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맛깜깜한 보석
-니오베
네가 등 돌리고 있어도 네게서 어둠의 냄새가 났다 아무 말하지 않아도 툭 불거진 뼈마디와 쪼그라든 몸을 보면 안다 아들 일곱 딸 일곱 하루아침에 다 잃고 천년은 늙었다 눈물로 네 몸을 적셔 슬픔의 냄새 지독했다 악취 나는 깜깜한 보석이라니검은 맛
오래전 엄마 젖꼭지에 묻었던 금계랍 겁나게 검은 맛 어른이 되는 건 쓴맛의 깊이를 알게 되는 것 깊이 잠자고 있던 덤불 속 새떼들 날아오르듯 뒤늦게 맛들인 쓴맛 어떤 맛으로도 바꿀 수 없는데 엄마는 쓴 나물을 맛있다 했었지 씁쓰레한 건 몸의 맛이고 탄생의 맛, 그걸 잊지 못해 나도 자꾸 쓴 나물에 손이 가는데 영혼이 깃든 검은 맛 암 것도 모르고 그 때 이미 인생의 쓴맛 알아버렸다그게 걱정이네
잠 많은 내가 졸고 있을 때 신랑이 왔다 가듯 지혜가 다녀갔다 문고리를 흔들며 문 앞에서 날 불러도 난 몰랐다 철없어 호롱불 밝혀 두는 것도 몰랐다 이제 잠 없는 신부가 신랑 기다리듯 호롱불 심지 돋우고 기다려 눈 침침한 내가 못 알아볼까 그게 걱정이네만 눈 밝은 지혜가 눈 어두운 날 먼저 알아 볼 거다 아니다 눈 대신 귀 밝아져 바스락 소리도 알아챌 거다테러리스트
그가 온단다 정확히 32분 후 째깍거리며 그는 온다 32분이면 충분히 슈퍼에 다녀올 수 있고 음악도 들을 수 있고 신문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난 아무것도 못하고 서성거리며 손톱만 물어뜯고 있다 창밖으로 보이는 네거리 교차로는 신호등이 고장 났는지 계속 직진만 한다 이제 18분 남았다 아직도 슈퍼에는 뛰어 갔다 올 수 있고 음악을 들을 수 있고 신문을 볼 수 있다 여전히 난 손 놓고 서성거리고 있다 물어뜯던 살점 떨어져 핏방울 돋아 입술로 피를 핥으며 가만있는 냉장고 문만 열었다 닫는다 네거리의 차들은 뒤엉켜 있다 32분이 지나갔다 마침내 올 게 왔다 그러나 벨은 울리지 않았다 폭탄도 터지지도 않았다 시간이 나를 주시하고 있다 그는 아직 네거리에 뒤엉켜 있는지 모르겠다빨리 지나가다
당신이 천국을 알아? 눈이 번쩍 뜨이는 그 느낌을 알아? 한잔의 알코올이 온몸으로 퍼져 나갈 때 잠깐 잠깐 천국이 보이지 하지만 여기는 빨리 지나가야해 빨랑 천사가 오기 전에자루들
검은 자루 속에 몸을 담고 결혼식에 갔다가 장례식에도 갔다 시작하는 생과 끝나는 생이 코다리처럼 한 줄에 엮여있는 날 자루는 생을 꿰뚫고 다니느라 고단했는지 늘어지고 구겨져 못에 걸려있다 자루 벗고 허드레 자루 쓱 꿰고 앉아 구정물에 손 담그고 있는데 몸이 나를 끌고 가는 줄 알았더니 아니다 자루가 나를 걸치고 가는 나날이다 빨간 자루는 얼굴 붉히던 노란 자루는 까르르 웃던 검은 자루는 몰래 눈물 찍어내던 각각의 자루만이 알고 있는 기억이 있다 먼 길 떠날 때 하나도 가져 갈 수 없는 수북하게 쌓인 저 허물들 옷장은 기억들로 부스럭거린다달우물
저기 저 만월 하늘 구멍이다 두레박 드리우니 달우물 깊다 나 보다 먼저 우물 다녀간 이가 있다 우물은 아래로 내리 딸 셋을 낳은 어머니의 고단한 배 서럽게도 깊다 깊고 깊은 샘에서 희게 쏟아지는 물줄기 사방으로 흘러 넘친다 길고 질긴 생명줄이다물빛
둥근 가로등 떨고 있는 밤 물빛 어제의 물빛 아니에요 쉬폰 커튼처럼 가볍게 어스름 녹아내려 물빛 깊어지네요 세상 것들 스며 더 검푸르네요 산마루 물속으로 살짝 발 담그고 풀벌레 소리 가만가만 풀꽃 흔드네요 바람은 물결 밀어 물비늘 촘촘해지네요 물비린내 밟고 가는 발소리 젖어있네요 바람 어제의 바람 아니에요엄마라는 말에 엄마가 있니
한 여인이 어머니를 찾아 연신 서럽게 울면서 서툰 말로 엄-마, 엄-마 부른다 부르고 불러도 지워지지 않는 기억에도 없는 정도 없는 삼십 년 만에 처음 보는 엄마 정말 엄마라고 생각하고 부르는 걸까? 낯선 얼굴들 서로 맞대고 몸부림친다 태어나자마자 입양된 저 여인은 엄마를 그리며 살아왔는데 엄마는 할미꽃같이 하얗게 쇠었다 저 모녀도 엄마란 말에 목이 메이는가? 그리움이 깊으니 허방에 엄마가 그득해진다눈물
웃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창문을 흔드는 바람입니다 울고 있는 것도 내가 아닙니다 바람의 입에 재갈을 물린 빗방울입니다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유리창은 빗물을 다 받아주어 눈물 골짝납니다한없이 떨고 있는 것
