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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지리산 자락 자유 영혼’ 곰갤러리 이준일 화백 / 함양투데이 / 2020.11.5
아트코리아 | 조회 182
[사람들] ‘지리산 자락 자유 영혼’ 곰갤러리 이준일 화백

“함양에 ‘나이브 미술’ 뿌리내려 지역문화 格 높이고파”

2012년 '곰갤러리' 마련…전시회 지속 개최로 지역문화예술 자양분 공급

“지역발전은 주민과 호흡하는 ‘문화의 힘’ 중요”…‘생활 속 미술’ 인사이트 제공 소망

“곰갤러리에 온 걸 환영합니다. 먼저 커피 한 잔 해요. 연한 것과 진한 것 두 가지인데 무얼 드릴까요?”


가을 하늘이 유난히 맑았던 10월 어느 날, 이준일(71) 화백을 만나기 위해 곰갤러리를 방문했다. 갤러리 우측에 마련된 카페 공간으로 기자를 안내한 그는 곧장 커피부터 내리기 시작했다. 흰 머리와 수염, 눌러쓴 모자 사이 미소 띤 얼굴이 선하다. 순간 처음 만난 사이가 아닌 듯 익숙한 동네 할아버지를 만난 착각에 빠지게 한다.

포근하고 소탈한 모습과 달리 그의 경력은 화려하다. 1985년 대구 태백화랑에서 첫 작품전을 가진 뒤 서울, 부산, 독일, 일본 등 국내외에서 서른 번이 넘는 개인전을 개최했다. 금복예술상과 대구미술전람회 초대작가상을 수상하고 계명대, 대구대, 경일대, 효성여대, 대구예대, 대구교대 대학원에서 강의했으며 영남대 미술대학에 재직했다. 현재는 대구백화점 프라자점 문화센터에서 누드크로키반을 맡아 매주 금요일 강의에 나서고 있다.

지리산 자락을 돌아다니다 지난 2012년 이곳 곰실마을 곰갤러리에 정착했다. 지난해 함양에서 첫 전시회를 개최한 데 이어 올 8월엔 강혜련 작가 초대전, 9월 이치우 작가 초대전을 열었다. 오는 7일엔 정태경·최상용·박두·지용선 작가 4인전을 개최한다. 1차산업 중심의 예술 불모지 함양은 먼저 문화의 토양을 배양해야 지역사회의 격을 높이고 지역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는 지론을 바탕으로, 개인 시간과 노력을 들여 인맥을 활용하고 있는 열매들이다. 함양에 남다른 애정을 갖지 않고선 지속하기 힘든 지역 문화예술 발전의 마중물 역할을 자처하고 있는 것이다.

앞마당 너머로 보이는 훤칠한 산과 하늘을 배경으로, 그가 만든 향기로운 커피 한 잔을 두 손에 움켜쥐고 그와 마주 앉았다. 스스로를 ‘지리산 자락 자유로운 영혼’이라 부르는 이 화백, 그가 말하는 자유로운 삶과 미술, 함양에 대한 생각 속엔 그의 철학과 오랜 경력이 자연스레 녹아있었다. 지난달 28일 그와의 만남을 기록으로 남겼다.

-먼저 그림 이야기부터 해보죠. 40년 넘게 누드드로잉을 해오셨다고 들었습니다. 누드드로잉의 어떤 매력이 작가님을 오래도록 이 장르에 빠져들게 했을까요?

▲짧은 시간에 그림을 완성할 수 있어 드로잉을 선호했다. 그러다 보니 누드드로잉이 내 작업의 중심이 된 셈이다. 그림 그리면서 많은 시간과 공을 들이는 게 내게 맞지 않은 탓도 있을 거다. 누드모델의 순간순간의 움직임에서 보이는 線(선)의 흐름과 동작 상태가 빠른 손놀림으로 표현될 때, 그림 그리는 즐거움이 여기에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대부분의 그림을 2~3분의 빠른 시간 안에 그리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화백님 그림은 역동성이 있고 강렬한 느낌이 듭니다. 화백님이 추구하는 작품 세계가 궁금합니다.

▲나의 그림은 2~3분 내에 힘찬 손놀림으로 매우 빠르게 그리면서 어떠한 형태성을 찾기보다 스스로 우러나는 욕구에 따른 자율적인 행위에 바탕을 두고 있다. 또한 무엇을 어떻게 그려야 한다는 것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리려는 작업 의지에 맡겨 나름대로 긋고 문지르고 하면서 기법의 제약이나 간섭 받음 없이 독자적인 조형어법에 의존한다.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는 언제나 한정되고 그 의도를 분명히 하고 있으나 관습적 표현 기법과 고정관념을 배제한 자유로운 방식의 표출은 구상적이면서도 추상적인 개념을 일으키는 작업의 動因(동인)을 내포하기도 한다. 누드드로잉이 갖는 線的(선적)묘사를 통해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생명력의 역동성을 강조하고, 무한한 상상에서 비롯되는 즐거움을 탐닉하기도 한다.

