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20    업데이트: 22-10-04 10:03

언론 평론 노트

[이사람] 누드드로잉 화가 이준일
아트코리아 | 조회 724

“삶도 미술도 구속하고 얽매이는 것 경계…영혼 깨우는 자유분방한 작업”




 
취재를 하면서 때때로 기자를 당혹스럽게 하는 취재원을 만나기도 한다. 인터뷰를 하면서 취재원에게 질문을 던질 때 정확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예상하는 답변이 나오기를 기대하기 마련이고, 사실 대부분의 취재원은 이런 대답을 내놓는다. 하지만 누드드로잉 화가 이준일(69)에게서는 전혀 다른 답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럴 때 기자는 당황하게 되고 때론 혼란에 빠지기도 한다. 누드드로잉을 고집하는 작가의 작업부터 아무런 연고도 없는 경남 함양으로 옮겨 작업을 하고 있는 그의 모습에서 영혼이 자유로운 기인(奇人) 같은 이미지가 다가왔다. 

좋아하는 그림 즐겁게 그리려 누드드로잉 시작
대작도 10분∼20분 완성…사실보다 직관 중시
몸매·형태보다 움직일 때 드러나는 선의 흐름
붓가는 대로 그리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폐기 
대백문화센터 ‘누드크로키반’ 10년 넘게 강의
누드 드로잉이 미술의 기본기…인기 비결인 듯

경북 곳곳 작업실 옮겨다니다 1년 전 함양 정착 
연고 없지만 잘 대해준 주민 위해 갤러리 개관
평화로운 환경속 작업…보이는 너머의 것 담아 

▶40년 넘게 누드드로잉을 하고 있습니다. 누드드로잉을 고집하는 이유가 있을 듯합니다.

“대학교 2학년 때 누드를 처음 접하게 되었다. 그 이후 이따금 누드를 그렸지만 처음부터 이것만을 고집한 것은 아니었다. 대학 졸업 후 고등학교 교사로 6년간 일한 뒤 학교를 그만두고 바로 대만으로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유학생활이 뜻대로 잘 풀리지 않아 1년 뒤쯤 귀국했다. 이후 본격적으로 미술작업을 하게 됐는데 즐기면서 그릴 소재를 찾았다. 어차피 그림이 좋아서 시작했는데 이런 좋은 그림을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 고민한 것이다. 그래서 누드를 시작했다. 인체를 본다는 것도, 그것을 그림으로 담아낸다는 것도 재미있을 듯했다. 이렇게 시작했는데 누드드로잉을 하는 것밖에는 별다른 재주가 없어서 쭉 그리고 있다. 그러다보니 누드드로잉이 내 작업의 중심이 되었다.”

▶누드를 사실적으로 그리지 않고 드로잉으로 표현하는 이유가 있는지요.

“대학 시절부터 그림을 세밀하게 또 똑같이 그리는 것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그려낼 재주가 없었고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그리는 것만 봐도 왠지 숨이 옥죄어 오는 듯한 답답함을 느꼈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뒤 딱 한 번 사실적인 그림을 그렸는데 대학교 3학년 때 파리 한 마리를 그렸다.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는 진짜 파리인 줄 착각했다. 그런 반응이 재미있었지만 또 그리라고 하면 못 그릴 것 같았다. 그래서 그 파리 그림이 처음이자 마지막 사실화였고 그것을 그리고 나니 사실화는 할 수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누드드로잉의 매력은 무엇인지요.

“나는 작품 하나를 완성하는데 30분 이상을 넘긴 적이 없다. 아무리 대작이라도 10~20분이면 완성했고 보통 1~2시간 동안 20~30개의 그림을 그렸다. 모델을 오랫동안 관찰하고 정확하게 그리는 것이 아니라 직관을 통해 그려 나갔다. 누드 드로잉은 모델의 순간순간 움직임에서 보이는 선의 흐름과 동작상태가 빠른 손놀림으로 표현된다. 여기서 그림의 생명력이 더해지고 작가의 작업적 재미도 높아진다. 이런 측면에서 사람의 몸매나 형태에는 관심이 없다. 움직임의 흔적에 따른 선의 흐름과 전체적인 분위기가 중요하다. 인체의 움직임을 포착해 빠르게 그려내기 때문에 몸의 형태보다는 움직일 때 드러나는 선의 흐름이 내 작업의 핵심이다.”

▶흔히 누드드로잉하면 섹슈얼리티를 떠올리게 하지만 그런 느낌이 별로 들지 않습니다.

“나의 누드드로잉은 내가 가지고 있는 자유분방함의 발로라 할 수 있다. 인위적 형식을 거부하고 자유분방함을 추구하는 태생적 성향과 원초적인 자유상태인 누드가 잘 맞아 떨어진 것이다. 나는 삶도 미술도 구속하고 얽매이는 것을 경계한다. 자연적인 것이 좋다. 누드는 형식 이전의 자유상태다. 어떻게 그려야겠다는 생각에 얽매이지 않고 그릴 수 있어 좋다.”

▶다작을 하는 대신 버리는 작품도 많다고 했습니다.