어두워 가는 못은 휘둥그런 눈 치뜨고 있었다 그 위로 바람이 그림자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늘이 깊으면 어둠도 깊어진다는 걸 알았다 못물 고요한데 물속의 달 흔들리고 물속의 불빛 떨고 있었다 그대 눈에서 한없이 떨고 있는 것 어둠도 깊어지면 하얗다는 걸 알았다숨구멍
물에도 숨구멍이 있다지 물도 숨을 쉰다는 거야 언 강을 보면 알 수 있지 한겨울 강물이 두껍게 얼어도 얼지 않는 곳 있지 그곳이 물의 숨구멍이야 말에도 숨구멍이 있는지 질그릇 같은 말구멍에 코 박고 내가 허우적거리고 있는 거야 정월 대보름달 하늘의 숨구멍 같은 달 속으로 나를 힘껏 밀어넣어 보는 거야라면을 먹다가
신문 위에 라면 냄비를 올려놓는다 젓가락으로 들어 올린 면발 아래 형체를 알 수 없는 시신들 그들의 이름 줄줄이 늘어서 있다 지하철 화재 참사 사진 급히 입 속으로 밀어 넣던 라면 뱉지도 못하고 우물거리다 시장기를 어쩌지 못해 삼키고 만다 몇 가락 더 끼적거리다 얼결에 젓가락 놓쳐 면발과 국물이 신문지에 떨어진다 하필 이름 있는 곳에 국물 튀어 이름들이 쭈글쭈글 부풀어 오른다 퉁퉁 불어 냄비 가득한 라면은 소머리 국밥에 허옇게 뜬 골수 같다 불어터진 라면 한 가닥 죽은 사람 이름 위에 척 달라붙어 있다 그것이 한순간, 꿈틀 하는 것 같다말거는 것들
집에 혼자 있으면요 세간살이가 부스럭거려요 입도없는 것이 말 걸어와요 잠시도 진득하니 앉아 있을 수 없어요 어디선가 소리가 나요 옷장에서 쩍 나무 갈라지는 소리 부엌 수도꼭지에서 똑똑 물 떨어지는 소리 온갖 소리 다 들려요 가만히 있으면서 조용히 소란스러워요 선반 위 손때 묻은 주전자가 좀 봐 달라고 칭얼대요 집안에서 나는 소리는 눈길 잡아끄는 힘이 있어요 귀찮아 안 보려 해도 안 볼 수 없어요 다가가면 아무 소리도 안 보이는데 어디선가 소리가 나요 비틀어도 잠가도 새어나오는 소리 시계 소리처럼 내 귀를 갉아먹는 소리 어느 구석에서 또 보이지 않는 소리가 나요 혼자 있으면요 자꾸 말 걸어와요나는 구름편지를 받았네
아무도 읽지 않은 편지가 지금 막 도착해 고층 빌딩 위에 멈춰있었다 겹겹이 누운 노을사이로 구름이 보내 온 편지 뜯어보지 않아서 늘 수취인 거부로 돌아온 편지 풀지 못한 꿈 다시 꾸듯 구름은 편지 또 다시 보내오지만 오줌 누고 돌아서면 꿈이고 뭐고 다 잊고 마는데 그날은 무슨 상징처럼 떠있었다 고집 센 나귀 같던 내 영혼이 답장 안 쓰려 고개 돌려버릴 때 이 하늘에서 저 하늘로 한줄기 빛이 번개처럼 스쳐가고 새들이 놀라 덤불 속으로 숨어들고 하늘에 매달린 수천 개의 종들이 일제히 울릴 때 구름이 문 열어 보여준 구름사원어둠이 내려도 고통은
네 고통은 한 방울의 잉크가 물속에 퍼져가듯 공기를 퍼렇게 멍들이고 있다 내가 네 고통 속으로 들어 갈 수 없지만 가늘게 오는 비 옷깃 적시듯이 차츰 스며들고 있다 이마를 유리창에 대고 흐르는 비 두 줄기가 합쳐져 비의 입술이 창을 핥아대고 있다 너무 깊게도 말고 그렇다고 스쳐가지도 말고 물웅덩이에 고이지도 말고 어둠이 내리듯 나는 네 고통에 다가간다 고통도 합쳐지면 어둠이 내려도 어둡지 않다 밝고도 깜깜하다폭설
공기가 빵 덩어리 같이 부풀어 오른 12월 잣나무가 줄지어 있는 산등성이를 돌다 하얀 말을 보았다 산 아래로 흰 갈기 휘날리며 마구 내달리고 있었다 말 잔등은 거대한 돌을 깎아낸 듯했고, 눈 덮인 잣나무 가지는 꼬랑지 같았다 은빛으로 빛나는 말들의 행렬 내가 앞서가는 말을 알아보았듯 그 말이 날 알아보고 다가와 타라는 듯 가만 등을 낮추었다 아직 때가 아니라고 난 고개를 저었다 말발굽 소리가 눈보라에 휩싸여 멀어지고 그 후 오래 말을 보지 못했다 그렇게 쏟아지던 눈발도 다시 볼 수 없었다 다시 말이 모습을 드러낸다면 말이 나를 알아보고 등 내밀면 말 잔등에 넌지시 올라타고 마을로 내려가 발이 녹을 때까지 머물러도 좋겠다먼 곳
누구를 기다리기에 저이는 턱 괴고 앉아 하염없다 한 손은 사뭇 이리 오라 부르는 듯 쳐들고 그리움이란 참으로 더럽게 질척거리는 것 습도 높은 날 살갗에 달라붙는 끈적거림 같은 것 안 보려 해도 자꾸 눈이 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