-풍경화도 많이 그리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작년엔 지리산 풍경을 그려 함양에서 초대전을 열기도 하셨더라고요?

▲함양에서 터전을 마련하면서 틈틈이 지리산 언저리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스케치했다. 줄곧 누드를 테마로 작업했던 내가 이곳에서 풍경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거다. 자연의 다양한 소재를 접하면서 산과 나무, 풀꽃 등을 사생하게 됐다.

지난해 함양문화예술회관에서 개최한 초대전시엔 누드화는 하나도 없었다. 누드크로키를 하는 사람이 외지에서 와서 “선생님 누드 보러 왔는데 누드화가 하나도 없다”고 하더라. 전시회하면서 누드화를 전혀 안 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누드화를 뺀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당시 전시는 그림 그리면서 자연과 동화되고 자연이 주는 가치를 새삼 깨닫게 해주는 공간을 만들어 줬다.

-이제 함양 이야기를 해볼까요. 2012년 웅곡리(곰실)에 ‘곰갤러리’를 마련하셨죠. 한적한 시골 마을 한편에 갤러리와 카페를 겸한 공간이라니 멋집니다. 이곳 소개 좀 해주세요.

▲여기가 곰실마을이라 해서 갤러리 이름을 ‘곰갤러리’라 지었다. 집 껍데기만 건축사에서 짓고 꾸미는 건 내가 다 꾸몄다. 옥상에 곰 조형물도 직접 만들었다. 여기 와서 할 일이 있나. 농사짓는 것도 아닌데.

집을 앞으로 당겨 지은 이유가 있다. 마당이 넓으면 정원을 꾸며야 한다. 뭔가 꾸미고 잔디도 심어야 하고 조경을 해야 한다. 사람들이 귀촌하면 조경을 예쁘게 하려고 욕심을 내는데 조경은 도시에서나 하는 거다. 자연 전체가 조경인데 인위적으로 뭘 꾸밀 필요가 있나. 내 집 앞이 사계절 수시로 변하는 정원이다.

지난 2014년에 함양 출신의 서양화가 이목일 선생과 여기서 2인전을 한 적이 있다. 그때 마을 사람들이 여기 마을 생긴 이후로 차가 제일 많이 들어왔다고 할 정도로 손님들이 많이 왔다. 그때 한 번 북새통을 이루고 나선 그 이후론 전시회를 안 하고 작업실로만 써서 조용했었다. 최근엔 지나가다 우연히 들린다거나 신문이나 인터넷 매체 등에서 보고 왔다거나 하는 다양한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다.

-사람들이 찾아오는 건 좋죠? 마을 주민들과는 교류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렇다. 근데 마을 사람들은 한 번도 온 적이 없다. 농사짓는 사람들한텐 카페에 와서 차 마시는 것조차 익숙한 일이 아닐 거다. 그래서 이장에게 “농한기 때 마을 사람들이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내가 물감하고 도구를 마련하고 전시까지 해주겠다”고 했다. 마을 사람들에게 어떤 역할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나이브 미술(naive art)이라는 게 있다. 그림을 전혀 배우지 않은 사람들이 그린 순수 아마추어의 그림이다. 미국이나 프랑스 같은 나라엔 나이브로 시작해 미술사에 오른 작가도 많다. 그림을 배우게 되면 ‘그림 그린 사람의 그림’이 아니라 ‘선생의 그림’이 된다. ‘남의 그림’이 된다. 그림을 전혀 배울 필요 없고 그냥 그리고 싶은 대로 그려야 된다. ‘낙서’여야 된다는 얘기다. 나는 지도를 하는 게 아니고 65세 이상 어르신들이 그리고 싶을 때 경로당에 와서 그리면 내가 전시를 하겠다는 거다. 5명이든 10명이든 간에 신청만 하면 물감, 붓, 종이 다 제공하겠다고 이장한테 말했는데 어떨지 모르겠다.

-그림을 배우지 않아도 그릴 수 있다는 건가요? 일반인들은 미술이라면 어렵게 느껴지는데, 그림을 잘 그리는 방법은 없나요?

▲나는 살면서 수학이 가장 어려웠다. 제일 하기 싫은 게 수학이었다. 그 다음 화학이나 물리, 음악도 싫었다. 콩나물(음표)을 보면 머리 아프다. 그나마 제일 쉬운 게 뭔가. 그림 그리는 일이 제일 쉬운 거다. 사람들이 그걸 어렵다고 한다. 그냥 손 가는 대로 그리면 되지 그게 뭘.

수학이 어려운 건 공식에다 대입해야 하니까 그렇다. 그림하고 수학은 다르다. 수학에선 1+1=2다. 2 외엔 답이 없다. 하지만 그림은 1+1은 1도 되고 2도 되고 11도 되고 0도 된다. 그림은 그런 식으로 그리는 거다. 아트는 사이언스가 아니다. 어떤 논리와 정의에 의해 체계화되지 않은 게 그림이다.

