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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새날] 수묵화가 백천 서상언…모음·자음과 붉은 화점 '매화로 핀 한글' 수묵의 새 패러다임 제시 / 영남일보 / 2022.10.21
아트코리아 | 조회 222


음악을 딛고 그림의 세계로 넘어온다는 것은 어떤 난관의 의미가 있을까? 10회 개인전, 매번 파격적 행보를 보이는 실험적 수묵화가 백천 서상언. 그가 한글날을 즈음해 제시한 10회 개인전 '한글 매화로 피다(대구은행 갤러리)'는 많은 걸 생각하게 만든다. 그가 전공영역인 음악을 버리고 그림으로 넘어온 15년 세월 중 낚아 올린 매우 의미 있는 전시로 평가받고 있다. 한글의 자음과 모음 그리고 매화. 이게 어떤 결구와 장법을 통해 융합된 목소리를 낼 건가. 그 기법이 내심 궁금했다.

음악 교사 하다 빠지게 된 서예 매력
가슴 벅차게 한 붓글씨…국전도 졸업
전통 문인화와 접목 다양한 미학 시도
심해·우주 공간까지 파고든 수묵 기운

10회 개인전 한글 문자추상 해석
매화 그림과 한글 조합…대담함·파격
자음 14자·모음 10자 직선·곡선의 美
매화도 다섯가지 묘법 '화매오요' 담아
현대 수묵화 전대미문 사건 평하기도

◆매회 변화였던 개인전

백천은 모르긴 해도 국내 서화계에서 가장 빠르게 화풍을 변모시키는 작가로 보인다. 그는 왜 음악 교사에서 화가로 몸을 바꾸었을까? 2008년 생애 첫 전시회에 도록을 보니 그 속내의 일단이 피력돼 있었다.

계명대 음대를 졸업한 그는 시골 학교인 경남 창녕공고에서 교편을 잡는다. 고암중을 번갈아 가면서 학생들에게 음악을 가르쳤다. 그렇게 순탄하게 교사의 삶에 매진할 것 같았다. 그런 어느 날 장세진 국사 선생과의 만남이 그의 삶의 행로를 확 바꾸게 된다. 장 선생은 도서관 사서로도 일했는데 어느 날 백천은 그가 도서관 한쪽에서 수행자 같은 포스로 신문지 위에 부처 불(佛)자를 붓으로 적고 있는 광경을 목격한다. 그 모습이 너무도 평화롭고도 그윽해 보였다. 장 선생은 백천에게 "서예를 하면 심신 수양에 크게 도움이 된다"고 얘기했다. 순식간에 백천은 서예에 입문하고 싶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곧장 대구의 시내 필방에 들러 문방사우를 샀다. 내친김에 아호도 짓고 낙관까지 주문했다. 무서운 게 없던 애송이 시절이었다. 스스로 돌아보면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몰랐던 시기'라 생각돼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린단다.

대륜고로 전근한 백천은 거기서 생의 두 번째 번뇌에 사로잡히게 된다. 나는 죽어서 무엇을 남길까? 그 자문에 그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밥만 축내고 있는 나날 같았다. 그때 '인생은 짧지만 예술은 길다'란 구절이 뇌리를 번개처럼 때리고 지나갔다.

예술에 대한 열망은 팽창하는데 일상과 일상에 매몰된 개인적 나날은 너무나 빈약해져만 갔다. 깊은 밤, 자기 삶을 세밀하게 반추한다. 그동안 나름 잘해 온 것이 음악이지만 훌륭한 음악가가 되거나 특출한 음반도 남기지 못할 것 같았다. '대체 난 무엇으로 나를 이 세상에 남길 것인가?'

