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242    업데이트: 24-04-23 14:09

매일신문

[이인숙의 옛그림 예찬] <182> 상서로운 일출을 합죽선에 그린 20세기 남종산수 대가 허백련
아트코리아 | 조회 115
미술사 연구자


[허백련(1891-1977), '선산루관(僊山樓觀)', 종이에 담채, 16×54㎝, 개인 소장]


동양화 1세대의 대가 허백련의 합죽선 그림이다. 붉은 해가 몇 그루 소나무 옆으로 떠올랐다. 웅장한 바위덩어리인 암산 봉우리 사이 높은 누각에서 보는 상서로운 일출이다. '선산루관(僊山樓觀)'으로 제목을 쓰고 잔글씨로 제화를 써 넣었다. '춤출 선(僊)'은 '신선 선(仙)'과 같이 쓰이므로 이 그림의 핵심은 세상사를 초월하는 뜻이다. 제화는 뜻밖에도 자연미와 회화미를 논한다.

이계경지기괴론즉(以谿逕之奇怪論則) 화불여산수(畵不如山水) 이필묵지정묘론즉(以筆墨之精妙論則) 산수결불여화야(山水決不如畵也) 두고광왈(杜古狂曰) 만지시화진유득(晩知詩畵眞有得) 각회세월래무다(却悔歲月來無多) 의도인(毅道人)

시냇물과 오솔길의 기이함을 논하자면 그림은 실제 산수만 못하고, 필(筆)과 묵(墨)의 정묘함으로 논하자면 산수는 결코 그림만 못하다. 두고광(두근(杜菫))이 말하기를 "느지막이 시와 그림을 알아 참으로 얻은 것이 있으나, 다가올 세월이 많지 않아 안타깝네"라고 했다. 의도인(허백련)

자연인 산수와 예술인 산수화 각각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논한 앞쪽 구절은 출처를 밝히지 않았는데 중국 명나라 동기창의 화론이다. 이 글은 허백련의 일가 선조이자 선배 화가인 소치 허련의 '소림모정(疏林茅亭)' 제화와 같다. 허련은 이 화론을 스승 김정희로부터 배웠다. 김정희의 그림 취향이 문사철의 인문학으로 단련된 심의(心意)를 필법과 묵법 고유의 형식미에 얹는 동기창이 주장한 남종화다. 김정희는 그림과 글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卷氣)의 지성미라고 했다.

남종산수화의 20세기 대가 허백련의 뿌리는 허련으로, 김정희로, 동기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정희가 작고하자 고향 진도로 돌아온 허련의 화풍이 호남에 널리 퍼졌다. 허백련은 허련의 아들 허형에게 그림을 배웠고, 서울로 올라가 1910~20년대에 도쿄와 서울을 오가며 그림공부를 한다. 1922년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 동양화부에서 1등 없는 2등상을 산수화로 수상하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외딴 섬 진도에서 태어난 허련과 허백련은 온 나라에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허백련은 일본에서 배운 감각적인 신남화나 당시 우리나라 전통화단에서 모색되고 있던 사생의 실경산수가 아닌 호남의 회화 전통에서 자신의 길을 찾는다. 48세 때인 1938년 광주에 정착해 연진회(鍊眞會)를 창립하며 허련의 운림산방으로부터 이어져 온 남종산수를 계승했다. 탈속의 이상적 자연을 필묵미로 드러내는 그림이 남종산수화다.

미술사 연구자
덧글 0 개
덧글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