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술사 연구자[비단에 채색, 55×51㎝, 개인 소장]
서울 종로구 운니동에서 태어난 김기창은 8살 때 장티푸스에 걸려 불행하게도 청각을 잃게 되었다. 그림에 재주가 있던 김기창이 18살 때인 1930년 어머니는 이당 김은호에게 그림을 배우게 했다. 김기창의 처음 호 운포(雲圃)는 진명여학교를 졸업한 신여성인 어머니 한윤명이 지어준 것이다. 해방을 맞자 김기창은 기쁜 마음에서 운포의 '밭 포(圃)'에서 굴레를 벗겨내 '클 보(甫)'로 바꾸어 호를 운보(雲甫)라고 했다. 박래현을 만나 결혼하자 그녀에게 우향(雨鄕)으로 호를 지어주며 운우(雲雨)로 부부의 호를 맞추었다.
청각장애라는 조건을 딛고 김기창은 그림을 시작한지 10년 만에 조선미술전람회 추천작가가 되며 유명화가로 성장했다. 스스로의 노력은 물론 스승의 배려도 있었다. 일제말기에 김기창은 조선총독부 전시체제에 따른 문예정책에 협조한 친일활동을 했다. 그는 생애 끝 무렵인 1993년 아들을 통해 "친일을 한 사실이 있으며, 민족과 역사 앞에 부끄럽게 생각한다"고 자신의 친일행적을 시인하고 공개적으로 고백하며 반성했다. 흔치 않은 일이었다.[close]광복 이후 일본화풍을 극복한 김기창은 수묵의 특성을 살리면서도 시대의 흐름에 맞는 현대적인 미술로서 동양화를 적극 모색했고 그런 만큼 작품 세계의 변화도 많았다. 그 중 1970년대에 나타난 독창적인 청록산수와 바보산수는 큰 인기를 끌었다. 바보산수는 그가 민화에서 길어 올린 발상이다. 일찍이 민화의 매력을 알아보았고 수집한 경험이 있었기에 바보산수, 바보화조가 나올 수 있었다. 김기창을 비롯해 이우환, 권옥연, 이항성, 변종하 등 안목 높은 화가들이 초기의 민화 수집가 대열에 있었다. 삐뚜름한 탑, 터무니없이 조그만 전각, 구부정한 스님, 난데없는 커다란 모란, 불쑥 끼어든 나뭇가지 등 '새벽 종소리'는 엉뚱하고 어수룩한 민화의 맛을 전문가의 솜씨로 재해석한 대교약졸(大巧若拙)의 바보산수이다.
'새벽 종소리'는 그가 속리산 법주사에서 한 스케치에서 나왔다. "법주사에서 하룻밤을 자고 새벽 종소리에 잠이 깨 절간을 거닐다가 문득 영감이 떠올라 그렸다"고 했다. 종소리를 어떻게 들을 수 있었을까? 그는 "꼭 보아야만 사물의 실체를 아는 것이 아니요, 꼭 소리를 들어야만 깨는 게 아니다"라고 필담(筆談)으로 대답했다. 김기창은 축음기로 음악을 듣고 있는 광경을 그린 '정청(靜聽)'(1934년), '아악의 리듬'(1967년), '세 악사'(1970년대) 등 소리를 주제로 한 걸작을 꾸준히 그렸다. 그는 1979년 한국농아복지회를 창설해 초대회장을 맡았고, 1985년 서울 역삼동에 청각장애인을 위한 청음회관을 설립했다. 김기창은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자신의 성공을 같은 장애를 지닌 사람들의 복지와 재활을 위해 나눈 화가였다.
미술사 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