지금 현재 가르치고 있는 일반인들한테도 그리고 싶은 대로 그리게 한다. 어떤 공식을 가르치지 않는다. 수강생들의 그림을 한데 모아놓으면 결과물이 다 다르다. 같은 게 하나도 없다. 이게 ‘창조’고 ‘창작’이다. 내가 그들에게 기법을 알려줄 것 같으면 내 그림을 그들이 그리게 되는 거다.

-제일 안 좋은 그림은 남의 그림을 따라하는 거겠네요.

▲아무리 잘 그려도 남의 그림을 그리는 게 제일 안 좋은 거다. 1900년대 들어와서 나이브 미술이 뜬 이유도 바로 그거다. 나이브 미술은 옛날부터 해왔던 방식이 아닌, 오로지 한 사람, 그 사람의 삶과 자유 의지에 의해 그려진 그림이다. 형식도 없고 틀도 없다.

나이브 미술엔 그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 시골에서 자라왔던 자신, 시골 풍경과 이야기, 이웃사람 모습 등 자기가 살아오면서 맞닥뜨렸던 게 자연히 소재가 된다. 그림을 배우게 되면 그런 게 없다. 전부 사진 찍어 와서 그리고 보고 흉내 내고. 그런 건 좋은 그림이 될 수 없다. 잘 그린 그림이 될 순 있겠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건 ‘잘 그린 그림’이 아니라 ‘좋은 그림’이다.

-함양에서 해보고 싶은 것도 나이브 미술인가요?

▲그렇다. 나이브 미술 공모전을 해보고 싶다. 함양문화예술회관에 아무리 유명한 사람, 미술의 대가가 와도 사람이 안 온다. 도시에서도 미술 전시회엔 사람이 안 들어온다. 사람들이 전시회에 많이 오게 하는 방법은 딱 하나, 나이브 미술을 하는 거다. 65세 이상의 사람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거다. 문화는 일반 대중과 소통이 돼야 한다. 소통이 안 되는 지역의 문화는 죽은 거다.

미술관 운영이 어려운 건 전 세계가 다 그렇다. 지금 미국도, 유럽도 미술관 운영이 잘 안 된다. 결국 유동인구를 늘리고 전시장에 사람이 많이 오게 하려면 나이브 미술을 해야 한다. 그림을 배우지 않은 할아버지, 할머니를 중심으로 전시회를 열어 그 안에서 상을 주는 거다. 평가도 마을 대표가 하고. 예를 들어 어떤 할머니가 1등으로 5백만원을 받았다고 하면 서울에 있는 아들, 딸, 손자들 다 오지 않겠나. 또 다른 마을에서도 “우에 했기에 오백만원 받았노” 하면서 궁금해서라도 미술관에 오지 않겠나.

-나이브 미술, 함양 지역의 발전과도 연관 있어 보입니다.

▲일반 사람들이 전시회를 하면 미술관 격이 떨어진다? 격이 왜 떨어지나. 전문가들은 수준이 높고 일반인들은 수준이 낮은 건가. 함양의 유동인구를 늘리려면 제일 첫째로 함양 지역사회 농민들, 군민들과 호흡할 수 있는 문화가 만들어져야 한다. 매년 개최하는 축제에도 함양만의 문화가 들어가야 한다.

농촌경제는 생산이라는 1차 산업만으로 이끌어갈 수 없다. 제일 중요한 건 ‘문화의 힘’이다. 축제도 행사를 위한 행사가 아닌, 사람들이 들락날락 하면서 마음껏 보고 즐길 수 있는 행사가 돼야 한다. 그러려면 고급문화가 돼선 안 된다. 모두가 박수치고 어우러질 수 있는 한마당을 만들어야 한다. 함양 안에서 동질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뭔가를 한다고 하면 호기심에라도 사람들이 오게 될 거다.​

-요즘 코로나19 장기화로 많은 사람들이 우울감이나 무기력증에 빠져있다고 합니다. 최근엔 ‘코로나 블루’라는 신조어까지 생겼습니다. 이런 때 사람들이 미술활동을 직접 하거나 작품을 보면서 지친 마음을 치유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도 해보는데요. 끝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사람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그림을 그리면서 자기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 종이에 낙서하듯 무심히 끄적거려보는 행위는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에너지의 발산에서 비롯된다. 그림을 그리는 매우 자유롭고 즉흥적이고 유희적인 활동을 통해 거리낌 없는 자의식이 묻어나오면서 자기 자신을 감싸는 여유를 갖게 된다. 이러한 행위를 통해 자신에 대한 관대함으로 스스로를 다스리게 될 거다.

나는 곰갤러리를 운영하면서 ‘주민 참여를 전제로 하는 예술은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사회 참여적 예술로, 생활 속의 미술로 많은 사람들에게 인사이트를 제공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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