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9    업데이트: 24-09-04 16:20

작가노트

제6회 백천 서상언 개인전(700년 가야 魂, 먹과 놀다)
아트코리아 | 조회 746
700년 가야 魂, 먹과 놀다
―한지에 핀 토기
 
 
이번 여섯 번째 전시회의 주제는「700년 가야 魂, 먹과 놀다」로 정했습니다. 부제는 ‘한지에 핀 토기’로 뽑았습니다. 작업 중 가장 애착을 쏟았던 토기를 세상에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컸습니다.
 
많은 분들이 21세기에 들어와 해양 문화권의 바탕이 된 한반도 6가야(금관가야(김해), 아라가야(함안), 고령가야(함창), 대가야(고령), 성산가야(성주), 소가야(고성))를 주목하는 이유는,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태평양 시대’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태생부터 가야인입니다. 태어난 곳은 합천이고, 고향은 고령으로서 유년 시절 황강, 낙동강과 가야산을 배경으로 성장했습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다 시피, 서기전 1세기부터 서기 6세기 중엽까지 700년 동안, 주로 경상남도 남해 대부분과 경상북도 일부 지역을 영유하고 있던 고대 국가가 가야입니다. 또한 가야 후기의 전성기에는 소백산맥을 서쪽으로 넘어 금강 상류 지역과 섬진강 유역 및 광양만, 순천만 일대의 호남 동부 지역을 포함하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5세기 중엽에 나타난 고령의 대가야국(加耶國: 加羅國)은, 청소년기 청년기 때 나의 예술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물론 가야 전역을 통합하는데 이르지 못하고 분열하였습니다만, 562년에 신라에 멸망할 때까지 가야의 마지막 맹주로써 큰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나는 이번 전시회를 기획하면서, 어릴 때 놀았던 가야의 고분과 유적 유물이야말로 내 작품의 원형 상징임을 체감했습니다. 가야는 철과 강과 바다의 나라입니다. 철을 팔아 낙랑이나 백제의 선진 문물을 구해올 수 있었고, 바다를 통해 왜국(倭國)에도 수출했습니다. 나는 합천 지역에서 출토된「금동장식투구」를 형상화하였습니다. ‘중국 나시족 동파추상문자’를 함께 그려넣음으로써, 가야와 주변국들과의 새로운 관계를 이미지화했습니다.「말안장 가리개」역시 합천 출토품입니다. 이런 안장 문화는 가야 왕 김수로를 거쳐 , 훗날 김유신에 의해 통일 전쟁에까지 영향을 끼칩니다. 물론 창작품이기는 하지만「아사달문양토기」는, 강을 중심으로 성장한 가야시대의 토기문화를 원과 금관모양을 새겨 넣어, 청동기와 철기 시대의 벼농사문화를 재현한 작품입니다.「굽다리접시와 소나무」작품은, 김해 가야의 굽다리접시에 토종 소나무를 병치시킴으로써, 고대인들의 실생활과 한국인들이 품고 있는 소나무의 정신적 깊이를 접목시킴으로써, 창조적 예술을 추구했습니다.
 
모든 작품들이 다 나름의 의미를 갖고 태어났지만, 특히 고령가야에서 출토된 지산동 32호분「금동관」(200×230cm) 작업은, 나에게 실로 황홀경이었습니다. 좁은 테의 대륜 위에 광배 모양의 손바닥 크기만한 입식판을 세운 형태와, 입식의 좌우 대칭은, 선과 면의 미학적 극치였습니다. 보주형의 양쪽 볼 밑에는 앵무새 부리 모양의 돌기가 아래로 향해 있고, 입식판 표면에 그려진 ‘×’자 무늬는 가장 아름다운 선분 비율인 황금분할(黃金分割)된 교차점을 이룹니다. 입식판의 앞면에는 지름 1㎝ 정도의 원형 영락(瓔珞, 구슬을 꿰어서 만든 목걸이) 서른 개를 일정한 수법과 방식으로 매달아 장식하였으며, 전체적으로 단순한 듯하면서도 세련되었고, 점열문으로 구획된 문양과 더불어 더욱 화려하게 보입니다. 이와 같은 외형적 특징은 신라의 금관과 분명히 다른 차별성을 보여주며, 가야문화의 독자성을 상징합니다.
 
