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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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25    업데이트: 19-05-20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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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설날과 더불어 보름 2014-01-29 영남일보
정하해 | 조회 827

 

지금은 그냥 스쳐가는 풍습이거니 하지만 옛날엔 설날이 큰 명절이었다. 특히 아이들은 한 벌의 옷을 더 얻어 입을 수 있는 날이기에

 

정말이
지 기다려지는 날이었다. 설날에 입을 옷은 알록달록한 ‘골덴’으로 된 옷이었다. 물론 시장에 따라가기야 하지만 옷의 치수는 언제나 좀 컸다. 소매는 두어 번 걷어야 팔목이 드러났는데, 바로 아래 동생에게 물려주기 위한 엄마의 작전이다.

그런 옷을 미리 사서 장롱에 넣어두면 나는 하루에 몇 번은 꺼내어 입어보며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가 독자인 집안이라 별로 붐빌 것도 없는 설날, 차례를 지내자마자 우리 사립짝엔 금줄을 쳤다. 아버지 어머니는 부리나케 찾아가는 곳이 있었다. 거기는 형산강을 낀 산의 꼭대기에 있는 형산절이라는 곳이었다. 지금은 다른 이름의 사찰이지만, 부정이 타기 전 새해 첫 기도를 올리기 위해 매년 설에는 그 사찰을 찾아갔던 것이다.

11남매를 두었으나 다 놓치고, 달랑 남은 4남매의 건강을 위한 것이었을 텐데 얼마나 절절하고 아픈 기도였을지 내가 그 나이 되어도 못 깨달았다. 그렇게 부처님께 세배를 하고 내려온 후 금줄은 걷어지고 그때부터 세배 손님을 받았다. 세배 손님이 돌아가고 나면 친척이 많은 집의 북적거림과는 대조적으로 우리는 늘 조용했다. 여자는 설날부터 보름 동안은 남의 집을 다녀서는 안 된다는 아버지의 엄명이 무서웠다. 그것은 새해벽두부터 여자는 함부로 어딜 나다녀서는 안 된다는 어떤 예법이었는지 모르지만, 지루하고 심심한 설날인 것만은 분명했다.

그리고 보름이 오면 동네 여자아이들은 해방이 된 기분으로 오빠들 따라 야산에 올라 쥐불놀이하다 옷섶도 태워먹고 다른 동네 아이들과 쥐불싸움도 하고, 천방지축 뛰어다니며 놀았다. 지금의 보름달이 아주 밝다고들 하지만 그때의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그야말로 대낮 같은 달밤이었다. 그러다 시들하면 친구들과, 오빠들 노는 집으로 가 몰래 문구멍 뚫어 구경하며 속닥거리던 일, 보름 며칠은 매일 즐거웠다. 엊그제 일본으로 건너간 동네 친구와 40년 만에 만났다. 서로 살아온 일보다는 그때 놀았던 추억으로 웃고 떠드느라 정작 편한지를 묻지 못하고 말았다.

정하해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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