 한국서화계의 대가들이 망라되어 있으니 석재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석재는 이들을 통해 당나라 왕유(王維)의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詩中有畵, 畵中有詩)’는 시. 서. 화의 일률사상을 실현코자 하였다. 그래서 그 시기 석재의 예술정신은  교남시서화연구회를 중심으로 전국에 확산되었다. 그 후 석재의 예술적 명성은 일본까지 알려져 69세(1930년) 때는 일본총리(犬養)와 일본 정계의 실력자인 두산만(頭山滿)의 초청으로 당시 일본의 대표적인 학자, 문인 예술가 등에게 조선의 대예술가인 석재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귀국한다.

 그러나 중국과 조선, 그리고 일본 땅에 까지 필명을 떨쳤던 석재도 자신의 마지막 운명은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조국광복을 10년 앞 둔 1935년 초봄 음력 3월 6일 오전 11시에 74세를 일기로 한 많은 예술세계를 조용히 접고 영면하였다.

 

6. 나오는 말

 구한말과 알제치하 수난의 역사를 온 몸으로 부딪치며 살아온 석재 서병오는 천재 서화가로서 조선과 중국 및 일본 삼국을 무대 삼아 종횡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유년기부터 다방면에 특출한 천재성을 발휘해 세간에서 팔능거사(詩. 書. 畵. 文. 琴. 碁. 博. 醫)라고 불렷다. 그의 예술세계는 중국유학을 통해 일변하였으며 해외에서 명성이 더 높았다. 말년에는 조선서화계를 이끌면서 교남시서화연구회를 주관하였다. 이렇게 진정한 삼절인 석재 서병오 선생의 예술적 위상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선생에 대한 연구나 평가는 미미한 실정이다.

 시에 나타난 그의 예술세계는 당나라 사공도(司空圖)의 24시품(詩品)으로도 다 분류할 수 없는 다양한 풍격을 지녔고, 특히 낭만시와 염정시(艶情詩)에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글씨는 안진경을 바탕으로 왕희지, 소동파, 하소기와 추사의 서법을 소화하여 호방하고 웅장한 필력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특히 행초와 해서, 예서에 일가를 이루었으나 그의 탁월한 천재성을 감안하면 아쉬움이 남는다. 문인화는 어려서 대원군의 화법을 익혔으나 중국유학을 통해 사의화풍으로 크게 바뀌었으며 포화의 영향이 많음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일필가성으로 영남문인화의 본령을 개척한 그의 문인화는 현대 한국문인화의 신기원을 여는 디딤돌이 되었다.

 따라서 석재 서병오 선생의 예술전반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의 필요성이 절실히 요청된다. 이 특집을 계기로 한국 현대 서화계의 여명을 밝히는데 작지 않은 역할을 하신 선생의 예술세계가 제대로 자리 매김 되기를 기대하면서 졸필을 거둔다. 

        

  (위의 글은 정태수가 월간 까마에 발표한 글입니다.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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