나는「금동관」을 형상화하기 위해 전통 한지위에 수십 수백 번 붓질했습니다. 금동관의 표현미는 금빛의 발색과 그 속에 담긴 고대 정신의 광맥을 캐는 일입니다. 하여 나는, 황(黃), 청(靑), 백(白), 적(赤), 흑(黑)의 오방색을, 번갈아 먹과 아크릴에 섞어 사용했습니다. 황(黃)은 우주의 중심 색이자 고귀한 색으로, 고대에는 임금의 옷과 왕관을 만들 때 쓰였습니다. 먹과 여타의 배색은 고대인들이 추구한 정신세계를 돌올하게 했습니다. 밤낮없이「금동관」에 매달린 작업은, 나에게 예술의 카타르시스를 한껏 맛보게 했습니다. 작업 때마다 느낀 일이지만, 한지야말로 수묵의 섬세한 붓의 숨결을 가장 완벽히 받아주었으며, 태점을 찍고 덧칠을 거듭하는 사이, 나는 마치 가야의 왕이라도 된 듯한 착각 속에 몰입했습니다. 이 영감(靈感)의 과정은, 천지기운을 다 쏟아 부어야만 도달할 수 있다는, 동양 예술의 극치인 허정(虛靜)의 세계를 내게 안겨 주었습니다.
 
이번「700년 가야 魂, 먹과 놀다」展의 또 하나의 중요한 기획은, 한국 최고의 진사 사기장 운당 김용득과 공동 작업한,「소나무분청도예」작품입니다. 8점정도 출품될 예정이며, 그 작업은 7월 중복 날 이뤄졌습니다. 아침 10부터 붓을 들어 캄캄한 한밤중에야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날 내내 나는, 초벌 도자기 위에 신들린 듯 노송(老松)과 학과 현대 수묵화를 번갈아 그려나갔습니다. 인접 예술과 함께 논 그 시간이야 말로, 화가에겐 심미안의 경계를 확장하는 새로운 시도였으며, 고귀한 체험이었습니다.
 
지난「松·古美殿」과 이번 여섯 번째 전시회인「700년 가야 魂, 먹과 놀다」와는 확연히 구분됩니다.「松·古美殿」시리즈는 적묵(積墨)과 때론 초묵(焦墨)의 기법을 통해 노송의 품격과 정신을 고스란히 드러내었습니다. 그리고 ‘국보 83호 금동반가사유상’의「佛頭」작업을 통해, 불교의 진경에 한 발 내디뎠다고나 할까요. 물론 화폭 속에 백자철화포도문호, 백자진사매국문병 등의 국보급 도자(陶瓷)와 매화 그림과의 앙상블은, 평자들의 상당한 주목을 받았습니다.
반면, 이번「700년 가야 魂, 먹과 놀다」시리즈는, 가야 문화의 재발견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고대 역사 속에 파묻힌 가야인의 아날로그적인 풍속과 정신을 21세기에 불러냄으로써, 디지털에 함몰된 현대인들의 정신문화를 새롭게 환기하는 것이, 그 궁극의 목적입니다. 나는 이번 전시를 통해, 고대 6가야인들 이야말로, 한반도의 원형정서이자 겨레 문화의 출발점임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다양한 생활의 기물(器物)을 화폭 위에 먹짓 하면 할수록 그들이 추구한 조화와 소통의 정신이, 얼마나 질박한지도 알았습니다. 하여 나는, 오늘 날 남북의 분단뿐 아니라, 현대인들의 분열된 이분법적 사고를 극복하는데, 700년 가야의 魂을 이 시대에 불러내고자 합니다. 결국 가야의 예술미는 신라인들에게 천년 통일의 꿈을 키워낸 밑바탕이 되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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