'붓글씨'란 화두가 가슴을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서예에 입문하기로 했다. 기본기 연마가 시작된다. 그렇게 백천은 동애 소효영의 가르침을 받게 된다. 동애가 입문자인 그에게 일침을 준다. "서 선생은 술도 좋아하고 운동도 좋아하고 음악까지 좋아하니 글을 쓸 겨를이 있겠냐"고 했다. '중도 포기'를 예감한 모양이다. "그렇지만 한번 지켜보겠다"고도 말했다. 백천의 가슴에 불을 지핀 것이다. 벌겋게 달아있는 난로 같은 기세의 백천은 공모전에 이어 국전도 졸업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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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첫 개인전을 한 백천 서상언, 그는 그동안 모두 10번의 개인전에서 이전과 확연히 다른 화풍을 보여 화단을 놀라게 하고 있다. '한글 매화로 피다' 구불구불 뒤틀린 노매의 풍상은, 매화를 그리는 다섯 가지 묘법인 화매오요(畵梅五要)가 다 들었다. 왼쪽 하단의 수백 년 묵은 밑동과 초묵의 몰골(沒骨) 번짐은 탐매선경(探梅仙境)이 따로 없다.

◆스승의 그늘에서 벗어나자

제자들의 모임인 동애 연서회와 태화 묵연전, 서협 회원전 등에 전시를 하게 된다. 하지만 자신의 작품을 보니 백천것이 아니었다. 아직 바다로 나가지 못한, 포구에 갇힌 배와 같았다. 이래 봐도 저래 봐도 스승의 색과 형상이었다. 어느 날 울먹이며 스승에게 그런 속내를 드러냈다. 당신으로부터 벗어나게 해달라고. 스승이 한 말씀을 전한다. "백천, 어찌 하루아침에 네 모습을 드러내려 하느냐. 공부가 더 충실해지고 창의성을 더 꾸준히 찾아봐. 그럼 언젠가 자네 진면목을 찾을 걸세."

무엇이 처음이고 무엇이 끝인지 모르기만 했다. 사면초가의 나날이었다.

서예에 문인화를 포개기 위해 동애 문하를 벗어나 계정 민이식 문하로 들어간다. 대구와 서울을 문지방 닳도록 들락거렸다. IMF 외환위기 때는 은행이자 때문에 어렵사리 샀던 아파트까지 날리게 된다. 수업료조차 감당하기 힘들었다. 스승은 그걸 알고 수업료를 모른척하기도 했다.

2007년 대한민국서예대전에서 문인화 부분에 우수상을 받아 국전 초대작가로 등단하게 된다.

◆매번 새날인 작품들

2008년 수성아트피아 호반갤러리 1회 개인전에서 최근 10회 개인전까지, 변혁적으로 출렁이는 그만의 화폭 스펙트럼을 보면, 순간 '이게 한 작가의 작품일까'란 의구심이 든다. 제1회는 전통 문인화에서 현대문인화를 건드렸다. 두 스승에 대한 예의였다. 첫 개인전 이후 다음 전시에 대한 해답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순간 고민 없이 다가온 먹의 질감과 깊이의 유희를 표현해 보고 싶었다. 제2회는 우리나라의 전통 서원, 고택, 유물 등을 소나무와 함께 해석한 작품전이었다. 대작인 '여명'은 가로 12m, 세로 2m 크기. 고송 옆에 경주 나원리 오층석탑, 옥산서원, 안동 만대루와 임청각, 경주 포석정, 심지어 계산성당도 앉혔다. 제3회는 통일을 염원하며 우리나라 산(백두산, 한라산, 북한산, 인왕산, 금강산)과 구룡폭포 등에 생뚱맞게 청와대를 갖고 와 슬쩍 얹었다. 제4회의 주제는 '고송(枯松)'이었다. 우리나라 고송의 아름다움을 전국을 다니며 본 것을 붓 가는 대로 그려냈다. '천년의 향기'는 가로 12m, 세로 1.5m 크기였다. 제5회는 고미(古美) 탐색의 과정이 담겨있다. 우리나라 국보의 아름다움과 소나무와 매화를 접목했다.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가슴에 안고 잠이 들었다. 소나무에 의탁한 작흥은 곧 신개념 불두(佛頭) 이미지로 건너왔다.

