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242    업데이트: 24-04-23 14:09

매일신문

[이인숙의 옛그림 예찬] <181> 엄혹한 시대를 살며 스스로를 다독이다
아트코리아 | 조회 113
미술사 연구자


윤두서(1668-1715), '심산지록도(深山芝鹿圖)', 종이에 담채, 127×90.5㎝,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깊은 산속 영지와 사슴'을 그린 윤두서의 '심산지록도'다. 대숲에서 나와 측백나무 아래 비탈을 아름다운 뿔을 지닌 사슴 한 마리가 내려간다. 하나하나 세밀하게 그린 무성한 풀과 야생화, 구름 같은 영지는 이곳이 심산임을 실감나게 한다. 길상의 뜻으로 보기엔 제화가 의미심장하다.

초장영지수(草長靈芝秀)/ 풀은 무성하고 영지 빼어나니

심산별유춘(深山別有春)/ 깊은 산에는 따로 봄이 있다네

중원풍우야(中原風雨夜)/ 중원은 비바람 몰아치는 밤이니

차지호장신(此地好藏身)/이곳은 몸을 숨기기 좋구나

효언(孝彦)/ 효언(윤두서)

캄캄한 밤중인데 비바람까지 몰아친다고 한 '중원'은 곧 조정이다. 윤두서 집안은 증조부 고산 윤선도 이래 남인 세력의 핵심이어서 당화(黨禍)가 끊이지 않았다. 형 윤종서는 고문을 받다 감옥에서 죽었고, 친구 이잠은 집권세력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는 이유로 국문을 받고 곤장을 맞아 죽었다. 정치적 견해 차이가 죽음과 멀지 않은 시대였다. 아래 제화는 학포의 글이다.

감입진궁리(敢入秦宮裏)/ 감히 진나라 궁정에 들어가

공영이세망(空令二世亡)/ 허망하게 2세로 망하게 했네

충종유절각(充宗猶折角)/ 오록충종(五鹿充宗)도 오히려 뿔이 꺾였으니

참마재상방(斬馬在尙方)/ 참마검이 상방에 있다네

학포(學圃) 추제(追題)/ 학포가 추가로 쓰다

학포는 사슴에서 진시황의 천하통일이 2대에 멸망한 '지록위마'를, 사슴의 뿔에서 '한서' 열전에 나오는 주운(朱雲)의 '절각(折角)', '절함(折檻)' 고사를 떠올렸다. 주운은 황제 앞에서 "상방참마검(尙方斬馬劍)을 하사하시면 아첨꾼 신하 한 사람을 베어 그 나머지 무리를 징계"하겠다고 했다. 황제가 "그자가 누구냐?"라고 묻자 망설임 없이 황제의 스승을 지목했다.

윤두서는 유자(儒者)의 마땅한 책무인 치군택민(致君澤民)이 불가한 자신의 처지를 사슴과 시로 나타냈고, 학포는 진한의 역사를 들어 군신(君臣)의 고사로 윤두서를 위로했다. 누군가의 장수를 축원하기 위한 그림이라기보다 윤두서가 스스로를 다독인 그림으로 읽힌다. 엄혹한 시대를 살며 자신의 존재를 처절하게 묻는 윤두서의 '자화상'과 '명철보신(明哲保身)' 네 글자가 떠오른다.

미술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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