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7    업데이트: 13-09-24 10:16

언론 평론

"평생 그려야 할 소와 숙명적 만남" - 엠플러스 한국 2009년 1월호
아트코리아 | 조회 1,588


"평생 그려야 할 소와 숙명적 만남"

 

청도를 사랑하는 화가

‘부릅뜬 두 눈에서 용맹이 솟아난다. 기 싸움이 대단하다. 콧김이 훅하고 나올 것만 같다. 서로 맞붙은 둘 사이에는 보얗게 흙먼지가 인다.’ 화가 손만식(44)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싸움소다. 금방이라도 화폭을 박차고 나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한바탕 용력을 뽐낼 것만 같다.

 

싸움소를 주로 그려 ‘소만식’으로도 불리는 그는 한국미술협회 청도지부의 회장이다. 싸움소의 고장 청도에서 태어나 1996년부터 싸움소를 그리고 있다. 소를 그리기 전에는 주로 어머니를 그렸으니 그에게 소는 어머니 다음이랄까.

 

한국에서 소를 그린다는 것은 엄청난 부담이다. 이제는 신화가 되어버린 천재화가 이중섭(1916-1956), 그의 아우라가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이중섭의 소는 민족혼을 담고 있지요. 우리나라에서 그를 뛰어넘을 수 있는 작가가 있을까 싶어요. 그렇기 때문에 소를 그린다는 것은 쉽지 않고 접근하기도 어렵죠.”

 

그는 그런 부담감을 기꺼이 안고 소를 그린다.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시작한 그의 소 그림은 어쩌면 청도에서 나고 자란 화가로서의 업보인지도 모른다.

 

“탄광촌에 살지 않으면서 탄광이나 광부를 제대로 그릴 수 없지 않겠어요. 내가 가장 잘 아는 것, 늘 보아왔던 것을 그리는 것이 맞는 것 같다고 생각해요. 그래야만 작품 속에도 진실이 담길 수 있다고 봐요.”

그래서 그는 “소는 평생을 두고 그려야 할 숙명적 만남 같다”고 했다.


싸움소에는 삶의 희로애락이…

이중섭의 소가 굵고 강한 터치의 선을 이용해서 소를 표현하고 있다면 손만식은 세밀한 묘사에 의한 사실주의적인 표현으로 우직하면서도 역동적인 싸움소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소의 생생한 모습을 화폭에 담아내기가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 소싸움이 벌어질 때면 늘 그 곳에서 살다시피 하며 수많은 드로잉을 하고 사진을 찍어 소의 골격이나 근육, 움직임들을 파악했다. 그는 늘 그렇게 현장에 있었으며 그의 작품 속에는 바로 그런 현장성을 바탕으로 한 생생함이 살아있다.

 

그러나 그 너머에는 인간 군상들의 모습이 담겨있다. 싸움소에는 인간의 삶과 희로애락이 투영되어 있다.  

 

“싸움소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재미가 있어요. 이기는 소, 지는 소, 도망가는 소, 상처받은 소, 겁먹은 소, 화난 소…그런데 소는 그 주인을 참 많이 닮아 있어요.”

 

우리들 삶에도 극적인 순간이 있듯이 싸움소들에게도 극적인 순간이 있다. 한번은 싸움판에서 강력한 우승후보였던 소와 겨루게 된 무명의 소가 있었다. 모두들 다 질것이라고 여겼던 그 소는 의외의 승리를 거두었고 주인 또한 너무 기쁜 나머지 모래판에 벌렁 누워버렸다. 예측불허의 반전은 굴곡 많은 인생에서 언제나 있어왔고, 그래서 더 살아볼만 한 것 아닌가. 사람들은 치열하게 싸우는 소들의 모습에서 바로 자신들의 삶과 모습을 발견하는 지도 모른다.   


소는 또 다른 가족

그는 소를 좋아한다. 한때는 소띠 여자만 봐도 좋았다. 한참 동안 소를 그릴 때는 소고기 국도 먹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소가 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의 소는 사람과 함께 생활하며 교감하는 가족과 같은 존재였다. 소와 사람사이에는 정이 묻어났다. 그러나 요즘은 그 정이 없어진 듯 하다. 어쩌면 그것이 인간의 이기심 때문이 아닌가싶어 그의 마음도 씁쓸해진다. 소가 변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변한 것이다.

 

그의 고향 청도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농한기가 되면 어김없이 동네에서는 소싸움이 벌어졌다. 사고위험 때문에 어린 아이들은 늘 먼발치에서 소싸움을 구경해야 했다. 때로는 냅다 줄행랑을 치는 소를 피해 도망을 다니기도 했다. 소는 늘 봐와서 친근하기는 하나 싸움소들은 덩치가 이만저만한 게 아니다. 비록 싸움에 져서 기세는 꺾였다 해도 그 큰 덩치를 흔들며 달려올 때면 혼비백산할 밖에.


10년간 200여 점의 소 그려…

그가 처음부터 소를 그린 것은 아니다. 청도에서 대구로 통학을 하며 91년 대구대 미대를 졸업했다. 졸업 후에도 고향에 홀로 계신 어머니를 생각해 떠날 수 없었다. 어느 누구에게라도 마찬가지겠지만 그에게 어머니는 참 애틋한 존재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돌아가신 아버지의 빈자리까지 대신해야 했던 어머니의 삶은 더욱 고단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그런 어머니를 주로 그렸다. 화폭에 그려지는 어머니의 모습은 달랐지만 절대사랑을 베푸는 어머니는 언제나 같았다.

 

96년 무렵부터 한동안 잊고 살았던 소로 화재(畵材)를 바꾸었다. 소의 선한 눈동자에 투영된 세상사가 그의 재기(才氣)를 다각도로 자극했기 때문이다.

 

평생을 두고 그려야 할 것 같다는 그의 소가 앞으로 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는 그도 알 수가 없다. “10년을 넘게 소만 그리다보니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 같아요. 소의 해를 앞두고 깨달으면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한국미술협회 청도지부의 산파다. 많은 미술인들을 배출했는데도 인근 경산지부 산하에 있는 현실이 안타까워 2001년 따로 청도지부를 창립하고 2002년에 인준을 받았다. 지난해 9월에는 청도 미술인의 선후배들의 만남과 단합을 위한 ‘2008러브 청도展’을 열기도 했다.

 

기축년 올해에는 소공모전도 개최할 예정인 그는 “그 어느 때보다 어렵다는 이 시기를 황소 같은 우직한 뚝심으로 잘 헤쳐 나가길 바란다”고 덕담했다.

  

 

 

 

                                                                           
                                                                                                 

                                                                                      글 · 사진  정경은 기자

                                                                                    엠플러스 한국 2009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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