호흡을 다듬으면서 지난 역사의 시간을 뒤적거렸다. 그렇게 해서 찾은 가야의 미학을 주제로 제6회를 장식했다. 김해, 고령 외에 가야권 지방의 뿌리를 찾는 유물과 그 자신이 창의한 도예를 보여준다. 백천 버전의 금동관이 이때 태어난다.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나그네. 그는 이제 우주로의 잠행을 시도한다. 노자와 장자의 동양정신을 장착했다. 제7회는 '우주 운석전'인데 우주로 향한 수묵의 기운을 뿜어낸다. 제8회는 우주 블랙홀과 바다 심해전, 제9회는 우주먼지와 우주공간을 파고든다. '빅뱅'이란 작품에서는 운석의 여백이 어떻게 음양·태극으로 연결되는가를 궁구한다.

동료 작가의 눈빛이 의아해지고 휘둥그레진다. 백천, 와도 너무 멀리 온 거 아닌가? 기존 문인화의 상도에 맞지 않을 것 같은, '해프닝 같은 그림'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 자신도 일순 조금 당황하고 난감했지만 '이제 달리 퇴로가 없다'면서 선을 그었다.

암담하고 갈 길이 보이지 않으면 울릉·제주도에 한 달가량 은거한다. 검푸른 바다와 심야 해풍의 서늘함 그리고 으스름 달무리, 그런 기척이 그의 근육 속으로 살금살금 녹아들었다. 아득한 깊이와 질감을 표현하고 싶었지만 기존 화방의 재료로는 한계가 있었다. 그런 재료로는 심원한 깊이의 우주를 담아낼 수 없어 새로운 재료를 찾아 나선다. 그렇게 해서 찾은 게 소금이다. 염분이 수묵 속으로 스며들어 가게 했다. 일종의 백천표 '염묵'(鹽墨)이랄까.

◆제10회 한글, 매화로 피다

10회 개인전은 한글 문자추상을 독창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현대 수묵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달까. 지금껏 매화도에서 한 번도 시도된 바 없는, 한글 자모의 붉은 화점(花點)은 유니크한 매력을 준다. 발상의 전환이 빛난다. 법고의 아름다움이 창신의 새로움과 합치돼 심플한 미감(美感)을 불러일으킨다. 한글 자음 14자와 모음 10자의 직선과 곡선 미학은 초성과 중성 획의 무궁무진한 운용의 묘를 낳았다. 이응과 히읗의 곡선미는 문자추상의 절경을 이룬다. 한글 운필의 방향은 고정된 틀이 없다. 가로쓰기와 세로쓰기, 왼쪽과 오른쪽, 오른쪽과 왼쪽, 모든 필획은 공간 활용이 가능하다. 특히 대작 '한글, 매화로 피다'(140×300㎝)의 스펙터클한 구도가 볼만하다. 구불구불 뒤틀린 노매(老梅)의 풍상은, 매화를 그리는 다섯 가지 묘법인 화매오요(畵梅五要)가 다 들었다. 왼쪽 하단의 수백 년 묵은 밑동과 초묵의 몰골(沒骨) 번짐은 탐매선경(探梅仙境)이 따로 없다. 화폭을 양분한 구도의 멋과 여백미 또한 절묘하다. 오른쪽 곡선을 그리며 뻗어 내린 절매(折梅)의 의경(意境)이 돌올하다. 화폭마다 작게 그려 넣은 Fish(물고기)의 이니셜과 붉은 낙관 역시 멋을 더한다. 반면, 'ㅇ(이응)'은 모든 모음의 초성에 모셔져, 어미인 땅을 상징함과 동시에 불교의 공(空) 사상을 내포한다. 그는 "ㅇ(이응)이야말로, 직선과 곡선의 수묵 미학을 품은 한글 추상의 묘처"라고 말했다. 어떤 이들은 이번 백천의 한글매화전을 두고 '현대 수묵화의 전대미문의 사건'이라 평하기도 했다. 파격, 대담함, 변화, 그게 개인전 때마다 구현됐다. 그건 어쩜 아날로그가 아니라 백천만의 '새날로그'라고나 할까?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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