“나의 작업은 유화 등과 같이 수정하면서 작품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다. 일필휘지처럼 빠르게 그림을 완성한다. 직관을 통해 붓 가는 대로 그린 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많이 버린다. 전체 작품에서 내 마음에 들어 살아남는 것은 30~50% 이다. 특히 개인전 등을 하고 난 뒤 팔리지 않은 것들은 대부분 폐기처분한다. 그나마 남았던 작품들은 2012년 함양으로 작업실을 옮긴 뒤 대거 없애버렸다. 특히 대작들을 많이 처리했다. 족히 수백 점은 되었다.”

▶그동안 떠돌이 화가처럼 작업실을 많이 옮기셨습니다.

“화가가 돈이 없다보니 집주인이 비켜달라고 해서 나오기도 하고, 입지가 좋지 않은 곳에 작업실을 두어 태풍 등 자연재해로 나오기도 하고…. 고령, 가야산, 팔공산, 청도 등을 돌아다니며 작업했다. 하지만 함양은 여생을 보내겠다는 생각으로 전 재산을 모으다시피해서 작업실을 지어서 옮긴 것이다.”

▶함양에는 아무 연고가 없다고 했는데 그곳을 정한 이유가 있는지요.

“함양으로 옮기기 1년 전쯤 함양군농업기술센터 초청으로 그곳에서 특강을 한 적이 있다. 그때 이유없이 함양이 좋았는데다가 특강을 들으러 온 귀농·귀촌자들이 함양에 오면 좋다면서 권유를 많이 했다. 그래서 큰 고민하지 않고 그곳으로 작업실을 옮기기로 했다. 함양에 살지만 일주일에 한 번은 대구에 간다. 10여 년 전부터 대백프라자문화센터에서 누드크로키반을 맡아서 강의하고 있기 때문에 매주 금요일은 대구에 머문다.”

▶대백프라자문화센터의 누드크로키반이 10년 넘게 인기강좌로 유지돼 올 수 있는 비결이 있는지요.

“낮 시간과 저녁 시간 2개 반을 운영하고 있는데 각 강좌에 10~20명이 늘 수강을 한다. 처음 개강할 때부터 수강해서 현재까지 이어가는 분들도 상당수에 이르고, 최소 3년 이상된 분들이다. 누드크로키반은 한 사람이 빠져나가야 들어올 정도로 대기자가 많다. 아마추어보다는 대부분 프로화가들이다. 누드드로잉이 미술의 기본기라 할 수 있기 때문에 기본기를 탄탄히 다지려는 분이 많다. 아마 누드모델을 개인적으로 구하기가 힘들어 누드크로키를 하기가 쉽지 않은 이유도 있는 것 같다.”

▶함양 작업실 안에 갤러리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함양 곰실마을에 살고 있다. 함양에 이사온 지 1년쯤 지나서 갤러리의 문을 열었는데 아무 연고도 없는 저를 환대해준 지역민과 지인들을 위해 선물하는 의미로 개관한 것이다. 1층은 갤러리와 접객실, 2층은 침실을 비롯한 작업실 등이 있다. 갤러리에서는 주로 나의 작품을 전시한다. 특히 함양으로 옮긴 뒤 마주한 곰실마을, 지리산의 자연풍경 등을 담은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다.”

▶풍경화에도 일가견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함양에 들어온 뒤 풍경화를 많이 그리고 있다. 하지만 1990년대에도 풍경화에 심취했던 때가 있었다. 그 당시 유럽 등 해외로 여행을 많이 떠났는데 여행 중에 그곳 풍경을 스케치로 많이 담았다. 스케치 작품을 현지에서 판매해 여행경비에 보태기도 하고, 여행을 다녀온 뒤 이 그림들을 판매해 다른 곳으로 여행도 많이 떠났다.”

▶함양에서의 생활이 아주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상태에서 이곳에 들어왔는데 주변에 귀촌한 분들이 많아 가깝게 지낸다. 내가 해준 게 별로 없는데 예술가를 이웃으로 둔 것이 좋은지 이것저것 많이 도와준다. 주변 환경이 좋아서 마음이 평화로운데 좋은 이웃들까지 있으니 행복하지 않을 수 없다. 이곳에 터를 잡은 지 꽤 오래 되었는데도 아직 할 일이 많다. 이 일을 하나하나씩 해나가는 과정이 재미있다.”

▶함양에 온 후 작품에 변화는 있는지요.

“심신이 좀더 평화롭고 자유로운 상태에서 작업하니 이런 심적 상태가 자연스럽게 그림에 스며들었을 수도 있겠다. 이 곳에 온 후의 그림의 변화보다는 나의 심적 상태가 많이 바뀌었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나에게 그림은 자유로운 영혼을 깨우는 작업이다. 영혼을 깨워서 자유롭게 하는 게 그림이라는 의미다. 누드·자연풍경을 그리지만 있는 그대로 그리지 않는다. 눈으로 보지만 보이는 너머의 것을 그리는데 이런 상상력이 마음껏 발휘되려면 영혼이 자유로워야 한다. 지금 머물고 있는 함양이 최적의 장소다.”

▶누드크로키를 모은 화집도 두 권이나 발간했습니다.

“2015년에 글과 누드크로키를 모아서 화집을 냈다. 글도 누드처럼 빨리 쓰는데 순간순간의 느낌을 짧은 글로 담아냈다. 짧아서 오히려 더 풍부하고 살아있는 맛을 압축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 같았다. 지난 8월 말 대백프라자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었는데 화집 ‘미루어 짐작하여 그린 그림의 낭패’도 제작했다.” 

글=김수영기자 sykim@yeongnam.com

사진=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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