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242    업데이트: 24-04-23 14:09

매일신문

[이인숙의 옛그림 예찬] <187>병풍 한 틀로 많은 작품을 동시에 감상하고 소장하는 백납병
아트코리아 | 조회 60
미술사 연구자



작가 미상, '소상팔경(瀟湘八景) 백납도(百衲圖)'8폭 병풍 중 2폭, 종이에 수묵채색, 각 폭 77×29.5㎝, 온양민속박물관 소장


작가 미상의 '소상팔경 백납도'8폭 병풍 중 두 폭이다. 작은 그림을 붙이는 백납병인데 왠지 좀 이상하다. 자세히 보니 그게 아니라 화폭 테두리를 먹 선으로 구획한 다음 그 안에 그림을 그려 넣었다! 소품 수십 점을 한 틀의 병풍에 붙여 다양한 작품을 한꺼번에 감상하고 소장하는 가성비 높은 백납병이 인기를 끌자 개발된 기발한 방법이다.

처음엔 옛 그림을 붙이다, 다음엔 새로 그려서 붙이다가, 나중엔 작은 그림을 바로 그리는 손쉬운 백납병이 나타난 것이다. 많은 그림을 모아놓은 백납병이 유행한 이유 중에는 상서로운 뜻도 있었다. '모을 집'(集)이 '길할 길'(吉)과 중국어 발음이 같아 많이 모으는 일을 길하다고 여겼다.

'소상팔경 백납도' 병풍은 각 폭을 3단으로 구성하고 4점씩 그려 넣어 총 32점이 들어있다. 상단은 먹과 채색을 섞은 수묵채색으로 화훼를 그린 부채꼴 그림이고, 중단은 크고 작은 두 개의 사각형에 책거리, 영모, 고사인물, 어해 등을 역시 수묵채색으로 그렸다. 하단은 '소상야우'(瀟湘夜雨), '평사낙안'(平沙落雁)으로 제목을 쓴 수묵 위주의 소상팔경이다. 소상팔경도의 8장면으로 구성한 산수화를 8폭 병풍의 중심으로 하면서 상단과 중단에 다양한 그림을 미니어처처럼 그려 넣었다.

'소상팔경 백납도'는 전문화가의 솜씨로 보기에는 화격(畵格)이 떨어지고, 민화로 보기엔 일정한 그림 훈련을 받았음이 분명한 독특한 작품이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대작 병풍화 중에서 감상화와 민화의 가운데쯤에 있는 이런 매력적인 작품이 종종 발견된다. 화가층의 다각화는 미술 소비층이 세분화되고 확대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19세기에는 미술품을 감상하고 소장하는 행위에 포함되어 있는 과시와 장식이라는 속성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물론 길상의 뜻이 명백한 그림도 나타난다. 백납도뿐 아니라 백물도(百物圖), 백접도(百蝶圖), 백선도(百扇圖), 백록도(百鹿圖), 백어도(百魚圖), 백학도(百鶴圖), 백동자도(百童子圖), 백수도(百壽圖), 백수백복도 등 수량의 미학을 드러내는 그림들이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생활, 장수, 출세, 여유, 자손 번창 등을 상징한다. 100이라는 숫자처럼 물건도, 나비도, 부채도, 사슴도, 물고기도, 학도, 자손도, 수명과 복도 많기를 바랐다. 새로운 미술 소비층의 등장과 이에 따른 새로운 취향의 긍정이라는 시장논리에서 탄생한 주제다.

물질을 숭상하면 정신에 해롭다는 완물상지의 이념, 소비와 소유를 억제한 유교의 가치관과 충돌하는 그림들이다. 행복한 현실을 추구하며 많을수록 좋다는 풍족함을 추구하는 가치관은 미술은 물론 이전의 조선사회에 없던 새로운 시대정신이다. 백납도는 그런 시대를 반영한다.

미술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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